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9. 다해_성탄1주일
사무상 2:18-20, 26 / 시편 148 / 골로 3:12-17 / 루가 2:41-52
“영적 성장-소년 예수”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성서는 숫자와 관련된 표현으로 진리를 우회해서 드러냅니다. 7은 3(하느님의 세계)과 4(자연의 수)를 합친 수이고 온전함과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8은 새로움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제8요일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제7일인 안식일과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7과 마찬가지로 12 또한 완전수입니다. 12는 하느님의 세계를 뜻하는 3과 땅과 자연의 수인 4를 곱한 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 두 지파였고 제자들의 수도 열둘이었습니다. 9는 히브리인들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상징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숫자 3과 함께 삼위일체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10은 완전함과 전체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숫자에 대한 지식은 성서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우리가 깨닫게 합니다.
예수에 대한 탄생 이후 기록이 없다가 열두 살이 된 해에 예수께서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숫자와 관계합니다. 열두 살을 시작으로 그의 영적, 육적 성숙함이 완전함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이는 정확하게 나이의 열두 살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분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감당할 정도로 완전하게 성숙한 단계가 됐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열두 살은 하나의 주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예수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모가 소년 예수를 잃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찾은 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을 미리 암시한 것입니다. 숫자 3은 하느님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고 그것은 확정된 하느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육적인 삶의 시작부터 그의 운명에는 이렇게 필연적인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루가 사가는 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숫자를 통해 이러한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의 신원에 드러난 하느님의 섭리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리고 루가 사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과 끊임없이 연결을 시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분이 하느님의 집인 성전과 관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루가 사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루가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할례도 받고 정결례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 27편 4절을 분명 염두에 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시편 27:4
이것이 예수께서 힘들게 그를 찾은 부모님께 매정할 정도로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로써 이제 소년 예수는 부모님 슬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인격으로 성장하셨음을 드러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존재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인성과 신성이 조화롭게 성장하셨다는 뜻입니다. 루가는 그의 부모가 이러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을 마리아는 마음속에 간직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성모 마리아에 대해 긍정적인 기록을 남깁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도 하느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승 자료에 마지막으로 루가는 사무엘 상 2장 26절을 수정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루가 2: 52
루가는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존경하는 선지자 사무엘의 성장의 예를 예수의 성장에 대입하여 표현했습니다. 이는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예수의 신원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루가는 예수의 신성이 인성 가운데 은연중에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분의 신성을 모두 드러내기에는 시간적으로 이릅니다. 그분의 인성이 아직 소년의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 다시 예수의 역사적 기록이 사라집니다. 아마도 그 기간은 인성을 따라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순종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시간, 즉 인성이 완전히 자랄 때까지 일반적인 인간과 똑같은 성장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육신을 입은 신성도 육신의 성장의 프로세스와 조화를 이루며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루가가 사무엘의 성장과정을 빗대서 예수의 육체적, 인격적 성장 과정을 설명한 이유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분은 육신을 통해 부모님과 다른 어른들에게 순종했고 배울 것을 겸손하게 배우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소년 예수는 율법학자들에게 묻기도 하고 또 그들의 말을 듣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교육의 프로세스입니다. 잘 배우는 사람은 잘 듣고 또 질문도 잘하는 법입니다. 그분은 성령으로부터 지혜를 받아 겸손하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의 말을 잘 경청하는 법입니다. 이것이 배우는 자의 겸손입니다. 성령의 지혜로 인해 소년 예수는 오히려 율법학자들을 가르쳐야 할 신분이었지만, 그분은 자신을 낮춰 겸손하게 경청하셨습니다. 그분의 경청과 질문은 결국 율법학자들을 하느님의 지혜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소년 예수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그의 “지능과 대답”에 경탄한 이유입니다. 소년 예수의 사람됨과 그분의 인격이 이로서 드러납니다.
이러한 예수의 성장 과정을 교부 히에로니무스는 “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에 의해 훈육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분의 신성으로 인한 지혜로 인해 그분은 타자나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성령의 지혜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 말입니다. 이사야 11장 2절은 이러한 성령을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이라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분 안에 선재된 신성으로 지혜가 충만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루가는 이렇게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며 그 신성이 육신 안에서 함께 성장의 과정을 겪는다고 은연중 강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제약 속에서도 신성은 끊임없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 인성을 고양시키고 성장케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의 육신과 정신도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끊임없이 위를 향해 고양되고 성장할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면, 우리는 그분의 인격처럼 조금씩 그분을 닮아갑니다. 오래 결혼 생활을 한 사람들은 부부가 매우 비슷해진다고 합니다. 심지어 외모조차 유사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오랜 시간이 두 사람의 인격을 공동의 인격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인격이 각각 고유하게 유지되면서도 둘이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부부의 공동의 인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신 사람은 주님과 함께 성장합니다. 처음에는 아기 예수의 인격을 닮습니다. 아기 예수의 인격은 의존적인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신앙이 깊어지면 소년 예수의 인격을 닮게 되고 마침내 어른 예수의 인격을 닮게 되면서 우리도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점점 성장하면서 자기 비움의 케노시스에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아기 예수를 우리 안에 품게 됩니다. 이는 매년 반복되는 우리 성장의 순환점입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품에 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성탄절에 아기 예수를 우리 품에 품습니다. 대림절의 4주간을 이러한 기다림의 목마름으로 보내고 마침내 성탄절에 우리도 아기 예수를 마리아처럼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기 예수와 함께 우리는 새로운 전례력의 한 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 년에 한 번씩 순환되는 우리의 전례적 순례길이고,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프로세스입니다.
