2023. 9. 24. 가해_연중25주일
출애 16:2-15 / 시편 105:1-7, 38-45 / 필립 1:21-30 / 마태 20:1-16
“영원한 현재”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성공회는 일 년에 네 번 계절을 따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사계재”라고 부릅니다. 지난 한 주가 “추계재”였습니다. 사순 1주일, 성령강림주일, 성 십자가의 날(9/14), 성 루시아 축일(12/13) 이후에 오는 수요일에는 “성직자”의 성소를 위해, 금요일에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의 성소를 위해, 그리고 토요일에는 “모든 신자들”의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하느님께서 각자를 부르신 성소를 확인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지요. 개신교 출신인 저는 이러한 사계재 전통을 좋아합니다. 이 사계재 절기가 되면 하느님의 부르심과 구원의 은총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돌아보고 처음 하느님을 만난 순간을 회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제로 부르심을 받은 그때를 돌아보고 초심을 회복하려 노력합니다. 사람이 하나의 습관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3개월 정도 된다고 하니 우리 성공회는 3개월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사계재만 잘 지켜도 자신의 부르심 때문에 혼란에 빠질 사람은 별로 없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포도원 일꾼을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포도원에 한 데나리온이란 품삯으로 고용된 일꾼들은 그 부름심에 대해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특히 오전 일찍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오후 늦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을 했으니 늦게 온 사람들보다 조금 더 받을 줄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오전에 온 사람이나 오후 늦게 온 사람이나 동일하게 약속한 한 데나리온 만을 품삯으로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이는 매우 부당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에는 노동과 시간에 비례하는 정량적 가치가 합리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들의 불평은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하늘 나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유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그와 유사한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서 설명하는 수사법입니다. 그러므로 설명하려는 대상 A와 비유로 사용된 B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늘 나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등가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레고리아ἀλληγορία” 즉 비유나 우화가 아니면 “하늘 나라”에 대해 인간의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이지 않는, 경험하지 못한 영적인 것을 설명하는 데는 늘 한계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 비유는 가장 강력한 소통의 수단이 됩니다.
교부들은 포도원 일꾼 이야기에서 “하루”라는 시간을 하느님의 구속사 전체의 “역사적 시간”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아침에는 아담을, 아홉 시에는 노아를,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오후 다섯 시에는 모든 민족을 부르셨음으로 이 모든 구속사를 통한 은총에는 시간적 차별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은총과 부르심이 정량적 개념과 전혀 무관하다는 차원에서 묵상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부르심에는 미래나 과거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부르심에는 정량적인 부피와 무게, 그리고 셀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 영원성이 주입되면 그것은 ‘크로노스χρόνος’가 아니라 ‘카이로스καιρός’가 됩니다. 우리는 이를 “때”라고 부릅니다. 그 부르심의 때는 오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나, 오후 늦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나 모두 시간적으로 ‘현재’입니다. 여기에서 한 데나리온은 부르심과 은총의 표징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한 가정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생활비였습니다. 생계를 위해 꼭 필요한 비용이었지요. 오후 늦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일자리를 못 구해서 자칫 굶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종말론적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정량적이지도 않고, 하느님의 카이로스는 셀 수 있는 시간도 아니므로, 그것은 아침이든 정오든 저녁이든 시간적 순서와도 무관합니다. 그것을 저는 “영원한 현재”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과 노동의 양과 질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은총은 은총 자체로 충만하며 영원히 현재에 머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 20:16
하느님의 부르심 안에서 우리의 정량적 가치가 모두 전복됩니다. 부르심에는 시간적인 순서가 없으므로 부르시는 바로 그때가 곧 “한 데나리온”을 받을 은총의 때인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침투하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모태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나, 숨이 곧 끊어지기 직전에 회개하고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이나 부르심과 은총 앞에서는 모두 시간적으로 “영원한 현재”에 놓이게 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필립 1:21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존과 죽음 사이에서 “영원한 현재”를 살았던 사도 바울로의 고백입니다. 소 아시아의 에페소에서 다양한 고난에 직면했던 사도 바울로는 오늘 우리가 읽은 필립비서를 감옥에서 작성했습니다. 그는 언제 죽을지 전혀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서 이런 고백을 한 것이지요. 마케도니아에서 그가 자색 포목상인 ‘리디아’와 함께 세운 필립비 교회에 이 편지를 쓰면서, 그는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유언장을 쓰듯이 애정과 마음을 듬뿍 담았습니다. 바울로의 서신 중에 가장 인간적이며 따뜻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서신서입니다. 바울로는 다른 교회로부터 일체의 금전적 후원을 받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필립비 교회의 지원에 대해서는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로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필립비 교인들은 바울로의 옥중 수발을 위해 ‘에파프로디도’를 급히 파견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에파프로디도가 병에 걸려 그를 다시 필립비 교회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그를 돌려보내며 필립비 교회에 이 편지를 함께 보냈습니다. 