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7. 나해_부활2주일
사도 4:32-35 / 시편 133 / 1요한 1:1-2:2 / 요한 20:19-31
“어둠의 비늘”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는 반딧불이의 불빛같이 작은 빛도 더 밝게 빛나는 법입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비록 작은 빛이라도 빛이 있으면 그 빛은 우리 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이것은 신앙의 일반적인 현상에서 종종 발견되고 증명됩니다. 그러나 빛이 비치면 어두움이 우리 안에서 더 짙어지고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은 왜 빛과 은총이 가득한 때에 역설적이게도 어둠이 더 짙게 우리 안에 드리워지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진지하게 하신 분들은 이러한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은총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면적으로 어둠이 더 짙어지는 현상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빛이 너무나 밝아서 오히려 우리 영혼의 어두움이 더 두드러지는 경우입니다. 이는 더욱 큰 은총이 빛으로 오면 올수록 어둠이 더욱 전 영혼을 짙게 휘감는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느님의 빛을 보았을 때 생겨난 현상입니다. 그가 그 순간 눈이 먼 것은 단순히 육적인 눈만 먼 것이 아니라 그의 영적인 눈 또한 어둠에 잠긴 것입니다. 그 어둠은 ‘아나니아’를 그가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밝은 빛에 의해 더욱 두드러진 자신의 내면을 통해 사도 바울로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욥기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욥 16:16
너무나 밝은 빛은 일순간에 우리 영혼의 비참함과 우리 영혼의 본질을 들춰내기 때문에 영원한 빛을 본 순간 결국 인간의 가장 깊은 죄성과 본모습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거룩함에 반하는 인간의 참혹한 본모습에서 오는 어둠과 절망감입니다. 그 순간 자기 자신을 가리고 덮고 보호하던 모든 껍데기들이 사라지고 인간은 그 빛 가운데서 벌거벗겨지며 영적인 알몸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서로 눈이 밝아져 서로를 부끄러워했던 아담과 하와처럼 그 순간 자신이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밝은 빛이 비치면 오히려 어둠이 더 내면적으로 짙어지는 첫째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그 빛이 너무 밝아서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경우입니다. 밝음과 반대되는 짙은 어둠 속에 자신이 갇힌 듯 자신의 무능을 깊이 체험합니다.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동안 자신을 붙들었던 아집과 욕심, 삶에 대한 자신감 등이 일순간 어둠으로 덮입니다. 혼자 잘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일순간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어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어둠은 자기 비움의 어둠이기도 합니다. 이제 빛이 자기 영혼의 세포 곳곳에 비춤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을 피해 숨을 데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영혼은 그 어둠 속에서 오직 하느님 만을 붙들게 됩니다. 요나서는 이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물은 목까지 차 올랐고 깊은 바다는 이 몸을 휩쌌습니다. 머리는 갈대에 휘감겨 저 땅 밑 멧부리로 빠져 드는데, 땅은 빗장들을 영영 내려버렸습니다. 야훼, 나의 하느님, 하느님께서 그 구렁에서 이 몸 살려내셨습니다.” 요나 2:6-7
땅이 “빗장들을 영영 내려버린 듯”한 짙은 어둠 속에서 오직 하느님만 보이게 되고 그분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밝은 빛을 대면하게 되면 역설적이게 느끼게 되는 우리 영혼의 두 번째 어둠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우리 존재의 어둠은 더욱 짙게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과 함께 동시에 깊은 절망도 빛을 만난 사람은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빛을 거부하는 어둠들이 하나둘씩 비늘처럼 우리 안에서 벗겨지게 됩니다. “어둠의 비늘” 말입니다.
