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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전하지 않느냐?”_2024.10.6. 나해_연중27주일 (성 피데스)

James Chae 2024. 10. 6. 07:05

 

2024.10.6. 나해_연중27주일 ( 피데스)

욥기 1:1, 2:1-10 / 시편 26 / 히브 1:1-4, 2:5-12 / 마르 10:2-16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히브 13:8

 

양은 냄비는 열전도율이 높아 빨리 끓지만 반면 빨리 식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냄비근성이란 말도 있습니다. 말은 대중 심리와 관련하여 어떤 일에 대해 지속성이 없이 금방 관심이 식어 버리는 현상을 빗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비하하여냄비근성이라고 종종 말하곤 합니다. 흥미 있는 일에 벌떼처럼 달려들었다가도 관심이 떨어지면 이내 열정이 식어버리는 근성. 너무나 빨리 경제성장을 대한민국은 느리더라도 지속 가능한 것을 유지하기보다 모든 것을 효율성이나 경제성에 따라 일을 처리해 경향이 큽니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빨리빨리라는 말입니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나면 금방 다른 일로 관심이 넘어가 유지 관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일을 처리합니다. 일회용품이 범람하는 이유도 이러한 근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빨리 쓰고 버리는 습성. 만약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일회용품처럼 대하셨다면 하느님 앞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부흥회, 성령대망회, 전도프로그램, 양육프로그램 들도 모두 일회성이 많습니다. 때때로 뜨거운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읽는 것은 가능하나 지속적이고 규칙적인 기도와 말씀을 읽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이 관심과 흥미를 끄는 일에는 벌떼처럼 달려들지만, 흥미 없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에는 모두 무관심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흥미를 유발하시는 분처럼 우리는 신앙에서도 이런 흥미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5 대기조처럼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대기하고 계신 분이라 여기는 듯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 너무 응답에 조급해집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기도하지만, 이내 일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 기도하지 않습니다. 은총을 받을 때는 기뻐하지만 어려움이 닥치거나 자신이 원치 않은 대로 일이 결론이 나면 이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예수님께 치료를 받은 10명의 나병환자 사람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지속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은총이 주어져도 하느님께 다시 돌아와 감사할 사람의 비율이 10분의 1 정도밖에 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우리를 상대로 정말 밑지는 장사를 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욥기 2:3

 

욥에 대해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욥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햇볕이 나나, 모든 변화무쌍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욥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그의 근성을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말입니다. 이를 우리는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 혹은 homoeostasis)’이라 부릅니다. 항상성은 모든 피조물들이 세상에서 존속되고 지속되는 가장 필요한 성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계는 이러한 항상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할 있습니다. 우리는 잠들 내일 아침에 해가 뜨지 않을 것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질서의 우주를 우리는 코스모스라고 부릅니다. 내외부의 교란이나 다양한 변수에도 물질과 생명이 유지될 있는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항상성입니다. 이러한 항상성은 회복력(resilience) 저항력(resistance)으로 내외부의 모든 자극과 위험들을 극복하게 합니다. 안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발동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회복력은 교란 상태 이전의 평형상태로 회복되는 성질을 말합니다. 저항력은 내외부의 교란 요인에 저항하며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기재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생태계의 구성원들은 건축물처럼 자기 나름의내력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력이 키워지면 많은 내외부의 도전에, 다양한 조건과 환경의 도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켜낼 있습니다. 이는 우리 생존에도 필요하지만,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근성이 되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받은 축복과 행복보다 처참한 불행이 주어졌을 , 이를 묵묵히 감내해 냈습니다. 그의 불행에 하느님을 저주하라며 욥을 비난했던 아내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기 2:10

 

욥은 자신의 삶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항상성 있게 지켜냈습니다. 그가 친구들과 논쟁을 벌인 것은 불행의 원인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은 신정론적인 호기심의 발로일 , 그는 번도 하느님에 대해 의심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단지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짧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나중에 욥을 회복시켜 주시면서 불행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시기보다 그에게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항상성으로 운행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왔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이러한 관계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도 바로 이러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요한 13:1

 

