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0. 나해_연중29주일
욥기 38:1-7,(34-41) / 시편 104:1-9, 24, 35하 / 히브 5:1-10 / 마르 10:35-45
“존재의 자리_부여된 자리”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복음서 말씀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자신들이 앉을자리를 예수께 간청하는 이야기입니다. 욥기와 시편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존재의 자리’를 부여하신 분이 누구신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부여된 '존재의 자리’가 과연 어떤 것인지 말해줍니다. 존재의 자리는 카오스적인 혼란이 아니라 질서와 위계가 있는 코스모스와 관련된 말입니다. 모든 피조세계의 존재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없는 존재는 도태되거나 사라집니다. 태양계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등과 같은 행성들이 각자 존재의 자리를 갖고 자신의 궤도를 질서 있게 돌고 있습니다. 은하계에서도 모든 별들이 각자의 자리에게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행성의 자리가 다르고 항성의 자리가 다릅니다. 가끔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한 운성이 질서를 깨뜨리며 다른 별들과 부딪쳐 스스로 소멸됩니다. 이러한 코스모스는 신기에 가까운 질서 속에서 각자의 존재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코스모스는 보존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존재의 자리가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된 자리라고 오늘 말씀들은 일관되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도 자신의 자리와 영역을 지키며 생존하고 번식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간만은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의 자리에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리에 대한 욕심은 결국 남의 자리를 빼앗아 자신의 자리를 확장시키거나 더 넓힘으로써 더 많은 소유를 가지고자 합니다. 인간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주님께서 바로 그러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주실 분깃을 다른 제자들보다는 더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자리가 고난과 죽음의 자리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자식이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누가 고생 길이 훤한 길을 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요즘은 군대가 많이 좋아졌지만, 과거에는 학생들이 휴학하고 입대할 때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으로 훈련소에 들어갔던 것이 기억납니다.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자리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던가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고 싶지만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욕망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원했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차선을 선택하게 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에 순응하고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또 자신이 원했던 자리에 앉고 나니 이게 아니구나라고 뒤늦게 깨닫고 새로운 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찾고 그것에 만족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참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의 자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자리이듯이 모든 존재의 자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되는 자리입니다. 자기 스스로 존재의 자리를 만든 것같지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존재는 자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코스모스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주님께서 부여해 주신 질서대로 자신의 존재의 자리에서 자족하며 존재합니다. 그래서 존재가 먼저인지 아니면 자리가 먼저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존재와 자리는 동시적인 것입니다. 코스모스가 존재를 위한 공간을 비워주지 않으면 존재는 이 공간 속에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코스모스의 빈 공간들이 모두 존재를 위한 자리들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이 지구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이 지구라는 땅에서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공중의 새도 자신의 둥지가 있는 법입니다. 땅에 발을 딛지 않는 존재는 허공을 떠도는 유령일 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망상처럼 존재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공중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자리, 더 높은 자리라는 망상을 희망으로 쫓고 있습니다. 매주 사는 복권에서, 매일 그래프로 전해지는 주식 주가의 동향에서, 미래의 가치를 생각하고 투자한 부동산에서… 우리는 무형의 희망을 현재 안으로 끌어오려고 부단히 공중을 떠도는 유령처럼 땅에 발을 딛는 것을 망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존재의 시간을 너무나 과소비하며 낭비합니다. 게임처럼 가상공간 속에 빠져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고자 하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 발을 디디면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땅에는 실제의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공중에서 인공위성으로 바라보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상들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기와 포화뿐입니다. 땅에서 멀어지면 땅의 울부짖음도 고통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히로시마에 스위치 하나로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서로 마주 보는 상황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땅에는 인간이 살고, 몸이 있고, 사랑과 미움이란 감정도 있습니다. 땅을 딛는 순간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 때는 종군기자들이 땅을 밟고 전쟁터를 뛰어다니면서 전쟁의 참상을 전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상을 깨닫고 반전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전쟁은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바와 같이 땅이 없고 사람도 없습니다. 공중에서 인공위성이나 드론으로 촬영된 이미지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전쟁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공포와 고통의 참상을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이토록 오랫동안 전쟁이 지속되는 데 반전의 목소리가 미미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삶의 자리’와 ‘존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자리, 더 나은 자리를 찾아 또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자리를 옮겨서 모든 것이 해결되고 더 나아지면 다행이지만, 인간의 실존 안에 각인된 운명은 결국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뒤섞인 실존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 존재의 자리를 찾고자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며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오직 하느님께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부여해 주신 존재의 자리에 안착하고 자족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실존을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기쁨은 30배 60배 100배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한일 우정의 집 공사를 하면서 마당 구석에 처박아 뒀던 주물난로에게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작업을 지난주에 했습니다. 난로의 존재의 자리를 위해 바닥 기초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무거운 난로를 옮기고,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게고, 벽돌을 쌓고, 메지작업을 하고, 상판을 올리고, 굴뚝을 연결함으로써 “난로화덕의 존재의 자리”가 완성이 됐습니다. 만약 그러한 자리를 만들어 주시 않았다면 한갓 쓰레기로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난로가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부여받았습니다. 녹슬어 없어질 난로 하나에도 이렇게 존재의 자리를 만드는 일에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땀과 노력이 필요한데 하물며 인간의 존재의 자리는 어떠하겠습니까?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인 우리의 존재의 자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부여된 자리에 만족하기에는 아직도 우리는 추구할 것이 더 많이 남았습니까? 자족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 자리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과신하여 미혹에 빠졌고 그 망상 때문에 정도에서 벗어났다.” 집회 3:24
