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그림이야기

존재의 근원에서 퍼 올린 풍경_임현진

James Chae 2011. 9. 2. 12:19

 

 

존재의 근원에서 퍼 올린 풍경_임현진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채창완

 

 

EPHESIANS 4

 

자연을 주제로 한 산수화가 일찍부터 발전했던 우리와 달리 서양에서 풍경화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의 북유럽에서부터였다. 남유럽에 비해 날씨와 자연 환경의 변화가 극심했던 북유럽에서 그러한 자연을 보고 과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자연의 위협(?) 앞에 유럽인들은 자연스럽게 ‘생존’이라는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형성되기까지 그들은 자연을 늘 경이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지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했다. 이것은 아마도 풍경화가 유럽에서 늦게 등장하게 된 많은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이러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 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간 이성이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자연재해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은 고대로부터 존재한 ‘도시’라는 생존 시스템을 더욱 발전시켰고, 아울러 산업기술의 발달은 자연의 재해를 극복하고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리란 믿음을 그들에게 안겨주었다. 더욱이 과학의 발달은 예측 불가능하던 대자연의 모든 현상을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하다는 희망을 열어주어 유럽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간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 자에서 군림하는 자로 점점 변모해 갔고, 인간 주체성이 성립되면서 자연은 하나의 ‘객체’, 또는 ‘대상’으로 그 위치가 전락되었다.

 

GENESIS 1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서구 미술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을 지배할 것 같은 두려움과 경이의 존재가 아닌 아주 낭만적인 존재로 ‘표현 가능’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이 자연을 분석하고 수학적으로 증명해가는 것 같이, 화가들은 마치 자신의 붓 놀림의 기술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자연을 ‘대상’으로 ‘객체화’하여 하나씩 자신의 화폭 위에 ‘정복’해 나갔다. 근대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정복’해 가는 시기도 이 무렵부터였으니, 서구의 ‘정복’은 동양의 식민지를 비롯하여 ‘자연’이라는 식민지에까지 확장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낭만적인 서양의 풍경화에는 무서운 의미가 숨어있다.

 

 

ROMANS 1_캔버스에 유채_650×194cm×5_2006

 

 

ROMANS 1_부분

 

 

 

ROMANS 1_전시장면

 


자연을 ‘대상’이나, 인간 주체에 대한 객체로 생각하는 서양인들의 이러한 사고에는 “자연을 정복하고 생육하며 번성하라는” 기독교적인 전략이 들어있다. 그러한 가르침대로 서양은 자연을 ‘정복’했고 더 나아가 동양을 ‘정복’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의 동양에 대한 편견을 말한 바 있는데 결국 그 편견은 자연에 대한 서양인의 태도에도 적용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릴’ 사명과 정당성이 부여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자원을 얻기 위해, 개발이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그들은 자연을 마구 훼손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아프리카와 동양 식민지에 대한 서구의 착취나 자연에 대한 착취는 결국 다를 바가 없다. 그 결과 오늘날의 생태계의 위기는 그들의 서구 문명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PSALMS 27_캔버스에 유채_117×80cm_2006

 

 

그러므로 낭만주의 풍경화에서 자연은 늘 인간에 대한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화가에게 자연은 정복되어야 할 그리고 표현되어야 할 ‘대상’ 또는 ‘객체’일 뿐이다. 대자연을 작은 화폭에 담으며 느꼈을 화가의 감흥은 정복자의 성취감과 다름 아니다. 너무 비약적인 말로 들리는가? 실재로 17,18세기의 서양 풍경화에는 필요 이상의 테크닉의 과시로 가득하다. 과장된 구름, 과장된 나무, 과장된 빛 등. 더욱이 그들이 자연을 화폭 위에 옮겨 놓는 행위는 ‘소유’하고자 하는 의도와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풍경에는 늘 크기의 비교에서, 인간은 작고 왜소하게 그려졌고, 이에 비해 자연은 웅장하고 거대하게 표현됐다. 대자연을 찬양하고 높이기 위한 의도일까? 물론 그런 의도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는 자연의 숭고함을 표현하기 위한 ‘종교적인’ 의도와 관련한다. ‘숭고미’를 통해 대자연의 창조주를 연상하게 하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전략은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신심을 자극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조주로부터 부여 받은 인간의 사명을 인간에게 연상케 하고 또한 정당케 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또한 있다. 절대자가 ‘보시기에 좋게’ 그리고 인간이 ‘보기에 좋게’ 라는……. 어떻게 하나님이 시각을 통해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의 ‘신인동형’의 이미지가 여기에 반영된다. 결국 자연은 철저히 절대자와 인간을 연결하는 ‘대상’으로, 그리고 ‘도구’로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피조물 중의 하나인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당연히 다른 위치, 즉 ‘주체’의 자리를 확보한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말이다.

 

 

PSALMS 139_캔버스에 유채_110×50cm_2006

 

 

임현진의 작품도 풍경을 주제로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풍경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서양의 풍경화와 전혀 다르다. 얼핏 보면 그 차이를 찾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풍경은 ‘낭만주의’적인 것과 분명 거리를 두고 있다. 물론 그의 작품의 전체 주제는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이다. 신앙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시편27편 8절의 구절에 이어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을 로마서 1장 19~20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임현진 작가는 자신의 신앙을 대자연 속에서 표현하려고 했다. 이러한 점에서는 낭만주의와 유사성이 있지만 그는 절대로 자연을 낭만주의 화가들 같이 ‘대상화’하지 않는다.

