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27.금_나해_故 김윤주 마르타 사제회장 장례성찬례
2고린 4:16-5:9 / 시편 46 / 요한 6:37-40
“죽음을 삼킨 영원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故 김윤주 마르타 사제회장 장례성찬례”
설교문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타이핑을 치고 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 한 동안 먹먹했습니다. 제발 마르타님의 장례예식을 제가 집전하는 날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3년 동안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결국 그러한 날이 왔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서러운 물결이 마음을 휘젓고 지나갔습니다. 저로서는 마르타 사제회장과 함께한 3년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제주우정성당 자리를 알아보러 다닌 일, 맛있는 것만 발견하면 “신부님, 이거 좀 드세요”하며 성당 문을 들어오던 마르타님의 밝은 모습. 떨리는 마음으로 사제회장으로서 감사성찬례 시측을 서던 모습, 새 신자나 방문자들이 오시면 밝은 웃음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던 모습…그리고 마르타님은 페북을 통해 많은 성공회 신자들과도 친분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제주교회의 소식은 마르타님을 통해 전국에 전해져서 제가 굳이 말을 안 해도 만나는 신부님들마다 우리 교회 소식을 꿰고 계셨습니다.
마르타님의 생전 모습에서 우울한 암환자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제게 조심스럽게 묻기도 하셨습니다. “저분은 어디가 그렇게 아프십니까?”
3년 전 제가 부임하기 1주일 전에 마르타님은 말기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저의 제주 사목 시작과 마르타님의 투병생활이 함께 시작된 것이지요. 낯선 이곳에서 제주우정성당 자리를 찾는 일은 넉넉하지 않은 교회 재정 때문에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부동산에 좋은 땅 정보가 나오면 언제든지 마르타님은 제게 전화를 하셨고 그렇게 함께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예산보다 두 배나 비쌌던 이곳을 떨리는 마음으로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이었는데, 대한성공회 3개 교구 주교님들의 만장일치로 이곳이 성당자리로 선정됐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급물살을 탔습니다. 그리고 단 2년 만에 제주우정성당이 이곳에 터전을 잡게 됐고, 성당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여 작년 9월 19일에 성당축성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퇴임을 앞둔 서울교구 교구장이신 이경호 주교님께서 퇴임 인터뷰에서 7년의 사역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가 바로 제주우정성당을 세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관구장이셨던 이경호 주교님과 우리 부산교구 교구장이신 박동신 주교님의 도움이 컸지만, 무엇보다도 이 성당은 김윤주 마르타님의 헌신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당과 김윤주 마르타 사제회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어디 하나 그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성당정원의 비파나무를 보고 너무나 기뻐했던 모습이 지금도 제 눈에는 선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들은 모두 “영원성”에 대해 말합니다.
영원을 뜻하는 헬라어 “아이오니오스 αἰώνιος”는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짐, 또는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음”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영원성”을 유한한 피조세계에 대비해서 오직 하느님께 사용했습니다. 시편 90장 2절은 “한 옛날부터 영원히 당신은 하느님”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 말할 때 이 “영원”이란 말이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목적” 등과 같이 하느님의 선하신 목적과 의지에 사용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두 변하지만, 영원성을 지닌 것은 결코 변하거나 변질되지 않습니다. 유한하고 가변적인 우리는 이러한 영원성을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도저히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 영원성은 이 육신이, 마치 식물의 씨앗이 죽어야 싹이 나듯이,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획득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품고 있는 곡식이나 열매의 형상이 그 안에 숨겨져 있듯이 우리의 영원성은 우리의 유한한 육신 안에 그 형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그 영원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같은 주님이시지만 부활한 후 그분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는 그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유한성을 입은 예수의 형상만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히 그분의 하느님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던 잠자고 있는 영원성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덧없음이 영원성을 획득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6장 3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요한 6:34
이 “살리는 일”은 단순히 생명이 다시 소생하는 차원을 넘어 생명이 영원성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약속을 알았기에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난 사도 바울로에게 이 유한한 세상과 육신의 죽음은 단지 “가벼운 고난”일뿐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가 고난을 가볍고 대수롭게 여겼다는 뜻이 아니라 장차 믿는 자에게 약속된 “영원성의 영광”이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한계를 지닌 우리는 그 영원성을 전혀 체험하지 못했지만 사도 바울로는 삼층천의 경험까지도 하신 분이시니 그분의 말은 참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입으면 벌거숭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2 고린 4:2-3
그는 영원성을 마치 옷을 입듯이 그것을 덧입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벗어져야 “하늘의 것”을 덧입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은 바로 영원성입니다. 그러나 먼저 고난과 아픔이 있어야 부활과 영광도 있습니다. 순서가 그러한데 그 반대를 원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순리가 그러한데 그것을 뒤집을 수도 없습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이는 무슨 말입니까? 죽음이 생명을 앗아간 것이 아니라 영원성이 죽음을 앗아갔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 말입니다. 죽음이 단순히 생명의 끝, 세상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삼킨 것을 뜻합니다. 죽음이 영원성에 의해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오늘 말씀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영원성을 덧입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가신 故 김윤주 마르타 사제회장과 마지막 영성체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손길이 묻어 있는 이 제단과 이 성물들과 이 성구들로 우리는 그녀를 이제 떠나보낼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녀와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우리는 비록 지금 신음하고 슬퍼하지만 다시 만날 기쁨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고, 또 희망으로 그날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김윤주 마르타님과 함께한 시간들이 그립고, 또 그분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음에 비록 지금 슬프지만, 우리는 부활의 때에 김윤주 마르타님을 반드시 알아볼 것입니다. 사제회장으로의 소임을 다 마치시고 이제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실 마르타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합니다.
“마르타님, 그동안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당신이 있어서 우리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우리 부활 때 다시 만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장례성찬례
서신서_2고린 4:16-5:9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17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5:1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주시는 집입니다. 2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그것을 입으면 벌거숭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4 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집을 덧입음으로써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5 이런 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7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든든하며 오히려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평안히 살기를 원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서 주님 곁에 가 있든지 오직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성시_시편 46
◦ 하느님은 우리의 힘, 우리의 피난처시니 어려운 고비마다 항상 구해주셨다.
●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깊은 바다에 빠져들어도 우리는 무서워 아니하리라.
◦ 바닷물이 우짖으며 소용돌이치고 밀려오는 그 힘에 산들이 떨지라도
● 만군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 강 물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존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
● 그 한가운데에 하느님이 계시므로 흔들림이 없으리라. 첫새벽에 주께서 도움을 주시리라.
◦ 한 소리 크게 외치시니 땅이 흔들리고 민족들은 뒤설레며, 나라들이 무너진다.
● 만군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 너희는 와서 보아라. 세상을 놀라게 하시며 주께서 이루신 이 높으신 일을!
● 땅끝까지 전쟁을 멎게 하시고, 창 꺾고 활 부러뜨리고, 방패를 불살라버리셨다.
◦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인 줄 알아라. 세상 만민이 나를 높이 받들어 섬기리라.”
● 만군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복음서_요한 6:37-40
37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40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주시는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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