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James Chae 2024. 2. 9. 22:24

 

 

2024.2.10. 나해_설날별세기념성찬례 감사성찬례

민수 6:22-27 / 시편 89:1-2, 11-16 / 야고 4:13-17 / 마태 6:19-21, 25-34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하느님과 그리스도인의 사이에는 항상 긴장감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라는 생각,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생각,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치 우리를 돕기 위해 항상 대기하고 계신 집사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시냐?라는 질문을 하면 대부분우리를 도와주시는 ”, “우리를 위로하시는 ”, “우리를 사랑하시는 ”,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은 우리가 찬양할 ,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 우리가 항상 경배해야 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섬기고 절대 순종해야 분이라 말하는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뭔가를 바라고 뭔가를 구하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셔야 하시는 분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어긋날 우리는 오히려 하느님께 역정을 내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먼저 드려야 하고, 그분을 섬겨야 하고, 그분께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위시리스트들로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세우시길 원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활동 속으로 초대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를 따랐지만, 고난의 길에 동참하는 것은 거부하고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이주님을 따른 부활 체험과 성령 강림의 체험 이후에나 가능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항상 우리  편의대로, 하느님을 우리 취향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의 주도권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위시리스트가 아니라 하느님의 위시리스트에 우리 자신을 맞추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나를 따르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시리스트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중히 여기고, 타자의 고통과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고, 사랑을 통해 이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할 , 우리의 일상을 살아갈 , 그리고 무슨 일을 시작할 ,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어 결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겠다.’ 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 4:15

 

이것이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표현대로, 하느님, 초월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표현입니다. 그분의 처분에 우리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는 . 이를 통해 인간은무정념 apatheia’ 상태에 이르고, 무정념의 상태에서 인간은 진정한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인 간의상호협력, “συνεργία 시네르기아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시네르기아 이르는 길은나를 따르라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의 일상 속에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고, 우리 자신을 비우는 가운데, 그분의 행위에 동참함으로 가능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긴장감의 다른 측면은 별세한 사람들에 대한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기도가 과연 필요한가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먼저 가신 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이미 살아생전에 신앙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다가 돌아가신 , 예수를 전혀 접해보지 않고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옥 교리가 있어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 마지막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회개할 기회를 연옥에서 얻을 있다고 믿기 때문에 별세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공간과 시간의 설정은 마치 판타지 영화 같은 상상을 자극할 있어 실재와 상상 간에 간격을 유발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상은 실재를 대체할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교리를 믿는 분들도 많으심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우리 성공회는 연옥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공회 39 신앙신조 22조에서 이를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연옥, 면죄,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다.” 성공회 39개 신앙신조 22조

 

고교회 전통 계열의 성공회에서는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이에 대해 기본적으로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입장에 있습니다. 특히 공간적인 연옥의 개념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개신교의 경우는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주장하기 때문에 이미 하느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철저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 놓습니다. 그러니 별세자를 위한 기도를 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공회는 신학적으로 이러한 부분을 정확하게 진술하지 않고는 있지만, 암묵적으로성도의 상통이라는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이를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물론 믿는 자를 의미하지만, 폭넓은 의미에서 모든 자와 죽은 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에 더해 우리는기억 anamnesis” 차원에서 이를 생각해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1 고린 11:24

 

성찬 기도의아남네시스입니다. 성찬례를 통해, 빵과 포도주를 통해, 주님을 기억하라는 명령. 이것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부활에는 몸의 부활과 기억의 부활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찬례를 제정하시면서 이러한 부분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먼저 가신 분들에 대한 기억은 별세하신 분들이 우리 안에 기억으로 부활하여 현재화되는 체험입니다. 우리가 성찬례를 통해 과거 최후의 만찬 때의 주님에 대한 기억을 예배 속에 현재화시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과거에 나눴던 고인과의 기억들이 현재화될 때는 사실성보다 새로운 차원으로 기억이 승화됩니다. 실재 시간과 공간에서 분리된 기억은 다른 의미로 기억하는 사람에게 각인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인과 나눴던 과거의 나쁜 추억도, 과거의 좋았던 추억도무정념 필터를 통과하며 전혀 새로운 의미로 현재화합니다. 이것이거듭난 기억의 부활이며 참다운 용서와 화합의 프로세스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실 자와 죽은 자의 상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할 없습니다. 그러한 경험도 없습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찾으면, 외경으로 분류되는 마카베오 12:38~45절에서 기록을 찾을 있습니다. 시리아 군과 싸우다 전사한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조상의 묘에 매장하면서 그들은 죽은 자들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기에 전사자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2 마카 12:44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이러한 부활에 대한 믿음은 다니엘서 12 2절에 근거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미 죽어서 땅 속에 묻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며 그 가운데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도 있고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다니 12:2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며, 부활한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와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 4 1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2 디모 4:1

 

마지막 우리는 모두 부활을 것이고, 부활 후에는  자와 죽은 자가 모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자는 부활 살아 있는 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죽은 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아 생명이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부활과 심판을 믿기 때문에 우리 보다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모든 별세자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일을 전권을 가지고 스스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정의로우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의지하여 별세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전권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모든 별세자들을 위한 교회 축성된 우리 교회는 그래서 자와 죽은 자들의상통 우리 기도 가운데 이루어짐을 믿으며 기도하는 사명을 이어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가 마지막 때에 모두에게 은총으로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 속에 현재화되는 별세한 자들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애틋한 사랑과 용서의 열매로 우리 안에 맺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오늘 민수기 말씀처럼 이러한 우리의 기도가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는그러한 기도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한 믿음과 희망 속에서 우리는 오늘 먼저 가신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조상들을 추모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모든 별세자들과 우리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음력 1.1. 설날

 

본기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대대로 번영을 누리게 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기억하오니,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주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민수 6:22-27

22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로 복을 빌어주라고 하여라. 24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26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성시_시편 89:1-2, 11-16

1    주여,
.     내가 당신의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리이다.
.     당신의 미쁘심을 대대로 전하리이다.
2    당신께서 다짐하신 사랑,
.      미쁘심은 하늘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11  하늘이 당신 것이오니, 땅도 당신의
.     땅과 안에 담긴 모두 당신께서 만드신 것이며,
12  북녘과, 남녘을 만드신 이도 당신이오니
.     다볼산도 헤르몬산도
.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옵니다.
13   모든 전공이 당신의 것이니
.     억세신 당신 손이여, 탁월하신 오른손이여.
14  정의와 공정이 당신의 옥좌를 받들고,
.     사랑과 진실이 당신의 거동을 인도하옵니다.
15  복되어라, 주님께 만세 부르는 백성
.     그들이 걷는 길을
.     당신의 환한 얼굴이 비춰 주시니
16  날마다 이름 높이 기리고
.     당신의 정의로 사기도 드높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야고 4:13-17

13 오늘이나 내일쯤 아무 아무 도시로 가서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보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14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 그러므로 당신들은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저런 일을 해보겠다.” 하고 말해야 입니다. 16 그런데도 당신들은 지금 허영에 들떠서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담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17 사람이 제가 마땅히 해야 착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

 

 

 

복음서_마태 6:19-21, 25-34

19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시간인들 늘일 있겠느냐? 28 너희는 어찌하여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것을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