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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교회론_두 정부론을 중심으로

James Chae 2011. 9. 3. 02:02

 

 

루터의 교회론 : 두 정부론을 중심으로

 

 

채창완

 

 

   루터의 두정부론은 현재까지 계속되는 한국교회의 교회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상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 교회는 루터의 두 정부론을 교회와 사회의 철저한 분리로 생각하고 가르쳐오고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사회와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오직 자신의 종교의 길만을 고집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터의 교회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교회와 내 자신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먼저 루터의 교회론을 정리하고 그 중 가장 특이한 두 정부론을 중심으로 어거스틴의 두 도성론과 함께 설명하고자 한다.

 

   루터는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설명했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의롭게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결국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때문에 교회는 성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오직 말씀으로를 주장한 루터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라고 정의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7가지의 교회에 대한 표지를 루터는 말했는데 그 중 3가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말씀이 선포되고, 세례의 성례전과 제단의 성례전이 집행되는 곳이 교회라고 했다. 복음이 올바르게 가르쳐지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는 장소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나머지 4가지는 천국열쇠와 성직자가 있는 곳, 진정한 예배가 있고 그리스도의 인침을 받은 삶이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직자는 중세교회의 특권계급적인 성직자가 아니라 교회의 예배와 말씀 그리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이는 만인사제직론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루터의 교회론 중 가장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주장이 두 왕국론, 만인사제직론, 성직론, 그리고 그리스도인 군주의 위치에 대한 것인데 모두가 두왕국론과 연결 지어 생각해야 한다.

 

   먼저 만인사제직론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라는 베드로전서 29절의 말씀에 근거한다. 모든 믿는 자는 세례에 의해 성별된 제사장들이다. 이는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임무의 차이로 평신도들과 사제들, 왕들과 사제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루터는 전문 성직의 필요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특권계급으로서의 성직자와 수동적인 자세로 듣고 순종하는 평신도로서의 관계를 설정한 중세교회를 비판한 것이다. 만인사제직론이 개인주의를 조장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루터에게서의 성직그리스도의 은사(선물)에 따라 개개인에게 맞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통치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안수 받은 성직은 인간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감독,사제,집사 등의 차이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법률과 규정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말씀과 성례전을 맡을 성직자는 신자들 중에서 신중하게 선택돼야 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루터의 두 정부론은 어거스틴의 두 도성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어거스틴과 루터 모두 각각의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이러한 정치적인 교회론을 주장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A.D.410년에 로마가 고트족에게 점령당했을 때 로마인들은 그 원인을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자신들의 신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했는데 어거스틴은 이에 대한 반론으로 하나님의 도성사탄의 도성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도성(천상의 도성)사탄의 도성(지상의 도성)의 혼합의 역사이며, 이는 때로는 상호 협력으로, 때로는 대립과 긴장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천사들에 의해 창설되고 천사들은 이 도성의 첫 시민이다. 그러나 사탄의 도성은 타락한 천사(사탄)들의 완고한 불복종에 의해서 기초가 놓여진 것이다. 인류의 창조 그리고 타락과 더불어 이 두 도성이 생겨난 것이다. 이 두 도성은 사랑으로 성격 지어지는데 지상의 도성은 자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늘의 도성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에 대한 사랑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도성은 그 범위와 구성원의 자격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진정한 교회이다. 그러나 지상적인 도성은 지상에서 낯선 사람으로 방황하는 성자들의 모임, 즉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의 평화와 축복을 만물이 완성되는 때에 받도록 예정된 가톨릭 교회의 교인들로 구성된다. 중세 교회는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 교회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도성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지상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갖고 교황은 이러한 권위의 대변자라 하여 교황과 교회의 절대 권위는 세상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의 두 정부론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나라사탄의 나라라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로마가톨릭의 교회의 권위를 부정한다. 루터는 두 영역들, 두 정부들, 두 왕국들에 대한 단어들을 특별한 구별을 두지 않고 그의 저서 세상 권력: 어느 정도까지 복종해야하나베드로 서신 주석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이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루터의 정치적인 교회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루터가 두 왕국론을 주장한 것은 당시 독일 영주들과 귀족들에게 교회와 모든 사회의 개혁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에 루터는 어거스틴의 두 도성론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차츰 더 구체적인 이론을 전개하게 된다. 어거스틴과 달리 세상 정부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루터는 생각했다. 자세한 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존재의 두 본성에 상응하는 ‘두 영역’을 제정하셨다. 이는 두 신적인 질서들, 영적 질서와 세속 질서의 이원론에 입각한 것이다. 영적인 영역(영적 정부)세상 영역(세상 정부)이다. 전자는 구원의 질서이며 이 영역에서 인간은 홀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후자는 자연의 질서를 갖고 있으며 인간은 이 영역에서 육으로 살아가며 육체의 요구들과 육체의 죄들의 지배를 받는다. 세상 영역에서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다. 루터는 이 두 영역두 정부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며 말씀이 지배하는 영적 정부칼이 지배하는 세상 정부를 얘기한다. 영적 정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만든다. 그러나 영적 정부는 세상을 위한 법들을 제정할 수 없는데 그것은 영적 정부의 권위는 강압적이거나 강요하는 권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정부는 비그리스도인과 사악한 사람들의 악한 행동들을 억제하여 외적인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정부라는 왼손을 가지고 죄 된 인간을 다스리시기 위해서 공적인 을 사용하신다. 또한 영적인 정부라는 오른손을 가지고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이 두 정부는 상호 보충적이지 서로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영적 정부는 신앙과 은총, 구원과 영생의 영역이요, 세상 정부는 보복과 징벌을 수행하는 영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정부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신다. 여기서 그리스도인 군주의 위치와 역할이 있는 것이다. 군주는 이 세상의 몸과 재산에 대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 교회를 보호할 의무도 있다.

 

   루터는 또한 종말론적인 투쟁의 개념에서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사탄의 도성의 이론을 설명한다. 이 두 왕국은 투쟁의 관계 속에 존재하며 두 정부는 이 투쟁에서 하나님의 무기로 사용된다. 두 정부는 결국 하나님의 왕국사탄의 왕국 사이에 존재하며 사탄도 이 두 정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어거스틴의 두 도성에 대한 개념, 하나님의 도성사탄의 도성의 모호한 개념을 두 정부론을 통해 더욱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가깝게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루터의 교회와 정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교회가 가져야 할 이미지를 더욱 사회 속으로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루터는 교회의 역할과 정부의 역할을 어느 정도 규정하면서 서로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설명을 했다. 이러한 두 정부론은 당시 교회와 사회 개혁에 상당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결코 교회 자체 속에 만 머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교회개혁은 사회 정치적인 개혁과 늘 함께했다. 루터의 이원론적인 교회론은 결코 사회와 교회를 분리해서 생각한 것은 아니다. 각각은 상호보완적이며 둘 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양팔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 교회는 루터의 이러한 이원론적인 개념을 상호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 없는 것으로 해석하여 교회와 사회를 철저히 구분하고 있다. 교회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교회의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교회의 개혁은 곧 사회 개혁과 함께해야 한다는 루터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교회와 사회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와 사회 개혁은 결코 따로 가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보수적인 한국 교회는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그러는 동안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사회 생활과 교회 생활의 철저한 이분법적인 분리 속에서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문해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