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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

James Chae 2011. 9. 3. 23:48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

 


 

채창완

 

 

 

목차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1) 이스라엘의 기원

2) 팔레스타인의 지형과 기후

 

2. 고대 근동의 역사

1) B.C.2000년 경의 고대 근동

2) B.C. 1750~1550의 고대 근동

 

3. 이스라엘의 족장시대( 12~50)

1) 족장 설화의 기원

2) 족장 설화의 역사적 배경

3) 히브리인 선조들과 역사

4) 족장들의 종교

5) 족장들의 종교의 성격

 

* 이 글은 구약성서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역사를 통하여 구약성서에 대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이해를 돕고자 작성된 것이다. 이 글에 언급된 시기는 B.C. 2000년 전후로, 이 시기는 구약 성서의 족장들의 활동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시기이다.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1) 이스라엘의 기원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기원은 구약 전승에 근거한 12지파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32:29) 이들의 언어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의 문화 속에서 생성된 가나안 방언들 가운데 하나로써 이 지역의 다른 유목민들과 같이 고대 아람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은 이들이 팔레스타인 정착한 후부터였다(B.C.2000년경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는 대체적으로 역사서술상 팔레스타인 정착기부터 주후 70년 까지(로마의 예루살렘 함락), 그리고 주후 132년에서 135년 까지(이스라엘 봉기)를 언급한다.

 

2) 팔레스타인의 지형과 기후

이스라엘이 정착한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의 동쪽 경계선과 종으로 가로지르는 깊은 계곡에 의해 서부와 동부로 반씩 나뉘어 있으며, 시리아 사막 사이에 위치한 광범위한 산악지대가 남부의 삼분의 일을 차지한다. 팔레스타인은 블레셋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다양한 토질과 기후로 정착민들마다 서로 다른 풍습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통일된 정착 생활은 지형과 기후 때문에 어려웠을 것이다. 산악지역에서는 부족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으므로 평야지역에서 교류들이 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이 지역의 기후와 토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겨울은 우기로서 국지적이며 짧고 집중적으로 폭우가 내렸는데 이른 비(10), 주된 비(1),늦은비(4) 등으로 우기는 나뉘어진다. 여름은 메마른 건기이다.

 

토양은 석회질로 이루어져 구멍이 매우 많고 일반적인 개념의 울창한 숲보다도 낮은 덤불이 많았다. 샘은 적었고 여름에는 모두 메말랐으나 지중해 연안의 평지 계곡에는 물이 많았다. 대부분의 물을 비에 의존했기 때문에 ‘물’ 문제는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팔레스타인이 해안에 접해 있었지만 해양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해안이 모래사장으로만 이루어져 항구 역할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은 이스라엘이 바다에 대한 이해가 없었음을 암시해준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피땀 흘려 생존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며 한정된 인구밀도 이상의 주민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주식은 빵, 유제품, 과일 등이며 육류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먹었다. 출애굽기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은 특별히 팔레스타인을 지칭한 말이 아니라 고대 근동세계에서 통용되던 말로써 농경지대의 혜택을 사막지대와 대비해서 표현한 말이었다.

 

2. 고대 근동의 역사

 

1) B.C.2000년 경의 고대 근동

B.C.2000년 전후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cent’ 전역에 걸쳐 아모리족(아무르Amurru, ‘서부인들’이란 뜻, 서부 셈족계를 가리키는 일반 용어)의 대대적인 이동이 있었는데 구약성서의 아브라함도 이러한 무리들 중의 하나로 북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 같다. 이 아모리족은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고 수메르와 아카드 문화를 채용했다. 문자도 아카드 문자를 사용했고 종교도 유사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B.C. 13C경 부터로 본다면 이 반유목민적인 유랑생활의 시기는 이스라엘의 전사前史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메소포타미아는 우르 제3왕조 시기(B.C. 2060~1950)였고 이 왕조는 아모리족에 의해 몰락했다. 중앙집권체계는 아니었으며 동부의 엘람(Elam), 티그리스강 상류의 앗수르,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마리(Mari) 등의 도시 국가들이 강력했다. 마리 출신 이쉬비이라(Ishbi-irra)가 점차 북부 수메르의 지배권을 확장해서 남부의 우르를 붕괴시켰다. 이는 아모리족의 공을 입은 것이다.

