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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James Chae 2024. 3. 3. 06:24

2024.3.3. 나해_사순3주일 감사성찬례

출애 20:1-17 / 시편 19 / 1고린 1:18-25 / 요한 2:13-22

 

 

냉정과 열정 사이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이탈리아 밀라노와 피렌체의 풍경이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영화냉정과 열정 사이”. 아마도 번쯤 보시지 않으셨을까 생각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열정을 숨기고 냉정하게 헤어져야 했던 사람, 헤어진 10년이 지난 후에, 10 전에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다시 만나 각자 속에 10 동안 품었던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원작은 각각의 주인공의 관점으로 개의 소설을 합쳐놓은 동명의 공동 작품 소설이지요. 소설로는 아직 접해보지 못했지만, 영화의 영상미와 배경음악 그리고 남자 주인공준세이 덤덤한 연기와 표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열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로 전개됩니다. 뜨거운 지중해의 열정의 도시조차도 영화 속에서는 마치 시간이 멈춘 차분한 분위기입니다. 10년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밀라노와 피렌체의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을 정도로 정지되어 있습니다. 이는냉정 메타포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살았던 일본은 이미 10년의 시간이 많은 것을 바꿔놓아 주인공들의 만남의 장소들 조차 새로운 곳으로 바뀌어져 있어서 과거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는열정 메타포입니다. 이렇게 영화의 배경이 일본과 이탈리아 조차도 냉정과 열정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주인공들의 감정과 느낌은 매우 절제되며, 느낌은 배경음악을 통해 암시됩니다. 반면 준세이의 현재 여자친구매미 너무나 열정적이고, 아오이의 현재 남자친구마빈 따뜻하지만 너무나 냉정합니다. 이는 영화 내내 주인공의 차분함과 무척 대조됩니다. 그리고 주인공 준세이의 직업인 작품복원사라는 직업은 영화의 제목과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른 사람이 그린 오래된 그림을 복원하며 이미 사형선고를 맞은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직업. 작품을 복원하는 작업은 작가로서의 열정을 냉정하게 억누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직업입니다. 복원된 작품은 자기의 작품이면서도 원래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작품복원사는 철저히 원작가 뒤로 숨겨집니다. 복원한 자의 열정 또한 원작자의 열정 뒤로 숨겨집니다. 그래서냉정 필요하고 절제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사랑을냉정과 열정 사이어디쯤에 숨겨둔 준세이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 복원의 과정을 묵묵히 견뎌내며 아오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합니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열정도 아니고 냉정도 아닌 사이어디쯤에 위치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감정이 이끄는열정 아니고, 우리의 이성이 이끄는냉정 아니었습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 “감정과 이성의 사이”, “표징과 지혜 사이”, “어리석음과 현명함의 사이”, “상식과 역설의 사이

어쩌면 우리의 믿음의 위치도 준세이와 아오이의 사랑처럼 이러한 냉정과 열정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너무 열정적이면 끊임없이 열정을 채울 다른 열정이 필요해지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감정은 덫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법입니다.  너무나 높은 열정에 빠졌다 깨어나면 우리의 감정은 강렬한 카타르시스로 인해  현실에서 오히려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냉정이 아니라 깊은 허무가 낭떠러지처럼 찾아옵니다. 그래서 열정적인 믿음은 감정에 의지하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허무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너무 이성적이고 절제된 냉정한 믿음은 모든 열정을 식혀버리고 사막과도 같은 무미건조함만을 남깁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재단합니다. 또한 결국허무감 다다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러한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시소를 타는 듯한 반복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동반되는 감정의 독특한 긴장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육신과 감정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나 그것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에 치우칠 경우 반드시 다른 하나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냉정과 열정 사이, 감정과 이성 사이 어디쯤에 놓입니다. 그곳이 우리의 영혼이 있는 장소이고, 그곳에서 믿음은 우리의 감정도 우리의 이성도 아닌 오직 은총에 의해 작동됩니다. 믿음이 우리의 감정을 뒤흔드는 건지 아니면 우리의 감정이 믿음 안에서 스스로 뒤흔들리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은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영혼의 닻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의 이해나 지식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오직 은총에 의지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냉정입니까? 아니면 열정입니까? 아니면 믿음입니까?

 

우리의 일상은 평범하고 단순하며 반복된 일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에 우리는 쉽게 싫증을 느끼고 사람들은 단순함과 평범함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취미를 개발하거나 여행을 즐기거나 일탈을 꿈꿉니다. 우리의 감정은 평범함과 단순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미건조하게 다가오는 예배, 말씀, 기도그리고 성무일과이러한 성무일과의 일상은 우리 인생만큼이나 단조롭고 지루하며 창의적이지 않고 반복적입니다. 감정은 메마른듯하고, 느낌은 무뎌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무뎌진 우리의 감정을 뭔가로 채우기 위해 다양한 신앙적 열정을 쫓아다닙니다. 찬양 집회, 성령세미나, 치료 집회 . 인간은 간절해지고 절박해지면 감정도 비례해서 함께 열정에 휩쓸리게 마련입니다. 아폴론적인 것은 사라지고 디오니소스적인 열정의 노예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열정적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간절함을 표현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목소리 높여 찬양을 합니다. 이때 열정은 억눌렸던 감정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인들이 일탈을 경험하게 되는 클럽 문화에서도 똑같이 감지되는 심리적 카타르시스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폭발하는 지점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감정의 억압에서 놓여나는 카타르시스인지 아니면 성령의 충만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원래 감정의 기제들이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감정의 경험치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가르멜산에서 바알 제사장들과 대결하던 엘리야에게 불같이 열정적으로 임하시기도 하셨지만, 호렙산에서는 반대로 아주 고요하고냉정하며차분하게 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열왕상 19:12

