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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속의 일치와 보편성_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이가'에서

James Chae 2011. 9. 3. 01:52

 

 

'다양성 속의 일치와 보편성'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채창완

 

 

화려하지만 왠지 낯선 이질적인 교회 양식들, 이 지상에서의 천국을 보여 주듯이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앞 다퉈 지어지는 교회당들, 웅장하고, 사치스러우면서 화려한, 그러나 조잡함을 금할 수 없는 교회당들 이러한 교회당에서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교회가 가시적인 건물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감하는 사실이지만 아직도 한국 교회는 외형적인 요소에 너무나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 각 교회들은 자신들의 정통성만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교리, 교회, 신학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자신과 다르면 가차 없이 갈라서거나 파문을 자행하기도 한다. 어디에도 현대 교회들 속에서는 포용성의 여지를 찾을 수가 없다. 가톨릭교회와 비 가톨릭교회의 단절의 결과는, 모두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서로의 교회가 완전히 남남이 된 것이다. 마치 다른 종교인양 서로를 얘기하고 있다. 서로간의 연합을 위한 노력은 아직도 미미한 상태이다. 결국 이 지상의 교회들은 그들이 주장하는바 '단일성' '보편성'을 잃어버린 지 벌써 오래됐다.

 

그러한 원인은 현대 교회의 올바른 교회관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특히 한국교회는 이점에서 그 문제성이 더욱 심각한데). 지상의 교회가 천상의 교회를 대표한다는 생각, 그래서 최상의 인위적인 권위를 가져야 하고 그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나 사제는 또 다른 권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교회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고, 교회들의 경우는 갈라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항했던 마르틴 루터가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본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 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이 교회관의 부재의 시대에서 올바른 교회관은 과연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 지상의 교회의 올바른 이미지는 무엇일까?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을 이룰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질문에 매우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먼저 교회의 근원과 본질에 대하여 성서를 근거로 제시하고, 에클레시아, 즉 하느님의 백성, 성령의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기본 구조를 근거로 참 교회의 특징을 얘기한다. 이 참된 교회의 특징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모두 동감하는 바,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그리고 '사도성'이다. 이러한 이론을 전개하는데 그는 양쪽 교회들의 상호 화해를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다. 어느 한쪽의 편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역력하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 분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교종직' 문제에 대해서 책의 말미에 언급하고 있는데, 성서를 근거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지만, 이는 실천적인 대안이기 보다는 이상적인 대안에 머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나는 이 책의 다양한 내용 중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몇몇 대목들을 요약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한스 큉은 '교회는 개개의 개인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며 전체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이는 무교회주의자들에 대한 경계로 여겨진다.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개인의 구령, 즉 각 개인의 죄와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만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 구성된 백성의 공동체 전체의 구원이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심판 때 홀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 다음을 보자.

 

'하느님의 부름은 신앙을 포함한 개인의 모든 행위에 선행하고 하느님의 온 백성을 상대로 하므로, 신자 개인은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존립하며, 나아가 각 개별 공동체도 교회라는 한 공동체 내에서 존립한다.'

 

공동체 전체의 구원이라면 한 개인의 잘못으로 또는 한 개인의 의로서 전체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여기서 한스 큉도 교회조직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은 개인을 부르신 것이지 공동체를 부른 것이 아니지 않은가? 개인 개인이 모여 결국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마치 벽돌이 모여 집이 지어지듯이 다음 내용은 다른 장에서 그가 개개인에 대해 얘기한 대목이다.

 

' 교회는 결코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의 결단을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교회는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에 의존한다.'

 

교회가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에 의존한다면 결국 교회는 인간 개개인에 기초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아닌가? 성령에 대한 그의 견해는 개인에 머문다.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활동은 교회 내의 개인을 향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와 성령이 개인의 영역에 속한다면 교회란 결국 개개인이 모여 이룩된 신앙인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한스 큉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지만 조직화된 전체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한스 큉이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을 수 없다. 나는 벽돌 하나하나가 모여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결국 교회의 기초는 구원 받은 개개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개인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한 기초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닐까? 문제는 교회의 비중을 개개인에게 두느냐 아니면 공동체에 두느냐 일 것이다. 내 자신도 이 부분에 대해 다시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음은 그가 주장하는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모두 동의하는 단일성, 보편성, 거룩성 , 사도성의 '참된 교회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순수한 복음과 진정한 세례와 뜻있게 거행되는 주의 만찬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단일성, 성성(聖性),보편성, 사도성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며 한스 큉은 이에 대한 질문을 제시한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다양성 속의 단일성'이다. '하느님의 부름이 각양이고 성령의 은혜가 각색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역할이 각종이다.' 또 획일화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획일적인 예배 형식도 획일적인 교계제도도 획일적인 신학체계도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는 다양하다. 신학도 다양하다, 그리고 교회 질서도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성을 교회들이 인정하고 포용한다면 교회의 단일성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한스 큉의 견해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전제조건은 '모두가 같은 하느님, 주님, 성령과 같은 신앙을 가지려 하고 제각기 고유한 하느님, 주님, 성령과 신앙을 가지려 하지는 않는 한' 이다.

