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나해_연중30주일
욥기 42:1-6, 10-17 / 시편 34:1-8(19-22) / 히브 7:23-28 / 마르 10:46-52
“중재자(仲裁者)의 자리”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모든 존재에는 존재의 자리가 있다고 지난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존재가 이 세상에 실존하는 양태입니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과 관계하는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고 합니다. 이러한 존재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시작과 끝이 없고 원인도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무한한 존재, 무한자, 또는 초월자라고 명합니다. 무한한 존재는 오직 자기 스스로가 존재의 원인이 됩니다. 존재가 드러난다는 말은 쉬운 말로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는 자기 스스로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과연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끊임없는 질문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공자, 싯다르타,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예수 등과 같은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이러한 존재의 원인을 밝히고자 많은 삶의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을 인류의 스승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앎에 대한 추구가 철학의 영역을 벗어나면 신학과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옵니다. 그것은 앎에 대한 추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더욱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 전통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앎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부정의 신학” 위에 자신들의 신학을 구축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서 사도 바울로가 말했던 “긍정의 신학”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는 하느님의 경륜이 감추어져 있고 그것을 인간이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 깨달음이 늘어가도 인간의 앎은 늘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해도 유한자의 앎은 무한자의 그것을 결코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한자와 무한자 간에는 늘 간극이 존재해 왔습니다. 이것은 두 존재의 존재의 양태와 존재의 활동 양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세상에 종속되지만, 무한자는 그러한 모든 것들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끊임없이 이러한 무한자가 어떻게 유한한 세상과 관계하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 이래로 에녹,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엘리야와 엘리사, 다윗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까지… 구약은 눈에 보이는 이 현상의 세계에서 어떻게 무한자가 인간과 관계하는 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경륜을 기록한 것이 바로 구약성서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한자와 유한자는 절대로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는 이를 중재하는 중재자가 늘 존재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구약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한 중재자들입니다. 인과율의 원인에 종속되지 않으시는 분께서는 늘 중재자를 통해 모든 유한자들과 관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란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 무한자는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중재자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에 선 중재자의 자리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이것은 무한자와 유한자의 오랜 관계성에 종지부를 찍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구약시대부터 이어온 하느님께 이르는 모든 길을 차단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이신 하느님께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중재자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시각장애인으로 남에게 구걸하며 생활했던 바르티매오가 오늘 예리고 성에서 이러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어 많은 기대를 가지고 그를 만나고자 했으나 많은 군중들에 의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리를 질러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소란스러운 외침에 여러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습니다. 이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그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소경을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 하고 일러주자” 마르 10:49
소리치는 “여러 사람들”과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티매오에게 전한 사람들은 예수께서 보낸 중재자들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이는 중재자의 외침입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 사이에 가로놓인 많은 군중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바르티매오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많은 군중은 한 개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앞을 못 보는 바르티매오의 한계는 그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합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재자의 역할이 요청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이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실지를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제자들을 세상의 중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그분을 보내신 분께로 올라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한자이신 하느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알리고 인도하는 역할을 할 중재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러한 중재자들의 도움으로 바르티매오는 주님 앞에 설 수 있었고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물론 성서는 그다음 이야기를 생략했지만 이후 바르티매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추측할 수 있는 한 마디를 기록합니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시각장애인(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나섰다.” 마르 10:52
“예수를 따라나섰다.” “καὶ ἠκολούθει αὐτῷ 카이 에콜루테이 아토우” 이 말은 예수님과 같은 길 위에 함께 섰다는 말로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러한 중재자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중재자로의 부르심과 동시에 추종과 헌신이 늘 따랐습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욥기 42:3
방금 읽어드린 욥의 고백에는 무한자에 대한 유한자의 진솔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잘 섬겼던 욥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알고자 간절히 기도하고 친구들의 비판에 논쟁까지 불사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한자를 정면으로 대면한 순간 그는 무한자 앞에 완전히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다.”는 그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중재자의 자리에 선 우리가 마치 하느님의 모든 것을 아는 듯 우리 식대로 하느님을 마음껏 움직이려 하고 하느님을 우리 식대로 생각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 말이 옳고 타자의 말은 틀렸어라는 생각. 마치 자신이 아는 것이 진리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들. 자신이 느낌, 생각, 지식이 옳다는 독선. 어쩌면 우리는 중재자의 자리에서 무한자의 자리에 자꾸 서려는 유혹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저 같은 사제는 이러한 유혹에서 좀처럼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주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할 때는 무당이 시퍼런 작두날 위에 서는 듯이 제 자신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섭니다. 