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4. 화. 다해_성탄밤 감사성찬례(9pm)
이사 9:1-6 / 시편 96 / 디도 2:11-14 / 루가 2:1-14(15-20)
“하느님의 굴욕”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itist
우리는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기분이 나빠지고 화를 내기 쉽습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나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지만,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적정 수준의 자기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갈등의 대부분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릴 때 발생하곤 합니다. 무시당한 느낌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완전히 벌거벗겨지는 느낌과 유사해서 감당할 수 없는 치욕과 굴욕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체면을 중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상대와의 관계에서 일대일로 당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은 일본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이라 말들 하지만, 아마도 그건 인간 보편의 본성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자존심 상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굴욕이고 수치였습니다. 궁궐이나 부유층의 안방에서 태어난 유복한 아기가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말과 소들이 먹이를 먹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오물이 넘쳐나고 따뜻한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차디찬 구유에서 그분은 가축의 먹이처럼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미혼모에게서 아무런 방어기제 없는 연약한 모습으로, 완전히 의존적인 모습으로, 깨지기 쉬운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굴욕이었고, 하느님의 수치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전설이나 신화에서도 왕이나 종교지도자의 탄생을 이렇게 수치스럽게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탄생했다고 하지요. 그것은 신비를 담고 있는 신화이지만 결코 수치스럽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로마의 시조였던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설들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하지 결코 듣는 사람에게 수치를 안겨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말구유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 그리고 가장 천민인 목동들에게 예언된 탄생 이야기, 미혼모 탄생 이야기 등은 신비보다 오히려 체면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수치와 치욕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그분의 전생애를 읽고 듣고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아기 예수 탄생이야기에 익숙하지만, 복음서가 탄생하기 이전에 1세기 초대 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데 결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의 처음 오심은 지극히 평범했고 지극히 가난했으며 지극히 볼품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빈자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의 입장에서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수치와 굴욕으로 느껴졌음에 틀림없습니다.
최초의 복음서가 서기 60년대에 씌여진 마르코 복음입니다. 그러나 마르코 사가는 감히 이러한 예수님의 수치스러운 탄생에 대해 언급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미혼모 탄생 이야기와 빈자의 모습으로 오신 이야기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도 수치스러운데 그분의 굴욕적인 탄생은 어떻겠습니까? 초대 교회에는 요즘과 같은 그리스도론이 완전히 정립되기 이전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마르코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로도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의 탄생보다 오히려 예수의 부활에서 그의 그리스도론을 찾았습니다. 마태오도 차마 예수의 탄생을 마구간으로 기록할 수는 없었습니다. 구약 예언의 실현으로서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야 하는 마태오 입장에서 예수의 마구간 탄생의 전승은 화려한 동방박사의 방문 전승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역사가적인 관점으로 기술한 루가에게는 마구간 탄생의 전승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루가가 보기에 역사의 예수는 분명 자신과 같은 빈자들을 위해 오신 분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마구간 탄생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왜 루가가 마구간 탄생의 전승을 채택했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구간 예수 탄생의 이야기의 의미에 다가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예수의 탄생이 아기를 감싼 “포대기”에서 시작되어 예수의 시신을 감싼 “수의”에서 끝이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의 탄생이 바로 죽음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기이든 시신이든 이 둘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감쌀 수 없는 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전적인 의존의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탄생의 순간에 자신을 완전히 어머니 마리아에게 의존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의존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러한 절대 의존으로 말미암아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벌하시기도 하셨던 하느님께서 이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완전히 자기의 아들을 굴욕에 내어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케노시스κένωσις, 자기 비하”의 그리스도론이 여기에서 탄생합니다. 하느님의 굴욕과 치욕이 인간에게는 오히려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담긴 역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을 치욕과 굴욕을 혼자서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연약한 인간의 육체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수치와 굴욕, 치욕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부심이며 희망이며 또한 기쁨이 됩니다.
루가복음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야기를 즈가리야에서 마리아로, 마리아에서 목동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의 비밀은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니라 아버지 즈가리야에게 예언되었습니다. 이는 육신의 씨앗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이 태어나실 아기 예수에게는 육신을 입을 곳인 생명의 태, 즉 마리아의 태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신 목적은 정확하게 구원의 대상인 빈자들, 즉 목자들에게 예언됩니다. 절망과 굴욕과 가난과 추위에 떨던 빈자들.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대받는 부류인 목동들, 하느님 외에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빈자들. 그러므로 목동은 모든 빈자들의 표징인 것입니다. 루가 사가의 섬세한 필체와 꼼꼼한 자료 수집, 그리고 치밀한 편집 덕분에 우리는 아기 예수 탄생의 비밀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굴욕과 치욕을 운명처럼 몸에 지니고 태어나셨습니다. 마구간과 말구유는 그분의 존재의 자리였습니다. 빈자의 자리, 굴욕의 자리, 수치의 자리 말입니다. 말이 구유에서 먹이를 먹고 생명을 얻듯이 이제 우리 인류는 구원의 구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며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의 탄생에 담긴 구원의 신비이며 또한 성찬례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수치와 굴욕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기꺼이 우리의 먹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먹고 마시며 그분의 오심과 다시 오심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빈자의 구유, 빈자의 먹이.
