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23. 다해_연중7주일
창세 45:3-11, 15 / 시편 37:1-11, 39-40 / 1고린 15:35-38, 42-50 / 루가 6:27-38
“사랑의 자리”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기억이 사라지는데 행복은 무슨 소용이고 사랑은 또 뭐야.. 나한테 잘해줄 필요 없어! 나 다 까먹을 텐데..”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 중 수진의 대사
2004년에 개봉한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 여자 주인공 수진이 한 대사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로맨스 드라마입니다. 일본 드라마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영화인데 영화가 성공하니 일본으로 다시 역 수출되어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던 영화입니다. 특히 배우 손예진이 ‘수진’ 역으로, 배우 정우성이 ‘철수’ 역을 맡아서 더욱 화제가 됐었지요. 설교를 준비하며 다시 영화를 찾아봤는데 두 배우의 모습은 여전히 풋풋한 모습으로 남아 있더군요.
제가 이 영화를 언급한 이유는 과연 사랑과 기억은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에서였습니다. 영화에서 27살 수진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립니다. 조금씩 자신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지우개”라고 표현했지요. 이런 아내를 사랑하는 철수. 과연 이 둘의 사랑은 가능할까요? 기억이 사라지면 정말 사랑도 사라지는 것일까요? 상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아마도 영화에서 충격적인 장면은 수진이가 한때 사랑했던 직장 상사이자 유부남이었던 “영민”의 등장입니다. 수진은 갑자기 찾아온 영민을 치매로 인해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인 줄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남편 철수를 피해 영민의 뒤로 숨습니다. 이 장면은 아직도 큰 충격으로 제 기억에 남습니다. 현재 남편인 사랑하는 사람은 잊어버리고 과거에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는 수진의 행동. 정말 사람은 기억을 잃으면 사랑도 잊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비약적이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억을 잊으면 한때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은 믿음도 잊게 되는 것일까요? 기억과 사랑, 기억과 믿음은 과연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기억이 없어도 어떤 모종의 친밀감, 낯설지 않은 느낌, 어떤 익숙함 등은 남지 않을까 추측해 보지만, 제가 치매에 걸려보지도 않았고, 또 치매를 앓는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못해서 단지 상상만 할 뿐입니다. 만약 부부가 동시에 치매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과연 두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대하게 될까요? 영화 속 주인공 수진처럼, 과거에 자신에게 아픈 상처를 준 첫사랑은 기억하고 오히려 현재의 남편을 잊게 되는 걸까요?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태어나면서 이미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이 현상의 세계는 단순히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일 뿐. 그래서 인간은 지식과 지혜를 통해 끊임없이 이러한 이데아에 대한 것을 “상기”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 “상기”의 과정이 바로 철학과 학습의 과정이지요.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경험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했습니다. 어떤 소년 노예에게 기하학 문제를 풀게 했더니 그 소년은 정식 교육을 받지도 못했는데 그 문제를 풀었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그 답을 찾는 모습을 보고 앎이란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선재(pre-existence)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억해 내는 과정이라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이를 플라톤은 “아남네시스 ἀνάμνησις”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말로는 “기억 또는 기념, 회상”이란 뜻에 가장 가깝습니다. 물론 아남네시스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차원을 넘어서 과거의 사건을 오늘에 구체적으로 현재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남네시스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오늘의 삶 속에 실제로 체화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다양한 정신질환자들의 임상 치료와 실험을 통해 인간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지만, 인간의 이성과 기억을 넘어서는, 인간에게 “선재(pre-existence)”해 있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정신질환자가 반복해서 꾸는 꿈에서 본 패턴과 유사한 패턴을 어떤 섬의 원주민들이 그린 그림에서 발견하고 그 연관성을 연구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그림을 어떻게 그는 꿈을 통해서 보고 그것을 똑같이 그리게 됐을까요? 요즘과 같은 인터넷의 시대에서는 우연히 검색을 통해 한번 본 것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해 보지만, 이런 경우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집단 무의식”은 모든 인류가 신화적인 방식으로 공유하는 어떤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꿈이나 환상, 그리고 다른 경험을 통해 인지되곤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 깊은 내면에는 인류가 공통으로 축적하고 공유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 알면 알 수록 참 인간은 우주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엄청난 화두를 제시하십니다. 늘 저도 이 부분을 읽을 때면 양심 깊은 곳에서 통증이 유발되곤 합니다. 사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를 사랑도 해보고, 또 미워한 경험도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경험을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 사랑하는 사람이나 현상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부부가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렜던 기억,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 때문에 설레면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적은 것 같습니다. 현재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그러한 설렘이 갑자기 찾아오면 오랜 부부도 그러한 느낌을 따라서 바람을 피우기도 하지요. 그러나 정말 사랑이 이러한 느낌이나 끌림이 전부일까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사랑보다 “정(情)”을 더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에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모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함께 사는 부부도 그러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정” 때문에 또 익숙함 때문에 또 의무감 때문에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각 출근한 후에 하루 종일 서로를 그리워하고 빨리 보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일상에서 사랑은 한 때의 추억이나, 과거에 머물러 있는 어떤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부부간의 관계를 사랑보다는 ‘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정”은 익숙함과 다정함, 편안함과 따뜻함을 뜻하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사랑이 만약 기억에 의존한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에 대한 기억을 둔화시키면 가능할까요? 원수를 용서하는 것도 어려운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 부담스러운 명령입니다. 주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사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욕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에는 그들 앞에서 그들을 향해 어떠한 비난도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들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하셨고, 완전히 온순하셨습니다. 그는 대사제의 심문에도, 빌라도의 심문에도, 병정들의 모욕에도 어떠한 반응이나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침묵과 비폭력, 무저항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고난받는 종’으로서 주님은 철저히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셨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오히려 비극적이고 처량했는데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4
