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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_2025.2.16. 다해_연중6주일

James Chae 2025. 2. 16. 06:23

2025.2.16. 다해_연중6주일

예레 17:5-10 / 시편 1 / 1고린 15:12-20 / 루가 6: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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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한자 의미를 찾아보면()’ 변에()’ 자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 하늘[]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 상형문자이고, ‘ 허리 부분이 불룩하게 나온 단지의 상형문자입니다. 이는 사람의 힘에 의함이 아니라 하늘이 부어준 어떤 힘에 의해 충만해짐을 뜻합니다. 인간의 힘을 초월한 운수와 오붓하고 넉넉함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은총을 가득 받아 충만하게 배가 부른 상태입니다. 이러한 복은 인간의 힘만으로 없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이 복보다는 생로병사로 가득하기에 사는 동안 행운과 행복으로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함부로 비난할 없습니다. 그러나 복을 간구하는 마음이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 자기 가족만을 위한 것이 인간의 사회는 오히려 누군가의 복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행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장수의 , 물질의 , 건강의 , 자녀의 등도 사람의 기준과 마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어느 정도의 복을 받아야 인간은 과연 만족할까? 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양손에 먹을 것을 쥐고도 먹을 것을 요구하는 욕심 많은 어린이처럼 우리도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마치 빠진 독처럼 복을 받아도 절대 채워지지 않고 감사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카리오이 호이 페인논테스 (Μακάριοι οἱ πεινῶντες)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루가 6:20b

 

 