성탄절에 품었던 아기 예수가 일 년의 순례 기간 동안 우리 안에서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아기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지혜의 영으로 지식의 영으로 슬기와 용맹의 영으로 그리고 경륜의 영으로 충만하여 우리의 영적 인격이 성장합니다. 물론 그 끝은 예수의 인격과 조화된 우리 각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성장이고 성화의 과정이 됨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이러한 성장을 “신화神化”라고 표현합니다. 신화는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 됨”을 뜻합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신화’가 인간의 목적이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필멸성을 가진 우리가 영원성을 덧입어 하느님화 됨을 뜻합니다. 이는 창조 때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이미지로 인간을 만드신 목적대로 우리 인간이 신성 안에서 회복됨을 뜻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 의미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주님께서 고양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육신의 한계에서 위를 향해 고양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의 성장 이야기는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장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성장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회심과 세례 때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유아기에만 머물 수도 없고 열두 살 청소년기에만 머물 수도 없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이 제자리걸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예루살렘까지 직선거리로 400km가 조금 넘는 정도이니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한 두 달이면 팔레스타인 땅에 닿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순종했다면, 그들이 광야에서 영적으로 성장했다면 그들은 시나이 사막에서 40년을 방황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한 세대는 그대로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모두 도태되는 법입니다. 그들은 구원에 초대받았지만 결국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 가운데 생활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고 눈앞에 주어진 일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경주합니다. 하느님은 식사 기도나 주일에만 잠깐 생각하면 되는 정도로… 그러니 우리 안에 아기 예수는 좀처럼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신성을 가진 예수님 조차 율법학자들에게 묻고 들으면서 배움의 길을 가셨는데 우리는 말씀을 그렇게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늘 1인칭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고 타자와 관계를 합니다. 아이들은 모든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년 예수까지만이라도 성장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하느님의 지혜를 조금은 맛볼 수 있습니다. 성인 예수로 성장하여 십자가를 질 정도록 성숙될 수 없다면 최소한 소년 예수 정도는 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왕 믿음을 가졌으니 말입니다. 매년 우리의 전례력은 이러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전례력에 따라 일 년을 성실히 살아보시면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고 겸손하게 예수님과 함께 매일 성장할 수 있도록 잘 듣고 잘 질문하며 말씀 안에서 성장해 가시기 바랍니다. 지혜는 그렇게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까지, 하느님의 지혜의 장성한 분량까지 여러분이 성장하셔서 하느님 안에서 어른으로서 그리고 타자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정도로 우리가 성장해 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5년은 우리에게 이러한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성탄1주 (다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진리의 빛을 밝혀주셨나이다. 비오니,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인 우리가 이 빛을 따라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무상 2:18-20, 26
18 어린 나이에 야훼를 모시게 된 사무엘은 몸에 모시 에봇을 입고 지냈다. 19 그의 어머니는 매년 주년제를 드리러 남편과 함께 올라올 때마다 작은 두루마기 한 벌을 지어다가 아들에게 주었다. 20 그러면 엘리는 엘카나 부부에게 “야훼께서 맡기로 하신 이 아이 대신으로 이 부인 몸에서 후손이 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복을 빌어주었고 이 축복을 받고 그들은 자기네 고장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
26 한편 어린 사무엘은 야훼와 사람들에게 귀염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성시_시편 148
1 알렐루야!
.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
. 그 높은 데서 찬양하여라.
2 그의 천사들 모두 찬양하여라. ◯
. 그의 군대를 모두 찬양하여라.
3 해와 달아 찬양하고 ◯
. 반짝이는 별들아, 모두 찬양하여라.
4 하늘 위의 하늘들, ◯
. 하늘 위에 있는 물들아, 찬양하여라.
5 주님의 명령으로 생겨났으니, ◯
.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
6 지정해 주신 자리, 길이 지키어라. ◯
. 내리신 법은 어기지 못한다.
7 땅에서도 주님을 찬양하여라. ◯
. 큰 물고기도 깊은 바다도,
8 번개와 우박, 눈과 안개도, ◯
. 당신 말씀대로 몰아치는 된바람도,
9 이 산 저산 모든 언덕도, ◯
. 과일나무와 모든 송백도,
10 들짐승들과 가축들도 ◯
. 기는 짐승과 나는 새들도,
11 세상 임금들과 모든 추장들도 ◯
. 고관들과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도
12 총각 처녀 할 것 없이 ◯
. 늙은이 어린이 모두 함께
13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 그 분 홀로 한없이 높으시고 ◯
. 땅 하늘 위에 그 위엄 떨치신다.
14 당신 백성의 영광을 드높여 주셔서, ◯
. 당신을 가까이 모신 이 백성,
. 이스라엘 후손들,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골로 3:12-17
12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13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14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모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십시오. 그리고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17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복음서_루가 2:41-52
41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42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44 아들이 일행 중에 끼여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45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46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47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48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49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0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사무상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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