이 말씀은 오직 루가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루가의 특수자료입니다. 물론 루가복음의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정말 역사적 예수의 입에서 발설됐을지 의문을 품는 신학자들도 많습니다.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지만, 이 말은 분명히 원수 사랑을 설교하셨던 산상수훈의 핵심과도 맥이 통하고, 그분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취지와도 뜻이 같습니다. 실제로 그분이 십자가상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도, 그 처형장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그리고 그 주변에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도망치고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루가의 창작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전하는 무게감과 말의 진실성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스데파노 부제도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 이와 유사한 말을 했다고 루가는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핍박받던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루가는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와 사랑으로 대하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초기 순교자들은 이러한 믿음으로 묵묵히 목이 잘리는 순교를 감당했습니다. 미움보다는 용서와 사랑이 인간의 인간성을 더욱 높은 지경으로 고양시키기 때문입니다.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참혹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가며 나치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거부하고 “하느님의 연약한 현존”의 깨달음에 이르렀던 에티 힐레숨의 글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이여, 요즘은 걱정이 많은 시기입니다. 오늘 밤… 눈앞에 인간이 고통받는 장면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어둠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신이여, 미리 보장할 수는 없지만, 당신을 도와 내 기력이 점점 빠져나가는 걸 멈추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점점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즉 당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돕기 위해 당신을 도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지만,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하며, 우리 속에 당신이 계시는 곳을 끝까지 지켜야만 합니다.” 패트릭 우드하우스의 [에티 힐레숨의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 중에서
그녀는 절망 속에서 죽음을 직감하고 이제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돌보실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이제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연약한 현존”을 깨닫고 하느님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혐오와 미움이 넘치는 곳에서 나치와 똑같은 혐오와 미움을 발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 현존의 자리”, 곧 “사랑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악에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포자기도 아니고 두려움에 대한 굴복도 아닙니다. 홀로코스트의 가혹한 시련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의 연약한 현존의 자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것.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두려움에 짓눌림이 아니라 내면의 초연함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하느님의 도움보다는 “하느님의 현존의 자리”를 자기 스스로 지키는 방향으로 순교를 결정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많은 유대인들의 영성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들도 십자가를 지신 주님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자신의 “하느님의 자리”를 끝까지 목숨으로 지킨 것입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루가 6:31
황금률입니다.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지향하는 인간관계의 가장 숭고한 가치입니다. 우리 자신이 사랑받고 싶으면 남도 사랑해 주고, 우리 자신이 잘못한 것을 용서받고 싶으면 남 또한 용서해 주는 것. 그래서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바로 그 당사자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마태 6:12
우리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못했을 때 그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기도문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먼저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도 용서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땅에서 꼬인 매듭을 먼저 풀면 자동적으로 하늘에서도 풀리는 법입니다. 자신이 잘못을 행한 상대에게 용서받음이 진정한 화해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보다는 하느님께만 용서를 구하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점점 더 꼬이고 해결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1 독서로 읽은 요셉의 이야기는 이러한 용서와 화해의 아름다운 예를 보여줍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고, 자신을 이집트에 종으로 팔았던 형제들을 먼저 용서하는 요셉을 봅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넘겼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 45:4~5
그는 형제들이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그 형제들을 먼저 용서하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사랑이 그의 아픈 과거의 기억을 이긴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로가 말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송가를 모두 언급하지 않아도 사랑은 모든 것을 덮고, 모든 것을 감싸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단순히 기억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물론 상대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이 중요하게 작용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랑은 기억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은 기억도 아니고, 감정도 아닙니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플라톤의 “아남네시스”의 개념과 유사하게 주님의 성찬기도에 이를 적용합니다.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1 고린 11:24