여기서 사용한 복을 의미하는 “μακάριος마카리오스라는 헬라어 형용사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종종 신이나 죽은 자와 연관되어, 어떤 행복한 상태와 관련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서적 맥락에서 그것은 신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축복을 묘사하는 사용됩니다. 용어는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는 다른 반문화적 이해를 반영하는데, 이는 외부 상황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영적 상태와 신과의 관계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마카리오스" 영적 안녕과 번영의 상태를 설명하는 사용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깊고 지속적인 기쁨과 만족을 나타냅니다. 용어는 종종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사용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행복 선언은 그리스도교의 모든 복에 대한 개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굶주린 사람들”, “우는 사람들”, “인자 때문에 고난 받는 사람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란 말에 수렴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태오와 다르게 루가는 행복 선언을 불행 선언과 대칭 구도로 편집을 했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부유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배불리 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웃는 사람들”,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모욕받는 사람들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는 사람들”. 이렇게 말입니다. 현재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란 구분이 마지막 주님의 때에는 신세가 완전히 역전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오나 루가 모두 이를 예수 어록에서 옮겨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아마도 루가가 기록한 가지 버전이 원래 예수 어록에 가까운 것일 겁니다. 물론 루가가 기록한 마지막 핍박에 대한 내용은 루가공동체의 삶의 자리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예수 어록의 원전은삼중 행복 선언이었을 겁니다. 마태오는 루가가 기록한 가지에 더해서 다섯 가지를 덧붙여 아홉 가지의 행복 선언을 만들었습니다. 결국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우는 사람들 인간 실존의 모든 고통과 현실을 대변하고 있겠다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 굶주림, 슬픔을 복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물질적 세계가 지닌 필멸성을 근본으로 합니다. 유한하고 충분하지 못하고 연약한 것이 가시적인 세상의 물질적 본질입니다.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잡아먹고, 이에 약한 것은 두려움에 떨게 되고, 그리고 시시각각 발생하는 기근과 재난들, 적들의 공격 예수님 시대에나 지금이나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실존의 양식은 전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강한 것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입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또한 자연의 법칙에 존재합니다. 때론 연약하고 취약한 생존 양식을 가진 존재가 오히려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이기고 생존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강한 것들과 우성인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마지막 살아남은 것들이 강한 것이고 우성인자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우는 사람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일반적 가치에 대한 완전한 전복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선언을 하신 이유는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기때문입니다. 현재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그때에는 반드시 나타나셔서 세상의 모든 가치를 전복시키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희망 고문이 아닌 것은 하느님 자신이 친히 성육신하셔서 세상의 고난과 불행을 모두 짊어지신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가난과 굶주림, 슬픔을 모두 자신의 몸으로 견인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박음으로 말미암아 인간 실존의 저주의 고리를 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 선언은, 지금의 처지는 비록 가난하지만,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로부터 시작이 됐기 때문에 지금부터,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예수를 따르는 현재부터 우리의 생각을 먼저 바꾸라고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만질 있고, 있고, 소유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질 있고, 있고, 소유할 있는 것은 세상의 물질적 한계성, 필멸성을 지니기 때문에 결코 행복의 조건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복되다, 가난한 자들이라 말씀하셨지, 그들이 풍요로워지고, 부자가 되고, 가진 것이 많게 것으로 인해복되다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이교도들이 구하는 복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마카리오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성의 충만함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은하느님으로 말미암는 복된 상태 말합니다. 그것의 조건은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보통 옛날 애정 드라마에서 남자들이 여자에게 청혼할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나는 당신만이면 충분해라는 고백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말합니다. 말은 당신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이미 충만하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의 복은 이러한 관계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 분만으로 만족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느님께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영원한 현재뿐이십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느님은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히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영원한 현재 관계하신 것처럼 모세와도 현재에 똑같이 관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은 우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할 이유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순간 이미 천상의 복의 상태에 진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의 성찬례로, 찬양과 기쁨으로 주일 모여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복에 대한 감사. 앞으로 누릴 천상의 복에 대한 감사. 우리의 예배는 이러한 현재성과 희망에 깊이 뿌리를 두고 미래의 그날이 현재로 침투하도록 하는 통로가 됩니다. 비록 현재는 만질 있는 것들, 소유할 있는 것들이 부족할지라도우리가 이미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믿는 자는 분명 행복할 있다고 오늘 루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가는 이렇게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으로 복에 대한 논의를 끝내지 않고, 우리가 오늘 읽지 않은 뒷부분에 이런 복을 받은 자들이 지켜야 인간 간의 관계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성서가 말하는 복이 균형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 뒷부분을 읽지 않았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남을 판단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라등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된 복이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있는 것처럼, 이제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복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복이 자기 것으로 체화되는 것입니다. 은총은 전적인 선물이지만, 선물을 받을 만한 사람의 책임 또한 강조되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 선언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도 마디로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당위적 명령으로 모두 수렴이 됩니다. 사랑할 없는 사람을 사랑할 , 가난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가치의 전복처럼, 하느님 나라는 순간에 증명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곳에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고 세속의 모든 가치가 전복되는 역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일반적인 복의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러한 복의 상태에 들어간 존재들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복을 우리는 좀처럼 복이라 느끼지 않는다는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소유를 추구하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가짐 대한 부러움이 아니라있음 대한 만족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우리는 굶주리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보다 많이 가지려고 경쟁합니다. 세상을 무탈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복을 하느님께 요구하지만, 정작 십자가의 은총으로 주어진 복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일일 , 우리의 일상과 괴리가 느껴집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러한 삼중축복을 받았다면 우리는 감사함이 넘쳐나야 것이고 원수를 사랑할 힘도 생기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구하기 전에 먼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욕심을 비우며 감사하는 마음. 이것이 루가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행복의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이 감당할 없는 축복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복이 완전히 완성되는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대와 희망을 품고 현재의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매일 감사하며 주어진 실존을 감당할 있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자이고, 믿음이 있는 자가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6 (다해)

 

본기도

정의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불의한 권세를 심판하시며 억울한 이들을 돌보아주시나이다. 비오니, 의로움을 분별하는 지혜와 실천하는 용기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를 땅에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예레 17:5-10

5    야훼가 하는 말이다.
.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     사람을 믿는 자들,
.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     천벌을 받으리라.
6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아,
.     좋은 하나 없으리라.
.     소금쩍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     뙤약볕만이 내려 쬐는 사막에서 살리라.
7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8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     잎사귀는 무성하며
.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 없이
.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9    사람의 마음은 천길 속이라,
.     아무도 없지만
10   야훼만은 마음을 꿰뚫어 보고
.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     그래서 누구나 행실을 따라
.     소행대로 갚아주리라.

 

 

 

성시_시편 1

1    복되어라.
.     악을 꾸미는 자리에 따라 가지 않고
.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않으며
.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2    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     밤낮으로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일이 무엇이랴!
.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으니
.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     제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     의인의 길은 주께서 보살피신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15:12-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일입니까? 13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5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 증인이 되는 셈입니다. 16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없었을 것입니다. 17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19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복음서_루가 6:17-26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 많은 제자들과 함께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과 해안 지방인 띠로와 시돈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사람들이었다. 중에는 더러운 악령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도 고쳐주셨다. 19 이렇게 예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와 누구든지 낫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예수를 만지려고 하였다.

20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것이다.
22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받았다.
25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날이 것이다.
26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