이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사람만이 깨닫게 되는 신비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빈자였던 목동들처럼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그분을 먹고 마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상호거주하게 됨은 분명합니다. 아기 예수를 잉태했던 태가 복되었던 것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과 함께 상호거주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잉태는 상호거주에 대한 표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탄의 밤에 아기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며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품에 잉태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밤에 드리는 성찬례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했던 목동들처럼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며 각자의 마음에 열린 자궁으로 그분을 우리 안에 잉태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한 빈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얻어 세상을 담대히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한 생존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 인류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의 오심으로 우리 안에 모든 굴욕과 치욕, 우리를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모든 수치에서 우리는 자유해졌습니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굴욕으로 이 모든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우리는 선포하고 감사합니다. 이 성탄절 모든 굴욕과 수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울러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의 2025년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그러한 한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12.25. 성탄 밤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아기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거룩한 밤을 주님의 참 빛으로 비취셨나이다. 비오니, 이 빛으로 우리를 이끄시어 하늘의 영광을 찬미하며, 이 땅에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9:1-6
12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23 당신께서 주시는 무한한 기쁨, 넘치는 즐거움이
. 곡식을 거둘 때의 즐거움 같고,
. 전리품을 나눌 때의 기쁨 같아
. 그들이 당신 앞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34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 어깨에 멘 장대를 부러뜨리시고
. 혹사하는 자의 채찍을 꺾으실 것입니다.
. 미디안을 쳐부수시던 날처럼, 꺾으실 것입니다.
45 마구 짓밟던 군화, 피투성이 된 군복은
.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56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67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
라틴어 성서는 8:32하에서 9:1이 시작됩니다. 작은 숫자는 라틴어 성서의 구절 번호입니다.
성시_시편 96
1 새 노래로 주님을 노래하여라. ◯
. 온 세상아, 주님을 노래하여라.
2 주님을 노래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 우리를 구원하셨다. ◯
. 그 기쁜 소식 날마다 전하여라.
3 놀라운 일을 이루시어 이름을 떨치셨으니 ◯
. 뭇 민족, 만백성에게 이를 알리어라.
4 높으신 주님을 어찌 다 찬양하랴. ◯
. 신이 많다지만
. 주님만큼 두려운 신이 어디 있으랴.
5 뭇 족속이 섬기는 신은 모두 허수아비지만 ◯
. 주께서는 하늘을 만드신 분이시다.
6 그 앞에 찬란한 영광이 감돌고 ◯
. 그 계시는 곳에 힘과 아름다움이 있다.
7 힘과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
. 민족들아, 지파마다 주님께 영광을 돌려라.
8 예물을 들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
.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9 거룩한 광채 입으신 주님을 경배하여라. ◯
. 온 땅은 그 앞에서 무서워 떨어라.
10 이 땅을 든든하게 세우신 주 앞에서
. “주님이 왕이시다”고 만방에 외쳐라. ◯
. 만백성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리라.
1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 바다도, 거기 가득한 것들도,
. 다 함께 환성을 올려라. ◯
. 들도, 거기 사는 것도,
. 다 함께 기뻐 뛰어라.
12 숲의 나무들도 환성을 올려라.
. 주께서 세상을 다스리러 오셨다. ◯
. 그 앞에서 즐겁게 외치어라.
13 그는 정의로 세상을 재판하시며 ◯
. 진실로써 만백성을 다스리신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디도 2:11-14
11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12 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줍니다. 13 그리고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바치셔서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건져내시고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14절: 시편 130:8; 출애 19:5; 신명 4:20, 7:6, 14:2; 에제 37:23
복음서_루가 2:1-14 (15-20)
1 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2 이 첫 번째 호구 조사를 하던 때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 3 그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 헴이라는 곳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난 고을이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5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 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7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8 그 근방 들에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면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다. 목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보고 10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11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 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하고 말하였다. 13 이 때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5 천사들이 목자들을 떠나 하늘로 돌아간 뒤에 목자들은 서로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사실을 보자.” 하면서 16 곧 달려가 보았더니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고 과연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다. 17 아기를 본 목자들이 사람들에게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이야기하였더니 18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일을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19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0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처음”_2024.12.25. 수. 다해_성탄대축일 감사성찬례(11am) (0) | 2024.12.27 |
---|---|
“빈자의 영성, 빈자의 복음”_2024.12.22. 다해_대림4주일 (0) | 2024.12.22 |
“주님의 길”_2024.12.15. 다해_대림3주일 (0) | 2024.12.15 |
“그때”_2024.12.1. 다해_대림1주일 (0) | 2024.12.01 |
“아무튼 네가 왕이냐?”_2024.11.24. 나해_왕이신 그리스도 주일_연중34주일 (0) | 2024.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