우리의 성찬기도는 “성령청원기도(에피클레시스)”로 성령을 간구하고, 성찬제정말씀을 선포하며, 그다음에 예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기억하는 ‘아남네시스’에 대한 고백으로 구성됐습니다. 그런 후에 “송영(Doxology)”으로 성 삼위일체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마칩니다. 이 아남네시스는 단순히 기억과 기념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기억이 하느님의 사랑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기억하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예수와 함께 영원히 기억해 주실 것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호소이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사랑의 실체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 요한 4:16
이는 요한1서 사가가 영지주의를 반박하며 한 말이지만, 이는 사랑의 본질을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는 분명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수난과 희생,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실체화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행태 정의”라고 합니다. 예수의 행위가 바로 곧 하느님의 사랑이란 것이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 기억이 아니라 바로 서로 사랑하는 행위 속에 사랑의 실체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자리”입니다. 에티 힐레숨이 다다랐던 “하느님의 연약한 현존의 자리”. 그곳이 우리 내면에 위치한 “사랑의 자리”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거하는 자만이 결국 하느님 안에 있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남을 용서하고 남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자리에 거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대로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남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뿌리가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의 본질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나쁜 기억도 모두 덮을 수 있는 넉넉함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수준까지 우리 자신이 자라나도록 성령의 은총을 간구합시다. 이러한 사랑을 꿈꾸는 모든 사람이 바로 에티 힐레숨처럼 “하느님을 돕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7주 (다해)
본기도
인자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말과 행실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분열된 이 세상에서 화해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45:3-11, 15
… 3 요셉은 형제들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형제들은 그의 앞에서 너무나 어리둥절하여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4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자, 그제야 가까이 옆으로 갔다.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5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6 이 땅에 기근이 든 지 이태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밭을 갈아 곡식을 거두려면 다섯 해가 더 지나야 됩니다. 7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그러니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라오의 어른으로, 그 온 집안의 주인으로 삼으시고 이집트 전국을 다스리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9 지체말고 어서 아버지께로 올라가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저를 온 이집트의 주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로 내려오십시오. 10 아버지께서는 여러 아들과 손자들을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고센 땅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11 다섯 해 기근이 지나가도록 아버지께서 사실 수 있게 모든 것을 거기에 장만해 놓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거느리시는 식구들과 딸린 목숨이 아쉬운 것 없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성시_시편 37:1-11, 39-40
1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
.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마라.
2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
.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3 주님만 믿고 살아라. ◯
. 땅 위에서 네가 걱정 없이 먹고 살리라.
4 네 즐거움을 주님에게서 찾아라. ◯
.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5 주님께 앞날을 맡기고 그를 믿어라. ◯
. 몸소 당신께서 행해주시리라.
6 햇빛처럼 너의 옳음을 빛나게 하시고 ◯
. 대낮처럼 네 권리를 당당하게 해주시리라.
7 고요하게 주님 안에 지내라.
. 주님만 믿고 있거라. ◯
. 남이 속임수로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마라.
8 화내지 말고 격분을 가라앉혀라. ◯
. 불평하지 마라.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9 악한 자는 망하게 마련이요, ◯
.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땅을 물려받으리라.
10 조금만 기다려라. 악인은 망할 것이니 ◯
. 그 있던 자리를 찾아도 그는 이미 없으리라.
11 보잘것 없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
. 태평세월을 누리리라.
39 주께서 의인을 구원하시고 ◯
. 고난 중의 성채가 되신다.
40 의인들이 주님을 피신처로 삼으니,
. 주께서 도우시고 구해주시며 ◯
. 악인들에게서 빼내어 살려 주신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15:35-38, 42-50
35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6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37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38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하나에 각각 알맞은 몸을 주십니다. …
42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3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44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47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창세 2:7)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50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
복음서_루가 6:27-38
27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29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30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31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32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34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 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36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38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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