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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EY, 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_이정구신부 사진전

James Chae 2011. 9. 2. 23:15

 

 

 

TURKEY, 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

 

 

채창완

 

"이름들은 개별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작은 이야기 속에 삽입되어 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번 사진전의 작가 이정구는 신부이면서 또한 신학자로서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친다. 그의 관심 분야는 ‘미학적 신학’이다. 미학적 주제들을 신학적 담론 속에서 풀어가는 작업을 그는 오랫동안 해왔다. ‘미학적 신학’이란 말이 오늘날 우리 귀에 생소하지 않은 것은 그의 노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가 늘 관심을 갖는 것은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가 가지는 신학적 의미들에 그는 늘 집중해왔다. 이러한 그의 관심만큼이나 그는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대해 일반 작가들과 다른 또 다른 관점을 자연스럽게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그의 그 동안의 노력이 가시적인 ‘물리적 산물’로 나타난 것이다. ‘글’이 아닌 ‘이미지’를 통한 그의 이번 행보는 ‘신학 = 글’이라는 그 동안의 통념을 ‘신학 = 이미지’로 바꿔 놓는다. 이를 통하여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지화된 신학적 이야기들일 것이다.

 

 

 

 


지난 2월 그는 터키의 이스탄블과 에베소, 카파도키아, 꼬냐 등을 두루 여행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이질적 특성들이 서로 얽혀있는 그곳의 문화를 접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는 결코 그 속에서 후자를 배척하면서 전자 만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제시한 “Turkey”라는 고유명사에 주목하게 된다. 물론 그가 제시한 그 ‘이름’에는 이미 많은 다른 이름들이 내포돼있다. '이스탄불', ‘아야(하기아)소피아’, ‘미나렛’ , ‘에베소’,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과 아이들의 이미지들, 터키의 낯설고 광활한 풍광…… 그의 사진 속에서 우리는 비록 알지 못하지만 분명 저마다 ‘고유명사’를 갖고 있을 다양한 이미지들을 본다. 

 

 

 

 

그러한 각각의 ‘이름’들을 가진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Turkey’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중세 유명론 논쟁 처럼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이름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리오타르는 말한다. 그 이름들은 결코 개별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작은 이야기 속에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 속의 이미지들은 각각의 이름들로 하나의 이름을 형성하며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온다. 그 이미지들은 각각 개별적이지만 동시에 결코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심지어 그가 보여주는 모스크와 성당의 이질적 두 종교의 이미지 조차도 어떤 ‘통일성’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통일성’을 갖게 하는 기제가 바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러한 기제를 통해 ‘Turkey’라는 이야기를 풀어간 것이다. 서로 관계 없을 것 같은 이미지들은 ‘Turkey’라는 이야기 속에서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제시한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고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도록 작가에 의해 초대되었다. 주어에 서술어를 더하고 접속사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Turkey’라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열어 놓은 그의 이야기 속 ‘공간’이며 이는 신학적으로 ‘에큐메니즘’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칫 한 신학자의 성지순례로 끝났을 지도 모를 그의 여행이 오늘 이런 전시회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은 기획자의 입장에서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전시회 기획 단계에서 전해들은 이동석신부의 안타까운 소식은 이번 전시회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전시회가 투병중인 이동석신부에게 조그마한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기꺼이 작품을 준비해주신 이정구 신부와 소리 없는 많은 도움의 손길들에게 지면으로 감사의 마음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