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9. 다해_사순1주일
신명 26:1-11 / 시편 91:1-2, 9-16 / 로마 10:8-13 / 루가 4:1-13
“마음의 자리, 유혹의 자리”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로마 10:12
오늘 사도 바울로는 모든 사람들, 남녀노소, 인종과 신분의 차별 없이 주님을 찾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풍성한 복”을 내리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풍성한 복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복을 받고 잘 먹고 잘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복을 갈구하며 열심히 기도도 하고 열심히 일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복신앙에 빠져 모든 종교적 행위를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공동번역이 “풍성한 복”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플루테오 plouteó"는 주로 부를 소유하거나 부자가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물질적 부와 영적 풍요의 맥락에서 모두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축복은 물질적 풍요나 영적 축복과 미덕의 풍부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물질적 소유물보다는 영적인 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성과 지상의 물질적 부유함의 유한성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이 풍성한 복을 말할 때 어느 쪽에 방점을 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가 이를 하느님 구원과 연관시킨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앞부분에 믿음과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풍성한 복”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구원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를 “마음으로 믿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로마 10:10
“마음”이란 헬라어 “카르디아 καρδία”는 사람의 “심장”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장학을 카디올로지(cardiology)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이 카르디아는 사람의 마음, 의지, 감정, 도덕적 중심을 아우르는 내면의 자아를 지칭하는 은유로 사용됩니다. 그것은 신체 기관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정체성과 영적 삶의 핵심을 나타냅니다. 심장은 생각, 감정, 의사 결정의 자리로 여겨지며, 사람의 진정한 성격과 의도를 반영합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로는 이 카르디아를 단순히 심리적, 감정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과 영적 중심으로 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감정뿐만 아니라 생각, 의지, 신앙, 삶 등 전 존재적 개념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감정적 동의를 넘어서는 말이지요. 그렇게 전 존재적으로 하느님을 믿을 때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구원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태오복음 22장 37절에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하셔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음은 헬라어 카르디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 “마음”은 곧 신앙과 구원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태 5:8
전 존재적, 전 인격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곧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마음의 자리에서 결국 하느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자신의 전 삶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이전과 다른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마음으로 믿고 전인격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데, 실제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절대 녹록치 않습니다. 모든 것이 만사형통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자리는 또한 많은 유혹의 자리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충만한 상태가 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로가 말한 마음의 자리에서 예수께서도 하느님을 뵌 것입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신 예수님조차도 이 마음의 자리에서 유혹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복음서는 광야라고 기록했지만, 그것은 실재 광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유혹의 자리가 된 인간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예수께서 40일 내내 유혹을 받으셨다고 기록했고, 예수어록을 따른 루가와 마태오는 40일 단식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분이 유혹을 받으셨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광야는 철저히 혼자가 돼야 하는 자리입니다. 하나의 인격만이 그곳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외로움과 고독의 자리이고, 배고픔과 고통의 자리이며, 육신과 감정적 동요가 심한 자리입니다. 마음의 자리가 유혹의 자리가 되는 순간 온갖 유혹들이 그 자리를 헤집고 들어옵니다. 루가는 예수께서 받으신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혹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세 가지가 아니라 숫자 삼은 완전수로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의미합니다. 유혹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배고픔을 충족시키라는 “육체적 욕구”,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교만과 명예”,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준다는 “권력과 탐욕”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욕망이지요.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모두 풍족하게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점을 사탄은 교묘하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충족하라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도 이러한 유혹을 받으셨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신앙인들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그 유혹의 치밀함과 치명성이란…
남보다 더 갖고 싶고, 남보다 더 존경받고 싶고, 남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구.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 자신이 남보다 더 잘났다는 생각, 원래 자기보다 자신을 더 높게 보이도록 포장하고 과장하려는 욕구… 이러한 모든 욕망의 쓰레기들이 “풍성한 복”을 받아야 할 우리 마음의 자리에 놓이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유혹했던 똑같은 사탄의 유혹에 휘둘리게 되는 것입니다. 전 존재적인 믿음으로 충만해야 할 우리 마음의 자리가 격정적인 욕망의 각축장이 됩니다. 이래서 우리는 불안증, 공황증, 분노와 격분, 미움과 질투의 늪에 빠집니다. 일단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나면 자유의지와 결탁한 그 위장 연대는 더욱 굳건해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뿐이라고 오늘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유혹 사화에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세 가지나 인용하셨고, 심지어 마귀도 시편 91편을 두 번이나 이용했습니다. 즉 말씀과 말씀의 싸움이었습니다. 말씀을 예로 들어 자신의 유혹을 정당화하려 했던 사탄의 치밀함을 보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예수의 일을 비난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사들의 표현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인 자신들은 “성별되었고 거룩하다”는 전제를 하면서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이지요. 