그리고 저도 감당할 수 없는 말들과 케리그마를 선포하고 나면 부끄러움이 몰려와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의 존재의 자리가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에 어디쯤, 즉 중재자의 자리에 서 있음을 다시 자각하게 됩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진행됐던 한일성공회 선교협력 40주년 대회를 치르면서 이런 묵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많은 분들이 통역을 하시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중재자의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강연자의 뒤에 서서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드러내지 않으며 강연자의 뜻을 잘 전달하는 그분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연자와 회중 사이에서 조용히 자리한 중재자의 자리는 참 겸손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도 있지만 마태오복음은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마태 10:2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재자는 통역사들처럼 자신보다는 원래 말하는 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두드러지려고 하는 순간 중재자의 본분을 잊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내에 많은 다툼과 오해가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제자로, 중재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교회 내에서 주인이 되고자 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진리의 담지자는 오직 한 분이신데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은 듯이 자신의 뜻과 생각을 주장합니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자리는 사라진 것입니다. 교회는 늘 소리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히 음지에서 보내신 분의 뜻에 따라 봉사하는 중재자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그들에 의해 하느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중재자들의 역할은 오직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전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중재자의 자리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소임을 다하는 것.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의 그림자 뒤로 자신을 감춥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는 유한하지만, 하느님의 위로와 인정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중재자의 영광입니다. 그 기쁨이 있기에 그러한 사람의 봉사와 헌신은 결코 멈출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번 40주년 행사에서 조용히 섬겨주신 우리 교우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평일인대도 자신의 시간을 내고 말없이 섬겨주신 여러분의 수고가 있었기에 이번 대회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헌신이 한국과 일본의 화해와 우정의 밑거름이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 뒤에 숨겨진 여러분의 수고는 주님께서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대접받는 자리, 인정받는 자리,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의 말을 경청하는 자리, 모두를 조용히 섬기는 자리, 모두를 품고 기도하는 자리… 이러한 중재자의 자리에 선 자는 분명 복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라 불림에 틀림없을 것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중재자의 자리에 임하시는 하느님의 축복이 예수님의 중재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이 시간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30주 (나해) 1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은 눈 먼 이들을 보게 하시고 연약한 이들에게 힘을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진리에 눈 뜨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욥기 42:1-6, 10-17
¶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2 알았습니다.
⋅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3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
⋅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5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10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니,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회복시켜 주셨다.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전보다 두 배나 돌려주셨다. 11 그의 동생들과 누이들, 또 그의 옛 친지들이 찾아와서 그의 집에서 함께 먹고 마셨다. 그 동안 야훼께서 욥에게 내린 재난이 얼마나 괴로웠느냐고 동정어린 말로 그를 위로하면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주었다.
12 야훼께서 욥의 여생에 전날보다 더한 복을 내려주셨다. 양 만 사천 마리,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쌍, 암나귀 천 마리에다 13 또 일곱 아들과 세 딸도 주셨다. 14 첫 딸의 이름을 예미마(‘비둘기’라는 뜻)라 하고, 둘째 딸의 이름은 케지야(‘육계향’이라는 뜻)라 하고, 셋째 딸의 이름은 케렌 하뿌아(화장할 때 쓰는 작은 상자를 의미)라 지어주었다. 15 전 세계에서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욥은 딸들에게도 그들의 오빠에게 준 것과 같은 유산을 나누어주었다.
16 그 후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대손을 보았다. 17 욥은 이렇게 수를 다 누리고 늙어서 세상을 떠났다.
성시_시편 34:1-8, [19-22]
1 나 어떤 일이 있어도
. 주님을 찬양하리라. ◯
.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
. 내 입에서 그칠 날이 없으리라.
2 나의 자랑, 주님께 있으니 ◯
. 비천한 이들아, 듣고 기뻐하여라.
3 나와 함께 “주, 높으시도다” 노래 부르자. ◯
. 모두 소리 맞춰 그 이름 기리자.
4 주님 찾아 호소할 때 들어 주시고 ◯
. 몸서리쳐지는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5 그를 쳐다보는 자, 그 얼굴 빛나고 ◯
.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아니하리라.
6 가엾은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
. 주께서 곤경에서 건져 주셨다.
7 주님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 ◯
.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주셨다.
8 너희는 주님의 어지심을 맛들이고 깨달아라. ◯
.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복 되다.
19 올바른 사람은 불행이 겹쳐도 ◯
. 주께서는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해 주시고
20 뼈 한 마디도 부러지지 않도록 ◯
. 고이고이 지켜주신다.
21 악인들은 그 행실로써 죽음을 당하고 ◯
. 의인을 미워하는 자 멸망하리라.
22 주께서 당신 종의 목숨을 구하시니 ◯
.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7:23-28
… 23 다른 사제들은 누구나 다 죽게 마련이어서 한 사람이 사제직을 계속해서 맡아볼 수가 없으니 결국 사제의 수효가 많아졌습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므로 그분의 사제직은 영구한 것입니다. 25 이렇게 예수께서는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자의 일을 하시니 당신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26 우리에게는 이렇게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대사제가 필요합니다. 27 다른 대사제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들의 죄를 용서 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 일을 한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을 따라 대사제가 된 사람들은 연약한 인간이지만 율법이 생긴 이후에 하느님의 맹세의 말씀을 따라 대사제가 되신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영원히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복음서_마르 10:46-52
46 예수와 제자들이 예리고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8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49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그들이 소경을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 하고 일러주자 50 소경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왔다. 51 예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52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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