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배척당하는 표징”

James Chae 2024. 2. 4. 06:29

The Presentation of Christ in the Temple (1645) By Charles Le Brun / 사진출처: artvee.com

 

2024.2.4. 나해_주님의 봉헌 축일(연중5주일) 감사성찬례

말라 3:1-5 / 시편 24:(1-6)7-10 / 히브 2:11-18 / 루가 2:22-40

 

 

배척당하는 표징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루가 2: 34-35

 

시므온의 예언으로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은 누군가에게는 축복이고 누군가에게는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언급한일으킬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고, ‘넘어질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비유를 넓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있습니다. 자기의 편협하고 닫힌 눈으로 그분을 보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돌이 것이고, 자신의 욕심과 욕망으로 그를 보면 그는 그들을 부수는 돌이 것입니다. 그러나가난, 단순, 순결 눈으로 그를 보는 사람은 그에게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교부 오리게네스)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그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대로 정말 세상적으로 볼품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과 제자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와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흔히 성화를 통해 보게 되는 금발의아름다운 백인 모습도 전혀 아닙니다.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이사 53:2-3

 

그분은 왕궁에서 태어나지도 않으셨고, 가장 가난한 갈릴리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양과 염소가 아닌빈자의 예물 비둘기를 봉헌했습니다. 그것이 가난한 그들에게 최선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들어간 그들은 매우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 교회에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모습으로 주님께서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주님의 정결례를 드리는 그때 성전에는 시므온과 안나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가난하고 볼품없는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성전 권력을 장악했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생 메시아를 희망으로 성전을 지키던 늙은 시므온과 가난한 예언자 과부만이 초라한 부부가 안고 아기 예수를 알아봤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이 그렇게 초라했다면 번째로 다시 오시는 주님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때에 우리는 그분을 정말 알아볼 있을까요? 묵시문학적 표현대로 그분이나팔소리와 천사들 대동하고 화려한 가운데 다시 오시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도 전혀 알아볼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제자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예수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바람이 투사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 앗시리아에게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며 시작된 이스라엘의 비극은 후에 남유다마저 바빌론에 멸망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심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축되었지만, 다시 알렉산더 대왕의 시리아 제국에 의해 무너지고 분봉왕 헤롯에 의해 재건될 때까지 유대교는 700 동안 제대로 나라도 없는, 성전도 없는 신세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독립과 회복을 약속한 메시아의 등장은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2세기 경에 시리아 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펼친하스몬 왕가유다 마카베오 메시아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특별한 권위로 민중을 압도하고 마귀와 병의 권세를 물리치는 예수의 모습은 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아 자체로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의 부르심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따라다니며누가 높으냐라는 자리싸움을 하기 바빴고,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할 그분의 좌우편에 앉게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몰이해 인해 베드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죽음을 암시했을 화를 내며 예수께 그럴 없다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이 예언한 대로 그들은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예수’, ‘배척당하는 표징으로서의 예수 도저히 받아들일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정치적 메시아에 올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바람이 좌절됐을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팔았고, 베드로는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으며,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배척당하는 표징으로서의 예수 도저히 감당할 없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목적과 욕심, 그리고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투영한 결과입니다. 결국 그들의 욕망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시므온의 고백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물론 복음서 편집상 이를사후 예언이라 부르는데, 사후 예언은 전기 문학에서 주인공의 사후에 사건을 예언형식으로 소급하여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초대 교회의 예수의 정체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권위와 정체성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 간에 얽히고설킨 매듭을 푸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는 부끄러운 십자가 처형을 당해야만 했을까? 유대인들도 율법에 반하는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일 있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반 부제를 그들은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로마의 법정에 세우기 위해 그토록 노력을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로마에 대항한 정치범만 매달리는 십자가 처형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일까요? 예수의 거침없는 행보와 그들이 감당할 없는 그분의 권위와 권능은 예수의 사후에도 영향력이 계속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에게 절대적 인기가 있던 세례자 요한을 민중의 손에서 앗아간 그들이 예수까지도 그렇게 죽이기에는 너무나 정치적 부담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운동이 철저히하느님의 저주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사람마다 모두 저주받은 사람이다.”라는 신명기 21 23 말씀을 그들은 기억했을 겁입니다. 그래서 예수가하느님의 아들 불리기보다는하느님의 저주받은 불리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분봉왕 헤롯이 죽여준 것처럼, 이번에는 예수를 로마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을 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루가 2:35