언제 다시 사랑하는 교우들을 만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부르심을 돌아보며 애정 어린 충고와 권면을 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부르심이 “영원한 현재” 가운데 놓여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명과 죽음조차도 모두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은 살아서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순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든지 복음 전도의 사명만이 자신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이런 사람은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죽음조차도 불사하는 그의 불굴의 의지는 그가 받은 부르심과 이에 대한 감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복음을 위해 죽도록 헌신하는 것. 이것이 그가 그리스도의 은총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결연한 의지에서 그가 고백한 말이 “나에게 그리스도는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고, 죽는 것도 이득입니다.”라고 번역됩니다. 한마디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현재”라는 실존에 놓인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현재 만을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발현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의 시간은 현재에 집중되어 두려움도 정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삶과 죽음 “그 둘 사이에 끼여”있다고 자신의 상황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소망을 고백합니다. 사실 빨리 순교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개인적으로는 간절히 바라지만, 필립비 교회를 위해서는 아직 자신이 살아서 육신에 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합니다.
“이런 확신이 섰기 때문에 나는 살아남아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 주고 기쁨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필립 1:25
이는 예언이라기보다는 필립비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는 자신이 필립비 교우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필립비 교회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더해주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복음에 대한 부르심의 열정이 아니면 절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연인 간의 사랑보다 더 진한 목자와 교인들 간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필립비 교회는 사도 바울로에게,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 교회에게 각각 축복이었습니다. 상호 축복의 관계인 것이지요.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로가 자신의 부르심을 어떻게 “영원한 현재” 속에서 구체화시켰는지 그의 영적인 성장의 여정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부름심을 통한 “영원한 현재”를 사는 법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필립 3:10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성장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지혜가 충만한 단계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바로 말씀, 성서를 통해 길러집니다. 보고 듣고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구조적으로 우리 안에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그 말씀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말씀과 교회의 고백에 근거합니다. 여기에 세 번째 단계인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덧입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죽음과 어두움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만이 이 험한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세상은 세속적 부귀와 영화, 그리고 소유에서 자신의 힘을 찾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의지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엑수시아ἐξουσία’와 ‘두나미스δύναμις’를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는 네 번째 단계인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하느님 됨을 포기하시고 자신을 비워 낮아지신 ‘케노시스κένωσις, 자기 비움’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복음의 고난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끝은 물론 죽음입니다. 그것은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부활의 승리를 상징하는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개인적 죽음이든 종말론적 죽음이든 실존적으로 반드시 죽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한번뿐인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시킴으로써 현재에 영원성을 더했습니다. 이로써 그의 인격과 주님의 인격이 현재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필립비 교회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1 고린 11:1
하느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현재 가운데 침투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늘 현재이고, 그것이 임하는 때가 현재가 영원성을 획득하는 순간이 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처럼 하느님께서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오늘 하루에 찾고 계십니다. 이른 아침에도 정오에도 그리고 늦은 오후에도… 이것이 부르심에 담긴 “영원한 현재”라는 시간입니다. 현재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이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언제나 ‘아멘’하고 응답하면 됩니다. 정해진 상급은 모두 각자의 몫입니다. 은총은 결코 비교의 대상이 되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측량할 수 있는 정량적 개념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르심은 은총이고 또한 매우 소중합니다. 몸의 지체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구는 아침에, 누구는 정오에, 누구는 늦은 오후에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의 시간도 영원한 현재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과거나 미래에 절대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귀뚜라미 소리가 사방을 뒤덮는 이 가을에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귀한 음성에 각자가 귀 기울이는 그러한 현재를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것이 은총을 많이 받은 우리 교회가 사명을 발견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5주 (가해) 1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주님의 자비와 용서는 무한하시어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항상 풍성하게 베푸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기꺼운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마침내는 주님이 주시는 큰 상급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출애 16:2-15