 

B.C. 18C 중엽에 하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이신(Ishin)과 라르사(Larsa)라는 두 국가가 경쟁관계였는데 200년 동안 지속이 됐다. 이들도 아모리족의 군주에 의해 지배되었다. 바빌로니아(Babylon)는 이 두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세력을 차츰 키워갔으며   1왕조는 수무 아붐(Sumu-abum)이었다.(B.C. 1830년 경) 경제적인 불황 속에서도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나이프르Nippur를 중심으로 서당이 발달했다. 이 지역에서 2개의 법전을 발견했는데 이신의 리피트 이쉬타르Lipit-ishtar와 아카드의 에쉬눈나Eshnunna왕국의 것이다. 이 후자는 우르의 법전으로 성경의 언약법전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법률 전승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부메소포타미아에서는 B.C.3000년 경에 유프라테스강 중류의 마리가 중요한 성읍이었는데 B.C. 2000년 대에는 주요 주민들이 서북 셈족(아모리족)이 대부분이었다. B.C.18C의 야기드 림(Yagid-lim) 왕조 때가 황금시대였는데 이 시기가 이스라엘의 기원과 연결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앗수르(Asshur)는 당시 아모리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언어,문화,종교는 아카드적이며 혈통은 혼혈(아카드,후리,서북 셈족 및 기타 종족)인종이었다. 초기에는 서북 셈족의 왕이 다스렸으나 B.C. 2000년 이후부터는 아카드족의 왕들이 다스린 것 같다. 이들은 ‘수메르-아카드 문화의 영구적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활발한 상업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팔레스타인 남부의 이집트는 이 시기가 중왕조의 시작기였다. B.C. 21C 중엽에 제 11대 왕조인 멘투호텝(Mentuhotep)이 이집트를 재통일했고 이는 제12대 왕조 아메넴헵(Amenemhet)으로 이어졌다. 정치형태는 왕을 중심으로한 관료제도였고 나일강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학문도 발달했다. 이시기를 ‘이집트 문화의 황금시기’라 부른다. 이 시기의 이집트의 영향은 팔레스타인과 뵈니게, 남부시리아에 까지 미쳤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은 B.C.3000년 경 후반부터 북에서 이동해온 유목민들에 의해 커다란 혼란을 격은 시기였다. 기존의 촌락들이 무너지고 네게브와 요단강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촌락들이 형성되었다. B.C. 19C부터 요단강 서부에서도 도시들이 형성되었고 씨족공동체의 반유목민들에 의해 새로운 성읍들이 생겨났다. 당시의 대부분 유목민들은 ‘아모리인’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이들은 아브라함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의 언어는 점차 가나안 언어와 동화되었으며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시기에는(B.C. 13C ) 아모리인과 가나안인의 구별이 없어졌다. 아모리족이 이집트로 이동하면서 이집트의 중왕조시대는 막을 내리고 아모리 이름을 가진 군주가 등장했다.

 

2) B.C. 1750~1550의 고대 근동

B.C.18C에 바빌로니아, 라르사(Larsa),앗시리아(아카드족), 마리(아모리족) 사이에 세력분쟁이 있었다. 300년 동안 분쟁은 계속되었는데 라르사와 앗시리아가 팽창을 계속했다. 앗시리아는 와르드 신의 동생 림 신(Rim-sin)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을 자처하며 우르 제3왕조를 세웠다. 건축과 공공분야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후 삼시 아닷 1 (B.C. 1775~1718년 경)는 ‘세상의 왕’이라 자처하며 마리를 장악하여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앗시리아를 강력한 나라로 키웠다.

 

그러나 지므리 림(B.C. 1730~1697)에 의해 마리가 다시 정권을 회복했고 마리는 다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들은 병거를 사용한 전술에 능했으며 다양한 도시 문화가 발달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서북 셈족으로서 반유목민 출신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B.C. 1728~1686)의 등장으로 메소포타미아의 판도는 바뀌고 함무라비는 이 지대를 통합했다. 마리와 앗시리아도 점령됐으며 그 후 마리는 완전히 멸망했다. 함무라비의 시대는 문화의 전성기였으며 이들의 주신 마르둑(Marduk)은 당시 다양한 신을 모셨던 만신전에서 최고의 지위에 놓이게 됐다.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광대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고대문명의 가장 체계적인 법전으로 B.C.3000년 대의 ‘우르 남무 법전’, ‘리피트 이쉬타르 법전’, 에쉬눈나Eshnunna법전’의 전승을 계승한 것이다.