 

냉정과 열정 사이. 어디쯤에 엘리야를 위한 믿음의 자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는 바로 하느님의 현존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우리의 감정과 이성에 기울어지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때론 열정과 냉정의 기제를 사용하지만,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그분을 느끼고 그분과 함께 행동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성장입니다. 처음에는 둘의 간격이 크지만, 신앙이 성숙하면 할수록 우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적절한 믿음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감정과 이성의 기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현존을 순간 느낄 있습니다. 모든 느낌과 생각이 사라진,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사막과 같은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그분의 현존을 느낄 있습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자리인 것입니다. 자리가 사람마다 다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해 우리가 느끼고 인지하는 것은 매우 개인적이지만, 공동체의 경험은 어느 정도 공동체의 느낌과 감정을 담보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교회의 영이고,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는 영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개인적인 믿음은 이렇게 공동체 속에서 보편성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요한 2:17 (시편 69:9)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고 정화작업을 하시는 주님의 열정 보고 말씀을 떠올렸다고 오늘 복음서는 기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정치적 메시아의 열정 것입니다. 그리고 혁명이 당시 로마와 유대교와 헤롯대왕과 사두가이파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였던 성전에서 바로 시작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말을 듣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마디로 찬물 끼얹는 소리를 하십니다. 열정을 식히는 냉정입니다. “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내가 다시 성전을 세우겠다.” 말은 제자들과 유대인 모두를 당황케 소리였을 겁니다. 누가 하루 만에 성전을 허물 있으며 누가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세울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냉정이 하느님의 성전에 대한 그분의 열정을 뒤덮었습니다. 그분은 그분이 가야 길이 분명 냉정과 열정 사이에 믿음의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냉정함만으로 수도 없고 열정만으로도 없는 길입니다. 열정은 이성을 불사르고, 이성은 열정을 식힙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지점을 향해. 지점에 십자가의 길이 놓여 있고,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길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불태워 소멸시키지 않을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얼려 너무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의 냉정을 유지하는 지점. 이것이 냉정과 열정 사이에 놓인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냉정과 열정 사이 어디쯤에 놓임을 자각할 우리의 현재가 온전하게 보존되고 우리의 일상이 믿음 안에서 자라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정이 일상을 견디지 못하게 하고 냉정이 일상을 무미건조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냉정과 열정 사이는, , 믿음의 자리에는 헌신과 인내 그리고 신뢰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희망이 전제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이고, 하느님의 경륜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어리석어 보이고, 세상적으로는 우유부단해 보이는 것이 바로 신앙의 길이고 복음의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모습으로 , 뜨거운 열정도 아닌, 차가운 냉정도 아닌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눈에 띄지 않는 소소한 믿음의 자리를 보는 눈을 가진 사람,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행복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로는 도저히 다다를 없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신비가 사순절의 여러분의 일상 속에 모습을 드러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길에서 중용을 잃고 극단으로 치우치는 사람에 대해 십자가의 요한이 전하는 말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모든 극단은 덕이 아닌 악인데 이렇듯 제 뜻대로만 움직이는 사람들은 덕보다도 악덕에 자라는 것, 이런 식으로 기껏 얻는대야 영적 탐식과 교만이 있을 뿐이니 순명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어둔 밤] 중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사순3 (나해)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계명 새겨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출애 20:1-17

1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너희 하느님은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3 너희는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위에 있는 것이나, 아래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후손 대에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성시_시편 19

1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창공은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2    낮은 낮에게 말을 전하고
.     밤은 밤에게 일을 알려 줍니다.
3     이야기도 말소리도
.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세상 끝까지 번져 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주시니,
.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끝에서 나와
     하늘 끝으로 돌아가고
.     뜨거움을 벗어날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주님의 법도는 변함 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주님의 법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좋고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있어 허물을 알리이까?
.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 주소서.
13  일부러 지을세라 막아 주시고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지켜 주소서.
.     그제야 몸은 대역죄 씻고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바위요, 구원자이신 주여,
.     생각과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1:18-25

18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성서에도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이사 29:14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0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24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복음서_요한 2:13-22

13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상을 둘러엎으셨다. 16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꾸짖으셨다. 17 광경을 제자들의 머리에는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시편 69:9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18 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19 예수께서는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성전을 짓는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