공동번역은더욱 극진히라고 번역했지만, “ἐν τῷ κόσμῳ, εἰς τέλος 코스모, 에이스 텔로스” “ 세상에서 끝까지그들을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항상성을 가지고 사랑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항상성이 없이 들쑥날쑥한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항상성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화된다면 그것은 항상성이라 부를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들쑥날쑥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은 정의와 사랑으로 항상성 있게 우리와 관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호세아의 말처럼 우리가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으시는 이십니다.(호세 11:8e)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는 이러한 항상성 위에 있습니까? 호세아가 이스라엘에게 전했던 메시지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해당됩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호세 11:2a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그런 우리를 그분은 버려두시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회복할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싶어 합니다. 이는 믿음이 우리가 만질 수도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이러한 항성성 위에 세워질 우리는 영적으로 그분을 느끼고 그분과 관계할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서 배운 것은 성무일과를 통한 이러한 신앙의 항상성입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의 생활이 성무일과와 노동을 통해 이러한 항상성을 지키는 집중하는 것입니다. 꾸준한 기도, 정해진 기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항성성 있게 식사를 하지 않으면 결국 영양실조로 죽듯이, 우리의 영도 꾸준한 기도와 규칙적인 기도가 없으면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죽어갑니다. 성무일과와 주일성수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성공회는 통성기도나 부흥사경회 같은 전통이 낯설지만 성무일과의 전통을 종교개혁 시대부터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서로 개혁한 교단이란 말을 하는 이유는 바로 평신도들도 기도서를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지속적으로 기도할 있기 때문입니다. “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해서 망한다.”(호세 4:6a) 호세아 선지자의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항상성 있는 기도 없이는 하느님을 길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노동과 일상도 기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을 적이 없습니다. 일하면서, 운전하면서 기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정해진 시간, 항상성 있는 기도가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신앙적 생각일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읽으시지만, 생각은 기도가 아니라 자기 안에 머무는 독백일 뿐입니다. 기도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회적인 기도, 문제가 있을 때만 하는 기도도 때론 주님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에 들어주시지만, 진정한 기도는 항성성 가운데 그분과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요구합니다. 깊은 사귐이 없다면 그분을 우리가 길은 없습니다. 항상성이 부재할 모든 관계는 피상적이 됩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간의 관계성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과 항상성 있은 관계를 위해 여러분도 여러분의 시간과 노력을 경주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일회용품처럼 대접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일회용품처럼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 여러분의 시간과 장소를 선별하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한번 시작하셨다면 끝까지 하시기 바랍니다. 다함이 없는 항상성으로 여러분을 단련시키고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욥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굴곡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오직 하느님으로부터그는 여전하지 않느냐?”라는 칭찬을 듣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길러진 신앙의 항상성이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모든 도전과 상황으로부터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강인한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항상성을 통해 기르시기 바랍니다. 단전에서부터 뿜어나오는 힘이 강한 용사의 허리를 단단하게 지탱하듯이 이러한 거룩한 습관은 여러분을 단단하게 만들어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청년부가 자발적으로 매주 금요일 10시에 [밤기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너무나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마르타님을 잃을 슬픔이 청년들이 주는 기쁨으로 상쇄됐습니다.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세우는 규칙적인 기도의 시간을 마련한 것은 우리 교회에 커다란 희망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기쁨을 청년부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청년들이 시작한 밤기도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항상성의 축복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축복이 우리 모든 교우들에게도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27 (나해) 1

 

본기도

하느님,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고 가르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순결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 마침내 주님께서 약속하신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욥기 1:1, 2:1-10

1:1 우스라는 곳에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2:1 또다시 하늘의 영들이 야훼 앞에 모이는 날이 왔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여 있는 것을 보시고 2 야훼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3 야훼께서 사탄에게, “너는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위에 다시 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헛일이었다.” 4 그러자 사탄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꿉니다. 사람이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5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뼈와 살을 쳐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것입니다.” 6 야훼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를 손에 부친다. 그러나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마라.” 7 사탄은 야훼 앞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욥을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부스럼이 나게 하였다. 8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토기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도 요지부동이군요?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10 그러나 욥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있단 말이오?” 이렇게 욥은 모든 일을 당하여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성시_시편 26

1    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주소서.
    깨끗하게 살며 주님만을 철석같이 믿습니다.
2    주여,
    나를 샅샅이 캐어 보시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마음 뒤집어 보소서.
3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4    사기꾼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흉한 자들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5    악인들의 모임에는 끼지도 않았고
    나쁜 자들과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6    주여,
    손을 씻어 나의 무죄함을 드러내고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며 노래합니다.
7    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고마우심을 노래로 찬미하리이다.
8    주여,
    나는 당신께서 거하시는 집이 좋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든 그곳이 좋습니다.
9     목숨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생명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은 뇌물만 집어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입니다.
11   몸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으니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주소서.
12  든든한 자리에 세워 주셨으니 감사드리며
     예배하는 모임에서 당신을 찬양합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1:1-4, 2:5-12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3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4 그리고 천사의 칭호보다 높은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심으로써 천사들보다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

5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장차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시지는 않습니다. 6 성서에 어떤 이가 이렇게 증언한 대목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까?
7    
주님은 그를 잠시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씌우셨으며
8    
만물을 그의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시편 8:4-6

이렇게 만물을 그에게 복종시키셨다는 것은 그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도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셨다가 마침내 영광과 영예의 관을 받아 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입니다.

10 ¶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습니다. 11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시편 22:22

 

 

 

복음서_마르 10:2-16

… 2 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께서는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4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습니다(신명 24:1).”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5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법을 제정해 것이다. 6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칠십인역 창세 1:27). 7 그러므로 사람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몸이 되는 것이다(칠십인역 창세 2:24).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된다.” 10 집에 돌아와서 제자들이 말씀에 대하여 물으니 11 예수께서는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12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