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7. 나해_공현대축일(연중1주일) 감사성찬례
이사 60:1-6 / 시편 72:1-7, 10-14 / 에페 3:1-12 / 마태 2:1-12
“이제 가라, 이제 가라”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It all began with the three wise men
Followed a star took them to Bethlehem
And made it heard throughout the land
Born was a leader of man
All going down to see the Lord Jesus
All going down to see the Lord Jesus
All going down
모든 것은 세 명의 박사들로 시작됐어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이끌려갔던
그리고 그 소식이 전국으로 퍼졌어
인간들의 지도자가 태어났어
모두 주 예수를 보러 가는 중이야
모두 주 예수를 보러 가는 중이야
모두가 가고 있어.
[Freddie Mercury의 Jesus 곡의 일부]
몇 년 전에 영화 [보헤미안 렙소디]로 ‘프레디 머큐리’가 21세기에도 다시 주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멋모르고 좋아했던 ‘Queen’의 리더 싱어이지요. 방금 제가 언급한 곡은 퀸이 1973년에 발표한 첫 앨범의 아홉 번째로 수록된 곡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가스펠과 락의 분위기를 접목한 매우 특이한 곡으로 박력 있는 기타 사운드가 특히 매력적인 곡입니다. 폭발적인 가창력의 재능과 활발한 활동에 반해 그는 평생을 술과 마약과 친숙했고 마지막에는 결국 에이즈로 사망하게 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그가 왜 ‘Jesus’라는 곡을 작곡했는지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배화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도 Zoroastrian’였습니다. 아프리카의 한 영국 식민지에서 태어난 프레디 머큐리는 가족을 따라 인도로 이주해서 학창 시절을 보냅니다. 인도에서는 조로아스터교도를 ‘파르시 Parsi’라 부릅니다. 파르시는 고대 페르시아에 기반을 둔 종교입니다. 오늘 마태오복음이 언급한 동방박사는 고대 페르시아의 맥을 잇는 파르티아 제국의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이라 여겨집니다. 이들은 점성술과 마술에 능했고 ‘마기(Magi)’라고 불렸습니다. 사실 프레디 머큐리가 기독교와 인연을 가진 것은 어린 시절 인도 ‘뭄바이’에 있는 성공회 성당 기숙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파르시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이 활동하던 영국의 기독교 정체성을 이 곡에서 접목시킨 것으로 여겨집니다. 2천 년 전 동방박사가 기독교 문화의 시작과 연관성을 가진 것같이 이제 자신의 음악으로 영국 사회에 자신의 영향력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곡의 전반부는 ‘늙은 이’와 ‘거지들’, 그리고 ‘나병환자’ 등이 등장합니다. 모두가 복음서대로 예수를 만나 고침을 받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당시에 ‘부정하다’라고 외치며 자신에게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나병환자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정확하게 프레디 머큐리의 영국 이민 생활의 인종차별을 반영한 것일 겁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그의 가족은 매우 가난했고, 그는 어려운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감당하며 디자인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뮤지션이 되고자 하는 꿈을 한 번도 접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이 이미 훌륭한 뮤지션이라고 허풍 떨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그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대중은 물론이고 모든 평론가들과 뮤지션들로부터 당대 최고의 보컬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Jesus라는 곡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가라, 이제 가라, 너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어” [Freddie Mercury의 Jesus 곡의 일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방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깊은 수렁에 빠져 전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을 때,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 때, 인생의 막다른 길이나 깊은 낭떠러지로 내몰릴 때… 사람들은 다시 삶을 리셋하고 싶거나,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합니다. 물론 복음서의 나병환자처럼 자신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런 구원자는 우리 앞에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어두운 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회피한다고 그 어둠이 사라지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달아난다고 어둠을 떨쳐버릴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새벽이 트기 바로 전의 밤이 가장 어둡듯이 빛은 가장 어두움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는 모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별을 바라보게 하는 표징이 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하늘에는 항상 별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 희망을 놓지 낳는 것. 그 희망과 간절함이 있었기에 동방박사는 위험한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프레디 머큐리도 젊은 시절의 가난 속에서 자신들의 조상인 파르시의 사제인 동방박사들에게서 그러한 희망을 봤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그 빛이 음악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방박사가 본 빛이 우리 각자에게 비출 때 각각 어떤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빛은 우리 안에 잠재된 희망을 밖으로 이끌어내는 빛일 아닐까 생각됩니다.