 

다소 이상적이긴 하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문제이다. 교회의 단일성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개신교 교회간의 문제는 현재 더욱 심각한 실정이다. 한 주님, 한 하느님을 섬긴다는 교회들이 마치 다른 주님, 다른 하느님을 섬기는 것 같이 자신들 만의 정통과 신학과 교회의 정당성만을 주장하고 있으니 현대 교회의 '단일성'은 좀처럼 해결될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

 

'교회의 보편성' 문제에서 한스 큉은 매우 재미있는 내용을 제시한다. 먼저 '모든 교회는 직, 간접적으로 가톨릭교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러한 가톨릭교회와 비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교회의 모녀관계'로 설정한 것이다. 물론 ''인 비 가톨릭교회는 '어머니'인 가톨릭교회로 복귀할 수 없고, 반면 그 '어머니'도 그 ''에게 더 이상 수위권을 요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복음적 가톨릭교회'를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음은 그의 이러한 주장의 요지이다.

 

1)      교회들의 일치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완전한 보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별 교회들의 역사적 기원과 역사적 상호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2)     '가톨릭'이 아닌 교회들은, 직접, 간접으로 그들이 유래한 '가톨릭'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가톨릭'과 화해하지 않으면, 교회의 필요한 단일성도 보편성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3)     '가톨릭'이라는 교회는, 직접, 간접으로 자기에게서 유래한 교회들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그들과 화해하지 않으면, 교회의 필요한 단일성도 보편성도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근시안적, 배타적 '프로테스탄트 사상' 대신에, 혼란, 산만한 '가톨릭 사상' 대신에, 복음에 중심과 기초를 둔 '복음적 가톨릭성'을 그는 주장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나 비 가톨릭교회 모두 현재 '단일성' '보편성'의 교회의 중요한 본질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서로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들 교회들의 에큐메니칼한 노력들도 모두 무효가 될 위험이 크다.

 

다음은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의 사도성'에 대한 내용이다. 그의 주장의 요지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사도들의 사도성은 역사적으로 일회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사도적 계승'은 바로 '사도적 사명'의 계승을 말한다. 사도는 죽었어도 이 '사명'은 계승되는 것이다.   '사명' '사도적 봉사'를 통해 계승된다. 누가 이 사도적 사명을 계승하는가? 바로 교회이다. 사도적 봉사 없이는 사도적 사명과 권한과 권위를 확신 할 수 없다.'

 

그는 '모든 교인이 곧 사제이다'라는 '일반 사제론'을 편다. 마르틴 루터의 '만인 사제직론'과 매우 유사하다. 사제직은 '봉사'의 자리이지 '권위'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자는 철저히 남을 섬기는 자이어야 한다. 즉 남을 위한 봉사자가 돼야 한다. 이 봉사의 뿌리와 목표는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제직은 사랑의 봉사직인 것이다. 교회 내의 사제직은 봉사의 조직에 의한 분류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 가톨릭교회의 '교종직'은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한스 큉은 역사적으로 교종직이 서방 교회의 일치에 끼친 업적을 인정하면서 또한 그것이 결국 서방 교회의 분열의 원인임도 인정한다. '교종직'의 봉사 수위권은 성서에 기록된바 비성서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교종직의 '봉사 수위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수위권'에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를 시도한다. 베드로의 '봉사'가 역사 속에서 '권력'으로 변한 것을 지적하면서 '지배적 수위권에서 봉사적 수위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의 포기'없이는 그리스도교회의 일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을 우리에게 상기 시킨다. '가장 높은 자는 낮은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과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김으로써 섬김의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권력'의 포기를 얘기한다. 그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세 가지 약속과 더불어 베드로의 세 가지 유혹과 실수도 함께 언급함으로써 겸손하게 봉사적 수위권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교종직의 지배적 권위를 봉사적 권위로 스스로 바꿀 수 있겠는가? 나는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항상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밑 뚫린 물동이 같이 부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나는 교회들, 특히 한국 교회들의 문제를 이러한 '인간 욕망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만의 교회, 자신들만의 교리, 자신들만의 신학을 내세우며 결국엔 '권력' ''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여러 교회들의 이권이 있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자신들의 이권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무교회 주의자들이 생겨나게 되고, 교파 간에 분열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고, 또 다른 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대한 매력을 상실하여 교회 문턱을 넘어오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것들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각 교회, 각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것이다. 교회가 지난 16세기에 '단일성' '보편성'을 상실하면서 어쩌면 이러한 현대 교회의 모습은  예견된 것인 지도 모른다. '노바티안' '몬타누스'와 같은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초대 교회가 겪은 고통보다도 현대의 교회 분리의 아픔은 더욱 많은 숙제들을 우리들에게 남겼다. 여기서 한스 큉의 '다양성 속의 일치와 보편성'의 주장은 분명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 모두에게 매우 설득력 있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들을 향한 한스 큉의 매우 진솔한 외침을 끝으로 상기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대체 교회의 단일성에 보편성의 넓이와 성성(聖性)의 활력과 사도성의 근원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체 교회의 보편성에 단일성의 유대와 성성의 구별과 사도성의 추진력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체 교회의 성성에 단일성의 단결심과 보편성의 도량과 사도성의 뿌리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체 교회의 사도성에 단일성의 형제애와 보편성의 다양성과 성성의 열성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참고문헌: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분도출판사, 경북 왜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