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들어 올려지는 것 ὑψωθῆναι"

James Chae 2024. 3. 10. 06:19

 

 

2024.3.10. 나해_사순4주일

민수 21:4-9 / 시편 107:1-3, 17-22 / 에페 2:1-10 / 요한 3:14-21

 

 

들어 올려지는 ὑψωθῆναι”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뱀은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집어삼키고 있던 독하고 치명적인 죄를 상징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루스

 

죄는 뱀의 독처럼 치명적입니다. 뱀의 독처럼 죄는 한순간에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때론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여 은연중에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모두 영적인 죽음입니다. 물론 오늘 광야에서 불뱀은 치명적인 독을 품은 뱀과 영적인 죄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물리는 자마다 모두 죽게 됐습니다. 죽음이 육적인 죽음 만을 의미하지 않고 동시에 영적인 죽음 또한 의미합니다. 그런데 뱀에게 물린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불뱀이 아무나 닥치는 대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불뱀은 야훼께 불평하는 자들, 야훼의 구원 계획에 반기를 사람들만 물었습니다. 불평한 사람들은 단순히 먹고 마실 것이 없는 불편한 광야 생활에 대해 불평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께서 계획하신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뜻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며, 그분의 은총에 대한 몰인정입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왔습니까? 민수 21:5

 

어쩌자고

이는 단순한 의문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불평이고 그들의 탄식입니다. 이집트에서 나고 자란 야곱과 요셉의 후손들은 풍요로운 이집트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잊은 오래고, 대신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믿던 신들을 그리워했고, 그들의 축제를 그리워했으며, 그곳에서 먹고 마셨던 것들을 그리워했습니다. 비록 노예 신분으로서 빠지게 노역을 해야 했는데도 그들은 야훼와 함께하는 광야보다는 문명이 있는 곳을 그리워했습니다. 광야는 음식뿐만 아니라 문명 자체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농촌에서 생활하기 싫어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이를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농촌은 도시와 비교해서 먹거리, 입을 거리, 문화적인 , 그리고 사람들이 턱없이 부족하지요. 그들은 문명의 노예가 될지언정 광야에서 야훼의 백성으로 죽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 깊숙이 뿌리내린 이방 문화와 야훼 문화 간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야훼만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우상숭배를 경험했습니다. 우상의 신들은 신들을 잘만 달래면 인간의 안락을 돕도록 준비된 신들입니다. 야훼는 유일하게 본인에게만 순종을 요구하는 독특한 신입니다. 문화적, 종교적 갈등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그때 불평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오직 광야에서 태어난 그들의 후손들만 가나안으로 들어갈 있었습니다. 

 

단조로움에 금방 싫증을 내는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가 됩니다. 저도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무척이나 견디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흥분되고 재미있는 ,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 새로운 새로운 즐거움이 없는 것은 현대인에게 마치처럼 피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과 영상들은 자극적이고 언론의 헤드라인들은 선정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야 많은 정보들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때문입니다. 자극과 흥분의 과잉이 우리를 더욱 단조로움과 고요함으로부터 격리시킵니다. 자극이 만연한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쉼을 얻기가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극적인 , 우리를 기쁘게 하고 흥분하게 만드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됩니다. 자극과 흥분이 인류의 진화의 방향이라면 현대사회는 정확하게 길을 우리에게 열어준 것이나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불뱀 역동적이고 자극적이었지만, 모세가 만든구리뱀 움직일 없는 뱀이었습니다. 구리뱀은 장대 위에 달려서 움직이지도 않고 여러 곳에서 있는 곳으로들어 올려지는 ὑψωθῆναι”입니다. “들어 올려지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표징임을 말합니다. “들어 올려지는 바로 하느님의구원의 의지이고, 감추어졌던 하느님의 뜻과 경륜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들어 올려지는 철저히들어 올리는 의존합니다. 그래서쏘테나이 ὑψωθῆναι 수동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들어 올려지는 쳐다보기를 거부했습니다. 물론 광야의 이스라엘은 불뱀에 물린 자들 중에 불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뱀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는 법입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야훼보다는 이집트의 우상을,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의 우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고집 인간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요한 3:19

 

들어 올려지는 모든 방향에서 의지만 있으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모두 핸드폰을 쳐다보느라 위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광화문 사거리나 서울 시청 전광판이 그날의 이슈를 전달하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2002 월드컵 높이 달린 전광판이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감동을 전했습니다. 들어 올려진 것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한 같은 역할을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작은 반딧불이의 빛조차도 선명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도높이 들어 올려지는 못지않게 매우 쉽게 인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쉬운 것을 사람들은 애써서 보기를 거부합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눈을 떠서 빛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애써 감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 자기에게 유익한 , 자기의 관심을 끄는 것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확하게 영적인 메타포입니다. ‘높이 들어 올려지는 보고도 제대로 없는 이유와, 밝은 빛을 보고도 전혀 없는 이유를 오늘 요한복음은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라고. “높이 들어 올려지는 보다 자기 눈앞의 이익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하느님보다 자기를 사랑했다라고 말할 있습니다. 이것이 광야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도전했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됐지만 여전히빛의 자녀보다는어둠의 자식이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이 그들에게 행복이고, 고개 숙임이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기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16

