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8. 나해_연중 4 주일 감사성찬례
신명 18:15-20 / 시편 111 / 1고린 8:1-13 / 마르 1:21-28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사랑은 견해의 영역이 아니라 진리의 영역 안에 존재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믿음, 지식, 사랑. 이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이 중에 어느 것 하나만을 신앙에서 선택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믿음이 따르고, 믿음에는 믿는 대상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오늘 고린토 전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1 고린 8:1
고린토는 로마의 속주였던 아카이아 지방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2차 전도여행 때 로마에서 온 브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고린토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로마와 근접한 위치의 고린토 교회는 로마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였던 샘입니다. 고린토 전서는 그 이후에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에 체류할 때, 고린토 교회의 분열의 소식과 음행 등의 소식을 접하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쓴 서간서입니다. 더욱이 고린토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져 교회 설립자인 사도 바울로에 대항하기까지 했습니다. 학자들은 총 4편의 편지를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에 보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편지의 존재는 확인할 길이 없고, 두 번째 편지는 현재 고린토 전서로, 세 번째와 네 번째 편지는 고린토 후서로 전해졌습니다. 고린토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경험하는 문제들과 유사합니다. 그 문제들 전부를 다 언급할 수 없지만, 그중 파벌과 분당의 문제, 음행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교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랑이 없는 신앙적 지식이 고린토 교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행함이 없는, 사랑이 없는 신앙의 지식 말입니다. 고린토 교회 내에 사랑이 없이 각자의 취향을 서로에게 강요하고,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믿음과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서는 남보다 자신이 더 잘났고, 더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다 지식이 있다.” 1 고린 8:1
이것은 고린토 교회에서 소위 지식이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의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 만을 믿었고 자신이 아는 지식을 제일이라 여겼습니다. 이것이 신자들 간에 분열의 원인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아는 대로 주장했고 자기의 믿음과 지식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의 말을 겸허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특히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고린 8:2
안다는 것이 사랑으로 연결되면 좋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일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식과 사랑이 함께 어울리기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행복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저는 아는 것이 곧 권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합당한 사람이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서 말씀을 아무리 잘 외우고, 많이 알며, 전례와 기독교의 지식이 넘쳐나도 그 말씀이 말하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는 것은 늘어나는데 아는 만큼 행동하지 않으므로 머리만 커질 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병폐가 바로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남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다는 여기는 교만.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 여기는 교만.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것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든 게 틀렸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무시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함부로 이런저런 충고나 간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동기에서 나오는 말을 그 발화자는 책임을 질 자신이 있을까요? 흔히 우리는 종종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바쁘면 주일 예배에 빠질 수도 있지.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해 정말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책임을 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특히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어떤 영적인 영향을 끼칠지 우리는 쉽게 간과합니다. 주일 예배를 지키는 것은 하느님과 각 개인 간의 무언의 약속입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부득불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최소한의 죄송한 마음이라도 있어야 정상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양심에 합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공회는 주일 성수를 지키는 문제에 대해 개신교에 비해 너무나 관대합니다. 어디서 이런 자유가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주일 성수의 문제는 개인의 신앙적 양심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관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주일 성수를 지키지 못했다면, 우리 교회에는 주일예배 유튜브 동영상이 있으니 다른 시간에도 최소한 주일 예배를 영상으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주일 예배 참석이 어려우신 분을 위해 토요찬양예배도 저녁 7시에 드리고 있습니다. 또 주일 아침 9시에 1부 예배도 있습니다. 세속적 약속이 중요하다면 하느님과의 약속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일 성수를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신앙의 양심에 맡겨진 선택 의무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라고 시키지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신명 18:20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것을 자신의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 예단해서 확증적으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게 하느님 뜻이야”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완전하지도 않고,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아직 실천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자비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이 아니면 자신의 영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말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습니다. 말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세우고 성장하게 합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암브로시아스테르