2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은 이 광야에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다. 3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4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 5 여섯째 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차려보면 다른 날 거두어들인 것의 곱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였다. “저녁에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내신 분이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7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야훼께서는 너희가 당신께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너희는 우리에게 불평하느냐?” 8 모세는 말을 계속하였다. “야훼께서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시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주신다. 야훼께서 당신께 불평하는 너희의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냐? 너희가 하는 불평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야훼께 하는 것이다.”
9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에게 일러주시오. 야훼께서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셨으니, 모두들 그의 앞으로 나오라고 해주시오.” 10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에게 말하고 있을 때 그들이 광야 쪽을 바라보니, 야훼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11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2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하고 일러주어라.”
13 저녁때가 되자 난데없이 메추라기가 날아와 그들이 진을 친 곳을 뒤덮었다. 아침에는 진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14 안개가 걷힌 뒤에 보니 광야 지면에 마치 흰 서리가 땅을 덮듯이,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 15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
성시_시편 105:1-7, 38-45
1 주님께 감사하며 그 이름 높이 불러라. ◯
⋅ 그 장하신 일들을 만방에 알려라.
2 그분께 노래 불러라, 수금 타며 노래 불러 드려라. ◯
⋅ 놀라운 그 일들을 이야기하여라.
3 그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여라. ◯
⋅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아라, 그의 힘을 빌어라. ◯
⋅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마라.
5 얼마나 묘한 일들 하셨는지 생각하여라. ◯
⋅ 그의 기적들, 그 입으로 내리신 판단을 명심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
⋅ 그가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7 그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 ◯
⋅ 온 세상을 바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38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
⋅ 그들이 떠나는 것을 기뻐하였다.
39 하느님께서는 구름을 펼쳐 덮어 주시고 ◯
⋅ 밤에는 불로 비추어주셨다.
40 먹을 것을 구하면 메추라기를 몰아다 주시고 ◯
⋅ 하늘에서 양식을 내리시어 배불리셨다.
41 바위를 열어서 샘물을 솟게 하시고 ◯
⋅ 그 물은 내를 이루어 메마른 땅을 적셨다.
42 당신의 종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
⋅ 거룩한 말씀을 아니 잊으시고
43 당신 백성을 발걸음도 가볍게 빠져 나오게 하시며, ◯
⋅ 뽑으신 그 백성이 기쁜 노래 부르며 나오게 하셨다.
44 그리고는 여러 민족의 땅을 빼앗고, ◯
⋅ 그 종족들이 일군 땅을 물려주셨다.
45 이것은 이스라엘이 주신 법규를 따르고 ◯
⋅ 가르쳐 주신 법을 지키게 하려 하심이다.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필립 1:21-30
21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22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24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25 이런 확신이 섰기 때문에 나는 살아 남아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 주고 기쁨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다시 찾아가게 되면 여러분은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만나게 되든지 이렇게 떨어져 있든지 간에 나는 여러분이 복음의 교리를 위하여 한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 노력하며 28 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용기가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가 되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29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30 여러분은 내가 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았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을 터이지만 지금 여러분도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_마태 20:1-16
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4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5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오후 다섯 시쯤 에 다시 나가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7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9 오후 다섯 시 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11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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