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25. 나해_성모 수태고지
이사 7:10-14 / 시편 40:5-10 / 히브 10:4-10 / 루가 1:26-38
“의미로서의 이야기”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하느님의 오심은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한 아기가 엄마의 산고를 통해 태어나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평범인 인간의 일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미혼모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혼인을 하면 정혼한 상태에서 1년 동안 신부는 친정에 머물다가 그 후에 신랑이 시댁으로 데리고 가서 비로소 남녀가 몸을 합칩니다. 루가는 마리아가 이런 “정혼” 상태에서 수태고지를 맞이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정혼은 했지만 아직 남편과 몸을 합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한 것이지요. 이것은 유대교에서는 중대한 죄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오심은 너무나 일반적이면서도 오히려 환영받지 못하는 사건이 됐습니다.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들의 예방, 아기 탄생의 순간에 마태오복음은 동방박사들이, 루가복음은 목동들이 아기로 오신 하느님을 예방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서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보다는 이야기가 담고 있는 진실과 고백에 더 비중을 두고 읽습니다. 즉, 루가와 마태오는 예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 사실보다는 그 의미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방점은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심으로 죄 아래 오셨고 ‘완전한 인간’되심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기 비움’으로 가능했던 ‘성육신 교리’의 시작입니다.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예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 궁금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처형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에 관해 그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가 써지기 이전의 문서들, 특히 바울로의 편지에서는 전혀 예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심지어 서기 70년 경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에서 조차 예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80~90년 경에 써진 마태오와 루가복음만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도 구전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문학양식인 영웅의 전기형식에 이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보다 한술 더 떠서 예수를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기록들은 일반인들에게 예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증명하기보다 그분의 오심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신 의미 말입니다. 이것이 고대인과 현대인이 사건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점입니다. 고대인들은 어떤 이야기에 대해 그것의 의미를 더 중요시 여겼지만, 현대인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먼저 따지고 그다음에 그것이 사실이면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실이 아니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매우 실증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점이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혼돈하는 부분입니다. 성서가 씌인 시대와 오늘의 ‘삶의 자리’가 차이가 있는 데 우리는 오늘의 관점으로만 성서를 읽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놓치고 논의의 관점이 표류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수태고지 이야기도 이와 같습니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오와 루가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심에 집중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오는 방법은 여자의 몸을 통해 태어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탄생의 이야기가 필요했고 구전 자료를 모아 이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실 여부보다는 그 이야기에 담긴 의미가 더 중요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히브 10:5 c
예수의 공생애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죽음을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희생의 제사였다고 히브리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 그리스도론을 이야기하는 히브리서답게 예수가 인간이 되신 것은 율법이 정한 바 “어린양”이란 희생제물이 아니라 “참 제물”로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첫째 율법에 의한 것은 자동 폐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참 제물”이 설정됐습니다. 누구를 대신한 제물이 되시기 위해 그분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까? 바로 우리 인간, 더 정확하게 말하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그분이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한 인간의 삶이 어디에서 오고 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가 예수의 생애를 통해 설명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삶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사의 목적에 맞는 의미로 채워졌습니다. 이것이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찾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그의 오심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본 결론입니다.
한 인간의 탄생이 이렇게 철저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의미가 부여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한 번이자 절대적인 효력을 가진 참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제물보다는 순종을 더 원하셨던 하느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인간이 되게 하셨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제사보다 순종에 더 방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이라는 하느님의 뜻에 담긴 순종은 오히려 죄를 깨닫는 데 치중했습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실천을 담아내는 데 모세와 세운 첫 계약은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새로운 계약으로 그분의 아들을 직접 보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새로운 뜻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그 순종은 율법이 추구했던 “사랑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것입니다. 예수의 순종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동기가 된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을 위한 대사제로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하느님께 바친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의 죽음과 인간으로 오심이라는 두 가지 의미들이 하나로 엮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엮는 매우 중요한 고민들과 피와 땀이 들어있는 진솔한 고백입니다.
저는 수태고지의 이야기를 읽을 때 이러한 ‘삶의 자리’에 서서 보게 됩니다. 이야기의 진위를 넘어서 존재하는 그 시대의 고민과 아픔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운동이 살아남은 자신들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철저히 고민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게 고민하지 않는 우리들과 다르게 갖은 핍박과 유대교의 편견 속에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 생존을 위해 철저히 몸부림쳐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수태고지 이야기를 다른 여느 영웅 탄생이야기로 읽으면 전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담긴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읽으면 한 인간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기념하는 우리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 즉 “인간의 몸을 입은 말씀”이신 예수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 재고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셨던 그분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탄생부터 죽음이 결정된 한 인간의 이야기. 이렇게 성육신은 ‘자기 비움’과 ‘순종’이라는 확고한 의미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사순절의 막바지인 성주간에 기념하는 한 아기의 탄생 이야기가 결국 ‘자기 비움’과 ‘순종’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묻고 또 되돌아봅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절을 어떻게 보냈고, 이제 이 성주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말입니다. 그분의 오심과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는 것. 이것이 오늘 수태고지를 기념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전례독서_3.25. 성모수태고지
본기도
주 하느님, 천사의 예고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성자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육신하심을 알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시어, 주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이루신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7:10-14
10 야훼께서 아하즈에게 다시 이르셨다. 11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께 징조를 보여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달라고 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습니다.”
13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14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 “젊은 여인”이라는 뜻도 있음”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 하리라.”
성시_시편 40:5-10
5 주, 나의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놀라운 일을 많이도 하셨으니 ◯
. 당신과 비길 자 아무도 없습니다.
¶ 그 이야기 세상에 알리려 하지만, ◯
. 그 하신 일 이루 다 셀 길이 없습니다.
6 짐승이나 곡식의 예물은 당신께서 아니 원하시고 ◯
. 오히려 내 귀를 열어 주셨으며,
7 번제와 속죄제를 바치라 아니하셨기에 ◯
. 다만 엎드려 주님께 아뢰옵니다.
¶ “나를 들어 두루마리에 적어 두신대로 ◯
.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 몸 대령하였습니다.”
8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의 법을 ◯
.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기뻐합니다.
9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
. 당신의 정의를 알렸습니다.
. 주께서 아시는 대로 ◯
.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10 당신의 정의를 내 마음 속에 숨겨 두지 않고 ◯
. 당신의 진실하심과 구원을 알렸습니다.
¶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
. 그 큰 모임에서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10:4-10
4 황소와 염소의 피로써는 죄를 없앨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5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6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 ‘하느님,
.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 시편 40:6-8
8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당신은 희생제물과 봉헌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쳐지는 것인데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9 다음에는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나중 것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것을 폐기하셨습니다. 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서_루가 1:26-38
26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27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29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31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33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34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35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37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38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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