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30. 나해_성 토요일_부활밤
로마 6:3-11 / 시편 114 / 마르 16:1-8
“이미 죽은 사람”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로마 6:7
“이미 죽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거나 성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사람”이 바로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죄의 권세인 사망이 그에게 더 이상 왕노릇을 할 수 없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성내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이미 죽은 사람”과 반대로 “산 사람”은 모두 죄의 속박 가운데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로가 말한 이 죽음이 단지 흙에서 나온 우리 육체적 죽음만을 언급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세상을 향해, 죄를 향해 죽은 것이므로 그의 영이 이미 세상적 감각과 지성으로부터 해방됐음을 말합니다. 완전히 죽지 않으면 우리의 감각과 우리의 이성은 죄를 향해 여전히 자신의 줄기를 뻗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죽은 사람만이 죄에서 행방될 수 있습니다. 모든 감각과 판단이 멈춘 상태. 이것이 육에 뿌리를 둔 죄의 무기력함입니다.
“스올에서는 아무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사 38:18 (새번역)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지만 대신 주님께 감사드릴 수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죄에 대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한 이유가 바로 이사야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죽은 자가 ‘스올’에서 최후 부활 때까지 잠시 대기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죽은 자’는 감사도 찬양도 미움도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다면 오늘 우리는 이렇게 모여 그분을 예배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가 오늘 “이미 죽은 사람”을 언급한 것은 그냥 자연상태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죽은 사람은 죄와 하느님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죄에 대해서 죽고, 죄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은 죄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하느님도 찬양할 수 있고, 또 그분께 감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뒤엎은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산 사람”이 됩니다. 죄에 대해 죽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그런 사람은 죄의 족쇄를 차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해방의 기쁨으로, 부활의 기쁨으로 마음껏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은 하느님의 영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자신이 하느님 되심을, 그분이 받을 영광을 충분히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그분의 영광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따라가는 우리도 예수의 부활에 참예함으로써 모두 하느님의 작은 영광이 됩니다. 그 영광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녀 됨의 영광이고, 하느님께는 우리의 아버지 되심의 영광입니다. 이제 하느님과 우리는 부활을 통해 새로운 창조,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가족 됨이 선포됐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죽으셨고 “단 한번” 부활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여러 번 죽고 부활하셨다면 아마도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그분은 “단 한번” 죽으셨고 “단 한번”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단 한번” 죽고 “단 한번”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세례를 통해 한번 죽은 우리들은 다시 죄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진 우리는 다시 죄의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살아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이 하느님을 향해 살고 죄를 향해 죽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부활은 이러한 노력 가운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를 보증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니 이미 그 안에서 세례로 죽은 우리는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라면 우리 안에 감사와 희망이 넘쳐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 사람은 감사와 찬양이 멈추질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시는 죄의 권세에 놓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읽은 로마서를 통해 사도 바울로가 말하고자 한 부활의 신비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시력을 잃으면서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역사의 예수보다 부활하신 예수가 더 중요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역사의 예수와 부활하신 예수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와 다른 사도들의 차이점입니다. 부활을 증언한다는 차원에서 그가 사도 중에 늦둥이지만 사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그의 증언과 사도들의 증언이 모두 일치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사도들의 증언 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분이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자신들의 삶과 목숨을 내어놓고 증언한 부활의 증언이 참된 진리라고 믿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전생애를 통해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들의 목숨으로 증언한 진실을 마다할 용기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증명할 수 없지만, 사도들의 증언의 신빙성에 의지하여 그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곧 사도입니다. 그것 외에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부활에 대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갈라 1:16-17
이것은 부활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간접 증거 중 하나입니다. 4 복음서들보다 갈라디아서가 먼저 써진 것이므로 사도 바울로는 다른 사도들보다 먼저 부활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사도가 됩니다. 특히 이방인들에 대한 소명과 함께 예수 부활 사건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의지보다 하느님의 의지가 앞선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에게 부활의 경험과 사도로서의 직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바울로와 모든 사도들의 증언 위에서 오늘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우리 안에 의심과 불신의 구름을 걷고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믿음으로 부활을 온전히 우리 안에 체화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산 사람”임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우리의 슬픔과 고통도 부활의 기쁨으로 한꺼번에 상쇄되는 그러한 부활을 맞이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성 토요일 / 부활밤
본기도
1독서_ 로마 6:3-11
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성시_시편 114
- 할렐루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야곱의 집안이 야만족을 떠나올 때
- 유다는 그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치고 요르단 강은 뒤로 물러섰으며
- 산들은 염소처럼 뛰놀았고 언덕들은 양처럼 뛰었다.
- 바다야! 너 어찌하여 도망치느냐? 요르단아! 너 어찌하여 물러서느냐?
- 산들아, 어찌하여 너희가 염소처럼 뛰며 언덕들아, 어찌하여 너희가 양처럼 뛰느냐?
- 땅이여, 너는 네 주인 앞에서, 야곱의 하느님 앞에서 떨어라.
- 그분은 바위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바위로 하여금 샘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복음서_마르 16:1-8
-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해가 뜨자 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 "그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내 줄 사람이 있을까요?" 하고 말을 주고받았다.
- 가서 보니 그렇게도 커다란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더니 웬 젊은이가 흰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보고 질겁을 하자
-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마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아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여라." 하였다.
-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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