“정도에서 벗어났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존재가 “존재의 자리”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부여된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리를 만들려는 것을 집회서 말씀은 “망상”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과대망상”이지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을 꿈꾸고 자신이 앉을 수 없는 자리를 추구하는 것. 그러한 것을 가지고 싶어 갈망하다 보면 그것을 마치 가진 것인 양 자신을 포장하게 되고 그것을 실제로 믿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동물과 식물이 자기 보호를 위해 자신의 색과 크기를 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처세술입니다. 그러한 자기 방어적 망상은 자기 자신을 망치고 또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지나친 욕심과 기대가 이러한 망상을 부추깁니다. 그것이 신앙이란 이름으로 포장될 때는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도 아니고 자신감과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감은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존재에 기반하지만, 망상은 완전히 사막의 신기루처럼 허상이며 실재의 잔상일 뿐입니다. 땅에 발을 굳건히 디디지 않으면 그것이 망상인지 아닌지 절대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땅은 존재의 모든 허상과 가식을 부숩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상은 거침없이 우리의 삶의 자리를 파고들어 우리의 실존을 뒤흔듭니다. 그래서 아픔과 슬픔 그리고 기쁨도 느끼며 우리의 일상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땅은 사람으로 하여금 한치도 한눈을 팔게 하지 않습니다. 땅은 존재로 하여금 실존의 운명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마련하게 합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고유한 존재의 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세레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게 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은 곧 십자가에서 존재의 자리를 찾을 아들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올라 모든 인류의 존재의 자리인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 아들입니다. 그 자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과 기쁨과는 먼 고통과 저주와 질시와 험담이 난무한 자리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 마르 10:39 b
제베대오의 두 아들도 예수의 고난의 자리와 같은 자신들의 존재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부여된 자리입니다. “부여된 자리”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가 담긴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의지가 실현되는 자리이니 고통과 슬픔도 감당할 힘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곳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추구했던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가 실현되는 “존재의 자리”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렇게 하느님의 의지가 실현되는 각자의 “존재의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에게 부여된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일상이 이 땅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러할 때 여러분은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에도 여러분에게 가장 큰 축복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9주 (나해) 1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바쳐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섬기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욥기 38:1-7, [34-41]
1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2 부질없는 말로
.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3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 나 이제 물을 터이니
.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 말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6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7 그 때 새벽별들이 떨쳐 나와 노래를 부르고
. 모든 하늘의 천사들이 나와서 합창을 불렀는데,
. …
34 [너는 구름에 호령하여
. 물을 동이로 쏟아 땅을 뒤덮게 할 수 있느냐?
35 네가 “나가라.”고 명령하면
. “알았습니다.” 하며 번갯불이 번쩍 퉁겨 나가느냐?
36 누가 따오기에게 지혜를 주었느냐?
. 누가 닭에게 슬기를 주었느냐?
37a누가 구름을 셀 만한 천재이냐?
38 먼지가 덩이와 덩이로 굳어졌다가
. 하나로 뭉쳐지게 되도록
37b하늘에서 독을 기울여 물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39a네가 사자에게 먹이를 잡아줄 수 있느냐?
40 굴 속에 웅크리고
. 떨기 속에 숨어 노리고 있는
39b허기진 새끼 사자들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느냐?
41 새끼들이 먹이가 없어 허둥대며
. 하느님께 아우성칠 때에
. 누가 까마귀에게 먹이를 장만해 주느냐?]
38절, 따오기는 나일강의 범람을 알렸다는 고대 이집트의 새를 의미
성시_시편 104:1-9, 24, 35하
1 내 영혼아,
. 주님을 찬미하여라. ◯
. 주, 나의 하느님은 실로 웅장하십니다.
2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 ◯
.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습니다.
3 물 위에 궁궐을 높이 지으시고,
.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
.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4 바람을 시켜 명령을 전하시고 ◯
. 번갯불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며,
5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우시어 ◯
.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6 깊은 물로 땅을 입히셨더니 ◯
. 산꼭대기까지 물결이 넘쳤습니다.
7 그러나 한번 꾸짖으시니 넘치던 물이 물러나고 ◯
. 천둥소리도 당신 목소리에 줄행랑을 칩니다.
8 물들은 산을 넘고 골짜기로 내려가 ◯
. 당신께서 정하신 그 자리로 흘러갔습니다.
9 당신께서는 금을 그어 넘지 못하게 하시고 ◯
.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24 주여,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으나,
.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
.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
25 저 크고 넓은 바다, ◯
. 거기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가 수없이 우글거리고,
26 배들이 이리 오고 저리 가고 ◯
. 손수 빚으신 레비아단은 당신의 장난감입니다.
27 때를 따라 주시는 먹이를 기다리며 ◯
.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을 쳐다보다가
28 먹이를 주시면 그것을 받아먹으니, ◯
. 손만 벌리시면 그들은 배부릅니다.
29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 어쩔 줄을 모르고 ◯
.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30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
. 온 누리의 모습은 새로 워집니다.
31 주님의 영광은 영원하소서. ◯
. 손수 만드신 것, 주님의 기쁨이 되소서.
32 굽어만 보셔도 땅은 떨고 ◯
. 다치기만 하셔도 산들은 연기를 뽑는구나.
33 나는 한평생 주님을 노래하리라. ◯
. 숨을 거둘 때까지 악기를 잡고,
. 나의 하느님을 노래하리라.
34 나의 노래가 주님께 기쁨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 그러면 나는 주님 품안에서 즐겁기만 하련만.
35 악인들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려라. ◯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5:1-10
1 대사제는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사제는 속죄를 위해서 예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대사제는 자기도 연약한 인간이므로 무지하거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습니다. 3 그는 또 이렇게 연약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4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시편2:7”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6 또 성서의 다른 곳을 보면,
. “너는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 시편 110:4”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
복음서_마르 10:35-45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은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38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예,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편이나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41 ¶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화를 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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