 

결과적으로 그분의 죽음은 모든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인 것과 같이 이제 하느님의 아들을 직접 이방인들의 손을 빌려 죽이는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그들은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하느님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정말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예수를 버리지 않고 따랐을 것으로 자신을 합니까? 우리는 정말 시므온과 안나처럼 초라한 예수를 통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볼 있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생각을 투영하지 않고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할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나, 십자가 이전의 제자들과 정말 다른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정말 안전한가요? 부활 이전의 제자들이 세속적인 욕심 때문에 그분을 따라다녔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안녕과 세상적 축복, 성공,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전 중심의 신앙을 가졌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 축복과 안녕을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자신 있게 맞이할 있는 사람들입니까? “배척당하는 표징으로서의 예수 우리를 끊임없이 촉구하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제자들을 그분의 고난으로 초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길로 오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의 길은 오늘 시므온과 안나가 예언한 대로 믿지 않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고, 믿는 사람은 바로 서게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길에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과 관념, 우리의 습성과 욕망 등을 철저히 그분 앞에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개라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완전한 개념과 인식의 전환을 뜻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윤리적 잘못을 아뢰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을 붙들고 있던 모든 인식과 개념, 그리고 사회적 통념으로부터의돌아섬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마음의 평안과 세속적 축복, 그리고 세상적 행복을 위해 교회에 온다면 우리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삶을 부인하고 내세의 희망과 종말에 대한 기대에만 쌓여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 이후에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셨던 것은 베드로의 완전한 메타노이아 때문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부활을 증언했던 사도들은 모두 자신들의 인식과 개념 그리고 기존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 하느님 중심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그들의 부활의 증언 위에 우리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도 바울로가 변화된 것도 이러한 완전한 메타노이아 때문입니다. 

 

완전한 메타노이아는 우리의숨은 생각 드러내고 우리의 가식과 우리의 모든 욕망이 하느님 앞에 철저히 무너지는 메타노이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완전한 회개를 원하십니다. 오늘 주님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예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바랍니다. 양초가 자기 자신을 태우며 밝은 빛을 내듯이 봉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태우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봉헌 축일에 양초를 봉헌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봉헌한 양초는 단순히 양초라는 의미를 넘어 우리의 마음과 모든 것을 태우는 양초가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과 사랑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배척당하는 표징으로서의 예수 따르며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시므온과 안나처럼배척당하는 표징으로서의 예수 온전히 있는 눈이 열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 2.2 주의 봉헌 축일

 

주의 봉헌 축일은 연중4주일(1 28일과 2 3 사이 주일) 옮겨 지킬 있습니다.

 

 

본기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 오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전에 봉헌되셨나이다. 겸손히 비오니, 우리도 정결한 마음으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말라 3:1-5

1보아라.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 그가 오는 ,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 누가 버텨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4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라. 5 나는 너희의 재판관으로 나타나 점쟁이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 하늘 두려운 생각없어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의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죄를 당장에 밝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성시_시편 24:(1-6)7-10

1     세상과,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주님의 ,
.     땅과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주님의
2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     땅을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산에 오르랴?
.     어떤 사람이 성소에 들어서랴?
4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허망한 뜻을 두지 않고
.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이다.
5    이런 사람은 주님께 복을 받고
.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7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싸움에 용맹 떨치신 주님이시다.
9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만군의 주께서 영광의 , 그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2:11-18

11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내가 당신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시편 22:22
13
나는 그분을 신뢰하겠습니다.이사 8:17(2사무 22:30 참조)하고 말씀하셨고 다시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칠십인역 이사 8:1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4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15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16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이사 41:8-9 17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없이 있었습니다. 18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있으십니다.

 

 

 

복음서_루가 2:22-40

22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23 그것은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출애 13:2(13:12, 15 참조)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24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레위 5:7, 12:8.
25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아기를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33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기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분이십니다.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것입니다.”
36
또한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의 혈통을 이어받은 안나라는 나이 많은 여자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결혼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같이 살다가 37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왔다. 38 여자는 예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바로 자리에 왔다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이 구원될 날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아기의 이야기를 하였다.
39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