마태오가 기록한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또 실증적으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의미 있는 해석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희망의 이야기로 읽을 때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이 동방박사 이야기와 나병환자를 만난 예수 이야기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노래 속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희망에 들떠 예수에게로 몰려갔습니다. 이는 복음서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께 나아가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아무리 ‘고난의 신학’, ‘은총의 신학’을 선포해도 우리와 같은 민초들은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어 합니다. 모든 경제지표도, 물가도, 우리의 수입도, 정치적 현실도 모두 절망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오늘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를 격려하는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고, 험담과 혐오 그리고 반목이 난무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우리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 때에도, 마태오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도, 프레디 머큐리가 Jesus라는 곡을 만들 때에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그 절망은 기세가 꺾일 줄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여전히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의에 합당한 것들은 육체에서 완성된다.” 리옹의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 중에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 다시 하느님의 성육신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 외에는 없다고 성서는 단언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육체와 이 세상을 포기하고 우리 육체 밖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는 감옥 같은 육체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실패작인 이 절망적인 세상을 포기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데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만약 육체가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몸 밖에서 그분을 만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임마누엘’이란 예언은 결코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약 육체를 포기하셨다면, 그것은 곧 그분이 만드신 이 세상을 포기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총이 절망을 이깁니다. 은총이 고통을 이깁니다. 한갓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노아의 무지개도 희망을 말할 수 있고, 하느님의 약속의 징표가 될 수 있다면, 그분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사건은 어떻겠습니까? 그분의 성육신이 바로 노아가 본 무지개와 같은 희망의 징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육신은 노아가 절망 속에서 바라봤던 희망의 무지개처럼 우리를 희망으로 이끄는 빛입니다. 그 빛을 동방박사들이 봤고, 사도들과 많은 교부들이 봤고, 프레디 머큐리가 봤고, 그리고 우리가 봅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이야기는 매년 반복되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희망을 새롭게 갱신해 줍니다. 가장 어두울 때 그분의 빛은 더욱 밝게 빛납니다. 골짜기가 깊으면 봉우리도 비례해서 높은 법입니다. 깊은 절망은 역설적이게도 높은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절망이 지닌 역설입니다. 가장 어둡기 때문에 별은 더 아름답게 빛납니다. 우리 안에 ‘에피파니(epiphany)’라는 그분의 현현의 빛이 여전히 비추고 있다면 용기를 가지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세상의 가장 절망의 밤에 주님께서 가장 절망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절망과 가난을, 낮아지심을 친히 경험하셨으니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처지를, 우리의 아픔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손바닥이 그의 머리를 만지는 걸 느꼈어
이제 가라, 이제 가라, 너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어
Felt the palm of a hand touch his head
Go now go now you're a new man instead”
[Freddie Mercury의 Jesus 곡의 일부]
노래의 가사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안수하시고 과거로부터 벗어나 “이제 가라, 너는 새로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절망케 하는 모든 것이 ‘나병’입니다. 이제 그 나병이 깨끗해졌으니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나아갑시다. “모두 주 예수를 보러 가자” 외치는 노래 가사처럼 그분께,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께 함께 달려가는 그러한 2024년이 되길 간절히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1.6. 공현대축일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동방박사를 별빛으로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참 빛으로 인도하시어 온 인류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60:1-6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2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3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오는구나.
4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아라.
. 모두 너에게 모여오고 있지 않느냐?
. 너의 아들들이 먼 데서 오고,
. 너의 딸들도 품에 안겨온다.
5 이것을 보는 네 얼굴에 웃음의 꽃이 피리라.
. 너의 가슴은 벅차 올라 부풀리라.
. 바다의 보물이 너에게로 흘러오고
. 뭇 민족의 재물이 너에게로 밀려오리라.
6 큰 낙타떼가 너의 땅을 뒤덮고
. 미디안과 에바의 낙타들이 우글거리리라.
. 사람들이 세바에서 찾아오리라.
. 금과 향료를 싣고
. 야훼를 높이 찬양하며 찾아오리라.
성시_시편 72:1-7, 10-14
1 하느님, 임금에게
. 올바른 통치력을 주시고, ◯
. 임금의 아들에게
. 정직한 마음을 주소서.
2 당신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
. 약한 자의 권리를 세워 주게 하소서.
3 임금이 의를 이루면
. 높은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안겨주고 ◯
. 언덕들이 정의를 가져다주리라.
4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쳐부수고
. 약한 자들의 권리를 세워 주며 ◯
. 빈민들을 구하게 하소서.
5 해와 달이 다 닳도록 ◯
. 그의 왕조 오래오래
. 만세를 누리게 하소서.
6 풀밭에 내리는 단비처럼,
. 땅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
. 그 은덕 만인에게 내리리니
7 정의가 꽃피는 그의 날에 ◯
. 저 달이 다 닳도록 평화 넘치리라.
10 다르싯과 섬나라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고 ◯
. 세바와 스바의 왕들이 예물을 바치며,
11 만왕이 다 그 앞에 엎드리고 ◯
. 만백성이 그를 섬기게 되리라.
12 그는 하소연하는 빈민을 건져주고 ◯
. 도움 받을 데 없는 약자를 구해주며,
13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
. 가난에 시든 자들을 살려주며
14 억울한 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
. 억압과 폭력에서 그 목숨 건져주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에페 3:1-12
1 그러므로 이방인 여러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포로가 된 나 바울로는 하느님께 기도 드립니다. 2 하느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여러분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심오한 계획을 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앞서 간단히 적은 바 있으므로 4 그것을 읽으면 여러분은 내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계획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지금은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을 빌려 그 심오한 계획을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지만 전에는 지금처럼 인간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었습니다. 6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7 나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을 받고 내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이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8 나는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 은총을 주셔서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셨고 9 또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과거에 감추고 계시던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주게 하셨습니다. 10 이렇게 되어 결국 하늘에 있는 권세의 천신들과 세력의 천신들까지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1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내세워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살게 되어 확신을 가지고 서슴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_마태 2:1-12
1 예수께서 헤로데 왕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그 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 4 왕은 백성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나실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5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서의 기록을 보면,
6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 미가 5:1
하였습니다.”
7 그 때에 헤로데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정확히 알아보고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9 왕의 부탁을 듣고 박사들은 길을 떠났다. 그 때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마침내 그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이를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11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리고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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