 

 

TITUS 2

 


임현진의 자연은 이미 ‘대상’을, 즉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 방식을 떠나있다. 사진과 영화에서 모더니즘과 고전적 재현, 그리고 아우라의 파괴를 보고 이를 칭송했던 발터 베냐민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자신의 그림에 사진이라는 매체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임현진은 자신의 작품을 ‘대상’과 ‘재현’이란 모더니즘적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의 작품의 풍경은 모두 사진의 이미지를 다시 복제(?)한 것이다. ‘재현’이란 표현 보다 ‘복제’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의 그림이 이미 사진을 통해 ‘재현’된 ‘대상’을 다시 ‘복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이런 관점에서 ‘재현의 복제’이다. ‘재현의 복제’는 보드리야르의 표현으로 바꾸면 ‘복제의 복제’이다. 여기서 자연이란 ‘대상’은 철저히 사라진다. 그렇다면 임현진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풍경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작가의 표현을 증거 삼아 다른 말로 하면 ‘창조자의 얼굴’인 것이다.

 

 

 

TITUS 2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06

 


‘자연에 대한 정복의 가치’가 사라진 곳에 임현진은 ‘신앙적 가치’를 집어 넣는다. 그러나 그 ‘가치’는 더 이상 자연을 객체화하고 ‘대상’의 위치에 놓아두지 않으며, 피조물로서의 자연이 인간과 나란히 서는 지점에 놓이게 한다. 그의 그림은 멀리서 전체를 보면 풍경의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가까이 다가가 부분들을 보면 더 이상 풍경은 사라지고 만다. 구름의 부분은 마치 실크의 주름과 같으며, 묘한 몽환적 느낌을 준다. 또 대지를 덮고 있는 안개 또한 그러하다. 안개는 대지와 구분이 없이 연결되어 있다. 어떤 것이 땅이고, 어떤 것이 안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하늘은 평면으로, 구름은 주름같이 아주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둘 사이의 구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여기서 자연의 각 부분들의 경계는 존재론적 의미만 남고, 결국 각각의 객체화 또한 사라진다. 낭만주의 작가들과 같은 묘사력이 없어서 임현진 작가가 이러한 표현을 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그림에는 존재의 통전(通電)적인 연결이 있다. 마치 전류가 전도체를 따라 흐르듯 그의 그림에서 모든 존재는 상호간의 흐름 속에 있다. 아마도 그 흐름은 임현진이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절대자에까지 ‘흐르는’ 것이리라.

 

 

 ISAIAH 51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06

 


엑카르트는 창조는 “흘러 나옴과 흘러 들어감”이라고 정의 했다. 창조주로부터 흘러나온 피조물은 다시 창조주로 되 돌아 흘러 들어간다. 이러한 순환은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라는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절대 보이지 않는 존재인데 이는 단지 은유적 표현인가? 아니다 엑카르트는 다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한다. 자연에는 창조주의 말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세계이므로 이는 당연하다 하겠다. 피조세계의 ‘재료’는 결국 말씀인 것이다. 이는 묘사되고 표현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미 묘사된 말씀은 더 이상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발설되면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는 말씀이다. 모든 피조물은 이것을 증거한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임현진의 작품 속에는 이러한 메시지가 분명 담겨있다.

 

 

TITUS 2

 


그러므로 대상과 재현을 떠난 임현진의 풍경은 존재의 근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대상으로부터 자유 하다는 것은 인간이 중력으로부터 자유 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임현진의 작품에서는 실크 같은 가벼움과 자유로운 공기가 느껴진다. 부드러운 저채도의 색감 또한 이러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하는 요소이다. 그러한 온화하고 부드러운 수묵화적 느낌은 더 이상 인간을 제압하거나 신의 창조를 자랑하려는 의도로 비춰지지 않는다. 자연이 늘 창조주 앞에 겸손하듯이 그의 그림의 자연 또한 그러하다. 그의 그림에서 땅과 안개와 빛과 하늘 그리고 구름의 만남은 더 이상 구분하고 분류하는 인식론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대지의 나무와 땅과 풀들은 이미 그의 그림에서 안개와 하나가 된다. 그의 그림에 인간의 존재는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감 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피조물의 ‘존재의 근원’에서 우리 인간은 자연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는 대상도 우리에게 착취 당할 대상도 아니다. 이 세계에서 함께 공존하며 ‘존재의 근원’으로 ‘흘러 들어갈’ 존재인 것이다.

 

 

 

[작가 소개]
임현진 (LIM HYUN-JIN)
성신여자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진흥아트홀의 ‘2006년 뉴 아티스트’에 선정되어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라는 제목으로 그의 첫 개인전을 가졌다. 작가는 ‘2005 우수청년작가전-존재와 표상’ 및 ‘제11회 대한민국 신진작가 발언전’ 등에 선정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획전, 단체전에 참여하여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은바 있다. 평면회화의 침체기에 새로운 기법의 평면회화로 자신의 세계를 펼쳐가는 작가의 앞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