 

너무나 유명한 구절은 하느님 구원의 계획, 복음의 핵심을 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불뱀에 물린 사람들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한 것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둘은 비교불가입니다. 사랑은 바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들어 올려지는 으로부터 사랑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요한은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를 위에서 내려왔다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요한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이 모두 결합하여 이미 선재했음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요한이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임을 몰랐을까요? 교부 힐라리우스는 이를신비요 역설이다라고 표현하여 우리가 그것을 파악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풀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 인식의 한계를 인정한 것입니다. 모든 곳에 계신 분이내려오시고 올라가셨다 것은 정확하게성육신 본질과 기원을 표현한 말입니다. 성육신은 하느님께서 구리뱀처럼 모든 인간을 위해들어 올려지는 으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아들의 숙명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경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그것을 누가 막을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기보다 사랑하시고자 작정을 하셨는데 누가 감히 다음과 같이 말할 있겠습니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왔습니까? 

어쩌자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습니까?

어쩌자고 우리에게  주일 예배 참석의 의무를 주셨습니까?

어쩌자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어쩌자고 우리로 하여금 남을 위해 희생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광야에서 뱀에 물려 독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상황에서도 고집스럽게 장막 안에 숨어서 구리뱀을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집스럽게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인정하기도 싫고, 과거에 묶여 여전히 노예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 세상과 자기의 이익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한 사람들입니다. 어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빛을 이상 없는 사람들입니다. 위를 쳐다볼 없을 정도로 어깨가 구부정한거북목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아무런 의미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봐도 기독교의 상징으로만 바라봅니다. 십자가에 담긴 희생과 사랑의 정신은 사라진 오래입니다. 삼성이나 엘지의 로고를 보는 별다른 감흥 없이 우리는 희생과 사랑의 표징을 대합니다. “들어 올려지는 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없습니다. 무미건조한 상징. 상징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대상을 지향하게 주지만 너머의 것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결국은 보고도 것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감각과 이해가 무뎌진 지점에서 우리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뱀의 독이 온몸으로 퍼져서 우리의 영이 점점 굳어가고 있지만, 불편함에 우리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영적으로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감정과 이성의 기제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죽어도 고통도, 슬픔도, 감정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의 죽음은 허무만 남깁니다. 단순히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가장을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인 우리의 영이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거의 아사상태에 빠졌지만, 어쩝니까? 전혀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니 불편한 것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찬양하지 않아도, 말씀을 읽지 않아도 전혀 불편함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영적인 밥은 굶어도 육적인 밥은 꼬박꼬박 챙깁니다. 그러므로 불뱀의 독은 단순히 육신만을 죽이는 것이 아님이 판명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영적인 죽음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만약 영이 죽을 우리가 아픔이나 고통이라도 느낄 있다면, 사람들은 다시 하느님께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우리의 감정과 이성이 영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보다 열심히 세상적 성공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축복까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오래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익에 반하면 교회와의 관계를 끊는 것도 너무 쉽습니다. 마치 클럽이나 모임처럼 취사선택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순절.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아무런 느낌도 없는 무미건조한 신앙의 광야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이집트의 화려한 문명과 맛있는 음식이 그립습니다. 황량하다 못해 모든 것을 말려 죽일 같은 광야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말려버리고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지점이, 우리의 감정과 이성이 배제된 무미건조한 순간이 바로 우리의 영의 자리라는 사실말입니다. 그래서 무미건조함은 우리가 침묵과 고요 가운데 머물 있는 귀한 기회를 갖게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에는 자기의 일상 속에서, 자기 안으로, 내면으로의 여행을 감행하는 기간입니다. 즐길 있고, 누릴 있는 자유를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해 잠시 40 동안 절제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감정과 느낌과 이성이 멈춘 곳에서 진정한 우리의 영이 꿈틀대고 있음을, 영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사순4 (나해)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우리는 주님 안에서만 평화를 누릴 있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지극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따라 삶으로써 어둠의 행실을 벗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민수 21:4-9

4 그들은 에돔 지방을 피해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홍해 쪽으로 돌아갔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5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왔습니까?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6 그러자 야훼께서는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불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자, 7 백성들은 마침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 주십시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자, 8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9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았다. 뱀에게 물렸어도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

 

 

 

성시_시편 107:1-3, 17-22

1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     그는 어지시다.
.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2    주께서 구해 주신 자들아,
.     모두 노래하여라.
.     원수의 손에서 구해 주시고
3    동서남북 사방에서
.     불러 모아 주셨다.
17  미련한 탓으로 하느님께 거역하다가
.     죄악 때문에 비참하게 자들,
18  입맛이 없어 음식마저 지겨워
.     저승의 문턱에 다다랐던 자들,
19  그러나 그들이 고통 중에서 울부짖자
.     주께서 사경에서 건져 주셨다.
20  말씀 마디로 그들을 고치시고
.     죽음에서 구출해 내셨다.
21   사랑, 주님께 감사하여라.
.     인생들에게 베푸신 기적들, 모두 찬양 하여라.
22   이루신 일들을 노래로 엮어
.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 예물 바쳐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에페 2:1-10

1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3 실상 우리도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그러나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모든 세대에 보여주시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없을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복음서_요한 3:14-21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20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