“뒤를 돌아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에 서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인 줄은 미처 몰랐다.” 요한 20:14
빛이 온전히 우리에게 비춰도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금방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 빛에 의해 우리 안에 어둠이 더 짙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보고도 “미처 몰랐다”라고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옆구리와 손바닥을 보여주시기 전까지 믿을 수 없었던 토마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감각과 이성을 의지함으로써 어둠 속에서 그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우리의 어둠이 너무나 짙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1 요한 1:5
이렇게 우리 안에는 어둠이 많고, 그 어둠이 빛 때문에 더욱 어둡게 느껴지는데,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그 빛이 비치면 어둠을 하나씩 벗어 버리게 되는데 그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성과 감각, 그리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리의 이성과 생각이 먼저 그 어둠 속에서 “정화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일종의 성장통처럼…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오면 그 빛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듯이 우리는 영적인 빛에 적응되기 위해 “정화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의 감성과 감각의 현혹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판단의 오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참 자유를 얻으며 구원의 기쁨이 넘친다고 전도를 합니다. 물론 성서도 그러한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의 기쁨이 시들어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어둠에 대해, 인간 실존에 대해 깊은 고뇌와 아픔에 종종 빠지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기 전에는 겪지 않았던 느낌과 죄책감 그리고 부담감에 당황합니다. 물론 때때로 감정에 부어지는 기쁨이 있어서 또 우리는 그 기쁜 감정을 부여잡고 신앙생활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육신의 느낌과 감정은 우리를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감정은 늘 우리를 빛보다는 어둠으로 이끄는 경향이 큽니다. 올바른 신앙적 판단도 이와 같습니다. 기도하고 내린 어떤 일에 대해 그 일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고민하고 후회합니다. 기도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 것일까?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결국은 하느님 없음이나, 하느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 산타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기도했는데 받지 못했을 때처럼 우리는 좌절하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판단이 온전하지 못함을 반증합니다. 판단하는 이성은 늘 실증적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실증적인 것이 모두 참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주님께서도 이점을 잘 아셨던 것 같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은 신앙에서는 참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판단을 내리는 이성이 얼마나 어둠 가운데 놓여 있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올바른 판단을 하기 힘든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성은 늘 육신에 얽매여 있습니다. 육신에 묶여 있다는 말은 인간은 경험과 느낌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냉정할 것 같은 우리의 이성도 결국은 우리의 경험과 그 경험의 주체인 육신을 넘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제자들의 말에 토마가 믿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는 경험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욱 영적이고 보편적일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우리의 느낌과 이성에 합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느낌과 이성을 충족시켜 주시기 위해 빛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어두운 영을 밝은 빛으로 인도하는 부활의 빛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결코 느낌이나 우리의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때론 우리의 경험과 기억이 도움은 될 수 있지만 믿음은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함의 비참과 메마름과 지각의 공허와 어둠 속에 버려진 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한 말입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 쓰러진 강도 만난 사람 같은 우리 자신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낫게 하는 과정이 바로 “어둠의 정화의 과정”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여정이고 믿음 안에서 빛 가운데서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의 비늘”들을 하나둘씩 벗겨내면서 우리는 빛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이번에 부산에 갔다가 어떤 개신교 교회에 걸린 “성령부흥성회” 현수막을 우연히 봤습니다. 거기에 “재정축복기도”라는 말이 쓰여있더군요. “성령안수기도”라는 말과 함께. 그 말을 곱씹어보니 성령께서 오신 이유가 우리의 물질적 축복 때문이라는 말로 느껴졌습니다. 그러한 말은 부산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점집이나 포교원의 광고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느껴집니다. 그걸 보면서 느끼는 저의 생각은 오늘날 “돈”이 모든 사람들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만사형통이 모두 돈과 직결된다는 생각. 참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상 인간은 가장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행동심리학자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즉, 각 개인 안에 쌓여 있던 다양한 경험의 결들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행복을 주었던 기억을 재생시켜 주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반한다 해도 그 경험치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었던 보람있는 일을 회상시켜주면 사람들은 그 느낌과 기억에 의지하여 현재 자신이 손해를 봐도 남을 위해 선을 베푸는 쪽으로 판단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래도 칭찬으로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은 행동심리학에서는 진리로 여겨집니다. 부정보다는 긍정의 힘입니다. 어둠보다는 빛의 효과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은 결국 어둠보다 빛을 선택하는 것이고 부정보다는 긍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대상이나 사건에는 반드시 밝은 면과 어두운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하는 법입니다. 기쁨에는 슬픔이 늘 곁에 있고, 행복에는 늘 불행도 곁에 있습니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늘 곁에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쪽 면을 바라볼지 우리는 늘 선택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기를 거부하면 계속 어둠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대상의 그림자만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밝은 쪽을 바라보게 되면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뻐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요한 20:20
제자들이 주님을 뵙고 기뻐했던 것은 주님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그들이 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어둠보다 이제 빛을 본 것입니다. 슬픔보다 이제 기쁨을 선택한 것입니다. 죽으신 주님이 아니라 이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그동안 경험했던 역사의 예수는 그들에게 이제 부활의 예수로 대체됩니다. 그림자는 이렇게 빛에 의해 두드러지만 우리의 시선을 빛으로 돌리는 한 우리는 이제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두려 하는 많은 것들을 이제 밝은 부활의 빛 가운데로 내어오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번 부활절이 우리 안에 “어둠의 비늘”을 모두 벗기는 기쁨의 부활절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부활2주 (나해)
본기도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시어 평화를 전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기운을 부어주시어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4:32-35
32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35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성시_시편 133
1 이다지도 좋을까,
. 이렇게 즐거울까! ◯
.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2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
.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3 헤르몬 산에서 시온 산 줄기를 타고 ◯
.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 그 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
. 그 복은 영생이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요한 1:1-2:2
1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
5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그대들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7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2:1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복음서_요한 20:19-31
19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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