사랑이 없고 지식만 있다면 오히려 침묵이 그 영혼에게 더 낫습니다. 지식은 불완전합니다. 지식이 사랑으로 세례를 받을 때 그 지식은 하느님을 알고 사람들을 자비로 대하는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에 뿌리를 둔 지식은 깊은 존재에 대한 이해와 대상에 대한 연대성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새를 사랑하여 새를 연구하고 관찰하는 사람들은 정말 새의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새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은 결국 피아노를 정말 사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아노 치는 기술자가 될 뿐입니다. AI는 너무 많은 지식과 재능을 갖고 있지만 사랑이 없습니다. 그 지식의 분량에 한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AI는 결코 사랑을 모를 것입니다. AI에게 사랑은 단지 방대한 데이터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비워서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마르 1:24
마귀도 AI도 하느님이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지식으로 압니다. Chat GPT에게 하느님에 대해 물으면 엄청난 지식을 알려줍니다. 상당히 신학적인 내용도 잘 정리해서 알려줍니다. 그러나 마귀도 AI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만 사랑하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지식만 있을 뿐이고 사랑을 행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식만으로 사랑이 보증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형상’ 안에 심긴 그분의 신성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 요한 4:16
이 표현은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선언입니다. 반대로 말해서 “사랑은 하느님이다.”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것은 사랑이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그분의 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로는 ‘사랑의 찬가’를 통해 그분의 본성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1 고린 13:7-8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본질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지식도, 우리의 예배도,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헌신도 유한하지만 오직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사실 하느님은 태워버리는 불이십니다.” (히브 12:29)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거짓되고 허망한 모든 지식과 가식들은 불로 태워져 사라질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 교인들에게 한 말을 다시 상기하며 오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풍성해지고, 그 풍성한 지식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그러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1 고린 3:13-1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4주 (나해)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신명 18:15-20
15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16 이것은 호렙에서 대회가 열렸던 날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 청을 드렸던 바로 그것이다. ‘나의 하느님 야훼의 소리를 다시는 직접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무서운 불을 다시는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17 야훼께서는 옳은 말이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이렇게 일러주셨다. 18 ‘나는 네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리라. 내가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주리니, 그는 나에게서 지시받은 것을 그대로 다 일러줄 것이다. 19 그가 내 이름으로 하는 말을 전할 때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친히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말하라고 시키지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성시_시편 111
1 알렐루야!
. 정직한 이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
. 내 마음 다 쏟아 주님께 감사하리라.
2 주께서 하시는 일들 하도 장하시어 ◯
. 그 일들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 깊이 생각한다.
3 그 하신 일 영광스럽고 찬란하여 ◯
. 그 정의는 영원히 남으리라.
4 그 놀라운 일들을 기념토록 남기셨으니, ◯
. 주께서는 자비롭고 인자하시다.
5 맺으신 계약을 길이 잊지 아니하시고 ◯
.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6 뭇 민족의 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주시고 ◯
. 그 위력을 당신 백성에게 보여 주신다.
7 하시는 일은 정의와 진리이시며 ◯
. 그 모든 법은 진실 그 자체이시니,
8 영원히 흔들리지 않도록 ◯
. 진실과 정직으로 제정되었다.
9 속전을 내어 당신 백성을 구해 내시고
. 영원히 지킬 계약을 맺으셨으니, ◯
. 그의 이름 두렵고도 거룩하여라.
10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치나니,◯
. 주님 찬송 영원히 올려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8:1-13
1 이제는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에 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다 지식이 있다.”고 여러분은 말하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4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문제가 나왔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상에 있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5 남들은 하느님도 많고 주님도 많아서 소위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들 하지만 6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7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우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는 그것이 참말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에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합니다. 8 음식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안 먹었다고 해서 손해될 것도 없고 먹었다고 해서 더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9 다만 여러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지식이 있다는 여러분이 우상의 사당에 앉아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는 양심에 꺼리면서도 용기를 얻어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11 그렇게 되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여러분의 그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시지 않았습니까? 12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고기를 다시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복음서_마르 1:21-28
21 예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23 그 때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소리로 24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25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26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27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28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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