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4. 나해_주님의 세례 축일(연중2주일) 감사성찬례
창세 1:1-5 / 시편 29 / 사도 19:1-7 / 마르 1:4-11
“거룩함으로의 초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엣 하샤마임 베엣 하아렛츠).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다.
이는 하느님께서 ‘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했다는 셈족 신앙의 선포이며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오늘 마르코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란 말로 시작됩니다. 마르코 기자는 분명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이 창세기의 선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의 시작과 복음의 시작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각각 ‘창조와 구속’이라는 성서 전체의 주제를 요약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부르는 전통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전통을 지닌 구약 문서를 우리는 ‘엘로이스트 문서(Elohist) ’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는 ‘하느님’이라 보통 번역됩니다. 이에 반해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로 기록된 구약문서를 우리는 ‘야훼스트 문서(Yahwist)’라고 부릅니다. 보통 ‘야훼’ 또는 ‘주님’으로 번역됩니다. 모두 하나의 셈족 신앙에서 시작됐지만,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이스라엘의 사건과 역사 속에서 각각 다른 관점에서 이해되고 해석된 결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역사 속에 사건을 통해 계시해 주시는 정도만큼만 그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분, 땅이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광야에서 복음의 시작을 외친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요한이 창세기의 성령을 대신하여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합니다.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께서 오셨음을 선포합니다. 그 증표는 ‘물의 세례’였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라는 말처럼 창조의 시작은 물과 연관됐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시작도 물과 연관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로 회개와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했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어두운 물속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물속에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됩니다.
이미 세상은 한 차례의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때처럼 거대하고 무질서한 물을 통해 세상을 덮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소수의 피조물들만 그 혼돈의 물을 통과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물을 통과하여 새로운 생명 자체이심을 드러내신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깊고 어둡고 혼돈으로 가득한 물이 이제 새로운 생명과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는 표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가장 대표적인 하느님의 성사(聖事, μυστριον, Sacrament)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외치는 소리’인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로 하느님의 성사를 보여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 그리고 ‘구속하심’이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이지만, 그것이 가시적이며, 만질 수 있고,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표징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 매개물는 물론 물입니다. 혼돈과 두려움의 표징이었던 물이 이제 사람을 깨끗하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창조의 성사적 도구로 우리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함에 따라 물 밑을 걸음으로 거룩한 세례 성사를 경험했던 것처럼, 하느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은 ‘물’을 통과해서 새로운 창조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는 바로 ‘구속, 또는 구원’입니다.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의 표징을 받는 예식입니다.
레오나르도 보프가 [성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성사는 논증적이지 않고 해설적입니다. 성사는 성사를 행하는 사람이나 성사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서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서사 구조가 예식으로 형식화되어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그 예식이 가진 서사 구조로 인해 “살아 있는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 즉 육체적 제약 속에 놓인 성육신께서도 직접 경험해야 하는 “살아 있는 체험”입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고 물 밖으로 나오실 때 그분과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현현을 목격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성육신의 자각이며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구원의 표징으로서의 세례를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보프는 성사가 서술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지시적”이며 “현존적”이라 말했습니다. 성사는 반드시 지향하는 표지가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자기 자신 안에 “자기 연관적”으로 체화시키는 은총이 뒤따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는 단순한 예식 차원에서 형식주의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성사가 지시하는 지향성을 제대로 보고 그것을 우리 안에 체화해 내는 것. 이것이 세례가 지닌 성사로서의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일단 우리의 육체적 감각과 이성적 인식이 물과 세례를 거룩한 시선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이미 성사는 반은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사를 집전하는 사람이나 성사를 받는 사람 그리고 성사를 참관하는 모든 사람이 ‘거룩함으로의 초대’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공동체 가운데 현현하는 하느님을 거룩한 공감대 속에서 공동체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마르 1:8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세례를 ‘회개의 표지”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제시한 표징을 넘어서는 더욱 직접적인 표징의 등장을 예언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 열둘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은 하나의 표징 체계이지만, 성령은 매우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현현을 경험하게 하는 ‘존재 체험’입니다. 즉 루돌프 오토가 말한 “누미노제(Numinose)”의 체험입니다. 또한 성령의 세례는 우리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 즉 너울’이 벗겨지는 체험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현현을 경험하고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을 주목할까 염려되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던 너울이 드디어 벗겨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기 전에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 그 너울을 벗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성사는 성령의 임재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표징이었던 물 대신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성사로서 하느님과 세례 받는 인간 사이에 중재자로 서십니다. 그럴 때 알셀름 그린이 말한 대로 온전하게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길”이 우리에게 열립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참여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실낙원 이전에 받았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인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창조의 역사가 세례 성사 가운데 이뤄지는 것입니다.
