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선 75

[수요 1분 묵상] "손을 펴라." 마르 3: 5

“손을 펴라.” 마르 3:5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움켜쥔 것은 우리의 아집이고, 욕망이며, 질투이고, 편견입니다. 움켜쥔 손은 오그라든 손입니다. ‘오그라든 손’은 주먹밖에 쥘 수 없어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움켜쥔 손은 남을 공격하는 데 사용됩니다. 움켜쥔 손과 ‘오그라든 손’은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손을 펴라.” 주님의 명령에 ‘아멘’하는 자 만이 굳은 손이 펴지는 것입니다. 손을 펴고 나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오히려 안식일을 어겼다는 비난처럼 우리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손을 펴라.”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자신의 손을 펴시기 바랍니다.

[수요 1분 묵상] 하느님의 부르심 - 마르 1:31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마르 1:31 베드로는 “베싸이다” 출신입니다.(요한 1:44)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묵은 가파르나움의 집은 아마도 처갓집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위와 사돈 청년이 동시에 그 집에 묵은 데다가 예수의 일행까지 그곳을 본거지로 활동을 시작했으니 장모는 딸의 앞날이 걱정이 되어 병이 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수입 없이 앞으로 살아갈 일도 막막했을 테니깐요. 그러나 오늘 예수께서는 장모의 열병을 계기로 장모 또한 하느님의 사역에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열병이 나아 자신의 집 모든 손님들을 기쁜 마음으로 시중들었다고 복음서는 기록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분의 뜻을 알기 전에는 참 무모하고 힘..

[수요 1분 묵상]사랑의 머무름 - 1요한 3:14b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1요한 3:14b 주님께서 사랑을 표현하시는 방법은 늘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나누고, 장소를 공유하며,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별도로 기도를 위해 한적한 곳을 찾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방법도 늘 “나를 따라오너라” 또는 “와서 보라”(요한 1:39)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초대은 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누구와 그런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지요? 코로나 때문에 더욱 만남이 어려운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따듯한 통화라도 해보시면 어떨까요? 날이 추우니 더욱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떠오르네요. 평안한 저녁시간 보내시길 빕니다.

[수요 1분 묵상] '작은 자들에 대한 아픔'-마태 2:18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 마태 2: 18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신정론’을 떠나 부모들과 모든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아픔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인간 실존의 어두운 그림자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평생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까지 지고 가실 아픔이었습니다. 인간의 깊은 고통에 대한 그분의 이해는 가장 ‘작은 자들’에 대한 아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아기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신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고통받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그러한 공감의 능력과 아..

[수요 1분 묵상] 아나윔의 희망-루가 1:53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1:53 저녁기도 때 자주 부르는 성모송가는 ‘아나윔, 가난한 자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이분법적 사회적 구조에서 늘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었던 아나윔들이 이제 희망을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한 여인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빛 가운데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육신을 입어 우리에게 오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빛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이시기에 마리아는 순종과 감사밖에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나윔들의 간절한 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케테 콜비츠_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

[수요 1분 묵상]거두는 사람의 삯-요한 4:36

“거두는 사람은 이미 삯을 받고 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알곡을 모아들인다. 그래서 심는 사람도 거두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요한 4:36 주님께서는 자신의 선교의 열매를 몫으로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자신을 보내신 분과 자신이 함께 나누는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신 것처럼 성자께서는 우리 사제들을 이러한 기쁨에 동참하도록 부르시고 파송하셨습니다. 사제의 소명은 이러한 주님의 기쁨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계재 성직자의 성소를 위해 기도하며, 주님 안에 있는 그 기쁨이 우리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2021.12.24. 대림4주/성탄1일전 금요일 묵상

2021.12.24. 대림4주/성탄1일전 묵상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아리따운 노래를 글 잘 쓰는 선비의 붓끝으로 엮어 우리 왕에게 바칩니다.” 시편 45:1 오랜 기다림의 대림절 끝에 드디어 우리는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느님의 은총이 온누리에 가득합니다. 코로나로 힘들고 지쳤지만, 그래도 아기 예수의 오심이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Merry Christmas!!!

2021.12.23.대림4주(성탄2일전) 목요일 묵상

2021.12.23.대림4주(성탄2일전) 목요일 묵상 “상처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터진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낱낱이 이름을 붙여주시는 분” 시편148:3-4 오늘 시인의 상상력은 저 광대한 우주에 닿아있습니다. 바다의 모래알보다 많은 창공의 별들을 우리는 감히 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학으로도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각 별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은 말해서 뭐합니까? 하느님의 창조와 전지전능하심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명확한 실존적 경계를 설정을 합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이 둘의 존재적 실존은 원래부터 다릅니다. 이 둘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 편에서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

2021.12.22. 대림4주(성탄3일전) 수요일 묵상

2021.12.22. 대림4주(성탄3일전) 수요일 묵상 ”바닷물이 우짖으며 소용돌이치고, 밀려오는 그 힘에 산들이 떨지라도, 만군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시편 46:3 바다를 요동치게 하는 폭풍도 산을 뒤 흔드는 지진도 오늘 시인을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만군의 주이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가 아무리 우리 삶을 휘감아 흔들고 경제적 어려움이 우리를 짓눌러도 우리는 결코 흔들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임마누엘’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피난처로 삼는 모두에게 하느님의 평강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임마누엘의 기..

2021.12.21. 대림4주(성탄4일전) 화요일 묵상

2021.12.21. 대림4주(성탄4일전) 화요일 묵상 “풀밭에 내리는 단비처럼, 땅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그 은덕 만인에게 내리리니…”시편 72:6 성탄이 다가오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코로나로 인해 무척 어둡고 힘듭니다. 안 그래도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주님, 아기 예수님께서 오시던 그 밤도 결코 평온한 날은 아니었을 겁니다. 더럽고 추운 마구간에서 가난한 여인에게서 나시고, 소외받는 목동들을 통해 찬양을 받으신 주님. 인간의 고통과 가난이 무엇인지 아시는 당신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왕이신 당신께 기도합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회복시켜주시고, 절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번 성탄이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기쁨의 ‘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