사탄은 하느님의 천사가 당신을 지켜 준다는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를 유혹했습니다. 악이 선을 가장할 때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위성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사람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난은 자기 합리화라는 사탄의 유혹의 결과입니다. 사탄의 유혹과 손을 잡는 순간 세상적 욕망은 만족되는듯 싶지만, 결국 카르디아, 마음은 완전히 하느님의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 끝은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과 위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를 합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자신이 받은 “풍성한 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깨닫지 못하고, 사탄과 하느님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 전 존재의 중심인 ‘마음의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이면서도 동시에 ‘유혹의 자리’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양단간에 결정해야 합니다. 여행을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 여행할 나라의 정보를 찾고 미리 공부하며 계획을 세우는데, 하물며 “풍성한 복”을 받기 위한 이러한 신앙의 여정에서 말씀을 읽지 않다는 것은 사탄의 유혹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백전백패는 불 보듯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순절 아침기도 시간에 “말씀 묵상”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는 것. 이것이 회개를 위한 첫 단계이고 이 사순절의 순례길에서 우리가 매일 반복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이 사순절에 하느님과의 “놀라운 만남”을 말씀으로 준비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리십니다. 물론 선택은 늘 여러분의 몫입니다. 아울러 말씀을 읽기 위해 말씀 필사를 추천드립니다. 말씀을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보다 직접 필사하며 읽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필사하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말씀을 아로새기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진리를 찾으려면, 좋은 문장을 반복해서 써라.”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쁘시더라고 매주 수요성서통독에도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3년을 해왔는데 참여율이 참 저조합니다. 이렇게 이 사순절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져서 여러분이 하느님과 좀 더 친근한 관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사순1주 (다해)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광야의 시련을 거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 세상 광야를 지나는 동안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 마침내 약속하신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신명 26:1-11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잡게 되거든 2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받은 그 땅에서 너희가 거둔 각종 햇곡식을 떠내어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으로 가거라. 3 너희는 당직 사제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느님 야훼께 아룁니다.’ 4 사제가 그 광주리를 네 손에서 받아 너희 하느님 야훼의 제단 앞에 놓으면 5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아래와 같이 아뢰어야 한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6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7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살피셨습니다. 8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9 그리하여 우리를 이 곳으로 데려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런즉 야훼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햇곡식을 이제 제가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놓고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엎드려 예배 드리고 11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
성시_시편 91:1-2, 9-16
1 지존하신 분의 거처에
. 몸을 숨기고 ◯
.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 머무는 사람아,
2 주께서 네 피난처시요, 네 요새이시며 ◯
. 네가 의지하는 하느님이라고 말하여라.
9 주님을 너의 피난처라 하고 ◯
⋅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요새로 삼았으니,
10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리라. ◯
⋅ 어떤 재앙도 네 집을 가까이 못하리라.
11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여 ◯
⋅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12 행여 너 돌 뿌리에 발을 다칠세라 ◯
⋅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고 가리라.
13 네가 사자와 독사 위를 짓밟고 다니며, ◯
⋅ 사자새끼와 살모사를 짓이기리라.
14 나에게 부르짖는 자를 내가 건져 주며 ◯
. 나의 이름을 아는 자를 내가 높여 주리라.
15 나를 부르는 자에게 대답해 주고,
⋅ 환난 중에 그와 함께 있으리니 ◯
. 나는 그를 건져주고 높여 주리라.
16 그로 하여금 마음껏 오래 살게 하고 ◯
.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10:8-13
… 8 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신명 30:14”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9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11 성서에도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칠십인역 이사 28:16”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2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요엘 2:32”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복음서_루가 4:1-13
1 예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허기지셨다. 3 그 때에 악마가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 하고 꾀었다. 4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칠십인역 신명 8:3’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주며 6 다시 말하였다.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가 받은 것이니 누구에게나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소. 7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8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 6:13-14’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9 다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시오. 10 성서에 ‘하느님이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너를 지켜주시리라. 시편 91:12’ 하였고 11 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손으로 너를 받들게 하시리라. 시편 91:12’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2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 칠십인역 신명 6:16’라는 말씀이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와 회개”_2025.3.23. 다해_사순3주일 (0) | 2025.03.23 |
---|---|
“십자가의 원수 대 하늘의 시민”_2025.3.16. 다해_사순2주일 (0) | 2025.03.16 |
“위선과 회개”_2025.3.5. 다해_재의 수요일 감사성찬례 설교문 (0) | 2025.03.05 |
“사악한 보물 창고”_2025.3.2. 다해_연중8주일_설교문 (0) | 2025.03.04 |
“사랑의 자리”_2025.2.23. 다해_연중7주일 (0) | 2025.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