많은 문화들이 아이의 출생과 물이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물은 창세기의 혼돈과 두려움을 가져오는 카오스의 물이 아니라 ‘씻음’과 ‘정결’의 표징으로 사용됩니다. 아직 아이는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나지 못한 상태여서 여전히 부모님께 의존적인 존재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를 붙들고 있던 모든 불필요한 요소들이 이 세례의 물로 씻겨져서 온전하게 하느님의 본성의 빛이 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그 효력은 부모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명 다르게 아이에게 투영될 것입니다. 부모가 세례의 의미를 느끼고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는 아이는 이제 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을 아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자라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통해 이 아이는 단순히 한 가정의 아이임을 떠나 교회 공동체와 하느님의 아이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는 공동체의 기도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성육신 하신 주님께서 성장하신 것처럼 사람과 하느님께 칭찬받는 아이로 무럭무럭 잘 성장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의 의미를 아는 부모는 아이가 하느님이 공급하시는 은총 가운데 성장하도록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돌봄보다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하느님의 표징을 아이에게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아이들은 언젠가는 성장하여 부모의 곁을 떠나지만, 아이들은 늘 하느님 안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제 이 아이들의 부모가 되심을 우리는 이 예식을 통해 선포합니다. 장차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의 의지로 나아올 날이 오기를 우리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아이들은 성장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감 있게 “견진성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아이들을 잘 키울 사명이 부모와 가족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아이의 대모로 세움을 받은 사람은 교회로부터 이러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부모로서 이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식은 모든 것의 종결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의 시작임을 느낍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이러한 질문은 삶의 신비를 풀어가는 우리 평생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그 질문에 답을 찾는 여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 후에 이러한 신비를 풀어가는 질문 속에서 더욱 성장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 모두가 성장해 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특히 오늘 세례를 받는 이 아이들, 이루다 다니엘과 양수지 스텔라, 그 부모님과 가족, 대부모, 그리고 우리 공동체 모두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주님의 세례 / 연중1주 (나해)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께서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세례의 언약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또는
사랑의 하느님, 의로우신 성자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어 우리 죄인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1:1-5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4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5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
1절,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던 한처음이었다.”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2절, “기운”은 “바람”, “영”, “혼”, “얼”이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성시_시편 29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 영광과 권능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2 그 이름이 지니는 영광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 거룩한 빛 두르신
. 주님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주님의 목소리가
.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
. 영광의 하느님께서
.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4 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 그 목소리는 힘차시고 ◯
. 그 목소리는 장엄하시다.
5 주님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
.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
.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뛰게 하신다.
7,8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 광야가 흔들거린다. ◯
. 주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린다.
9 주님의 목소리에,
.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
. 숲들은 벌거숭이가 된다.
. 모두 주님의 성전에 모여 ◯
. 한결같이 그 영광을 기린다.
10 주께서 거센 물결 위에
. 옥좌를 잡으시고 ◯
. 영원히
.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주님의 백성들아,
. 그에게서 새 힘을 얻고 ◯
.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사도 19:1-7
1 아폴로가 고린토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바울로는 북부 지방을 거쳐 에페소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몇몇 신도들을 만나 2 “당신들이 신도가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울로가 “그러면 당신들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이 때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한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바울로가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7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복음서_마르 1:4-11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5 그 때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7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A] 11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B]”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A] 마르1:10-11은 마르 15:38-39과 함께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10 절에서 “갈라지며”의 원래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σχῐ́ζω(찢어지다, 갈라지다)로, 15:38(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에서도 쓰였습니다.
[B]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15:39에서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반복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주의 세례 축일은 공현일 후 연중시기의 첫 주일로, 1월 7일에서 13일 사이에 있습니다. 공현일이 주일이면 주의 세례 축일은 월요일로 옮겨서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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