 

또 역사적으로 이시기는 대혼란의 민족 대이동시기로서 이집트도 이방민족인 힉소스족에 의해 지배당했다. 이들은 북방에서 침입한 서북 셈족인 아모리인들이었다. 이들은 가나안 신을 예배했는데 주신은 바알Baal이었다. 이 바알신은 이집트의 셋Seth신과 동일시 되었다. 수도는 아바리스Avaris로 새로 건설된 도시였고 약 100년 동안 이곳에서 이집트를 통치했다(B.C. 1650~1542). 이 시기가 요셉과 야곱이 이집트에 들어간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힉소스족의 세력은 아시아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그후 세퀘넨 레Seqenen-re의 아들 카모스Kamose가 백성을 규합하여 힉소스족에 대항했고 그의 형제 아모시스(Amosis, B.C. 1552~1527)가 힉소스족을 이집트 땅에서 몰아내고 이집트를 최강국으로 다시 만들었다.(출애굽기 1:8과 비교).

 

B.C. 18C에는 ‘아모리족’이 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주종족이었는데 B.C.17~16C 경에는 후리족Hurrians이 우세해졌다. 이들은 팔레스타인까지 이동했다. 동부티그리스강 지역에 주로 분포되었고 인도와 이란 등에도 정착했다. 이들은 ‘마타니Mitanni왕국’을 수립했는데 통치자들은 ‘인도-아리안’계였고 주민들은 ‘후리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함무라비의 세력이 북쪽과 서쪽으로 확장할 수 없도록 계속 저지하며 경쟁관계를 유지했다.

 

B.C. 15~14C 경에 후리족은 팔레스타인을 거쳐 힉소스시대의 이집트까지 공격을 했다. 이들은 기동력 있는 군사 기술이 발달했고 병거와 복합식 활을 전장에서 사용했다. 이러한 군사력에 의해 힉소스의 이집트를 장악한 것이다. 이 시기 아모리족의 반유목민적인 삶이 정착생활로 바뀌며 많은 도시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여러 소왕국 또는 속국으로 나뉘면서 각각 발전했다.

 

이집트의 아모시스는 B.C. 1540년경에 힉소스족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제 18왕조를 세웠다. 이때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헷족의 침입으로 바빌로니아가 멸망(B.C.1530년경)하며 제1왕조가 끝이 났다. , 메소포타미아 북방에서는 헷족이 등장해서 ‘고왕국(the Old Kingdom)’을 창건했다.(B.C. 17C초경) 이들의 영역은 동부 및 중앙 소아시아 지역에 미쳤다. 헷족은 하티Hatti라 불린 비인도-유럽계 민족으로 하투사스Hattusas에 정착했다. 이 하티Hatti는 하티족Hattians 또는 원헷족이라 불리고 후대의 헷족(Hittite)과는 다르 종족이다. 결국 B.C. 1530년 무르실리스 1세는 바벨론을 함락하여 바벨론은 멸망시킨 것이다. 그러나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으며 그 원인으로 이후 약300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암흑기로 접어든다.

 

바로 이러한 시기가, 즉 이집트가 부흥하고 메소포타미아가 혼란에 빠져있는 이 시기가 성경의 족장시대의 역사적 배경인 것이다. (12~50)

 

 

3. 이스라엘의 족장시대(창세기 12~50)

 

1) 족장 설화의 기원

성경의 족장 설화는 역사적 시대의 기록이 아니다. 이 기록이 담긴 이스라엘의 육경(Hexateuch) J, E, D, P와 몇 가지 주요한 자료로 구성되었다. J는 가장 초기자료(B.C.9C)이며 P는 가장 후기 자료로 바벨론 포로기 후의 자료이다. 족장 설화가 역사적인 사실을 방영했다고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그러나 전승을 실제적인 역사 속에서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를 통해 전승의 시대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는 것은 가능하다. 다양한 고고학의 발달로 현재 여러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북부 시리아의 에블라 문서(the Ebla texts)를 통해 중기 청동기 시대(B.C.2000)의 족장 설화 시기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단일 설화 (JE) 편집은 B.C. 721년 이후이고 J를 토대로 E가 보충된 것이다. 전승은 구전이나 서사시 방식으로 전해 내려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현재의 학설은 족장 설화가 ‘왕정 초기 또는 포로기’에 정리 기록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여러 이유에서 이러한 족장 설화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 족장 설화의 역사적 배경

성경의 배경, 즉 족장들의 시대는 B.C. 2000년대 초반일 것으로 추정한다. 족장 설화의 이름들의 기원은 아모리족의 이름과 일치한다. 예를 들어 ‘야곱’은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Chagar-bazar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Yagub-el’로 언급되어있으며 B.C. 18C 이집트 문서에서도 발견된다. , ‘아브람’은 바빌로니아 제1왕조 시대의 문서에서 발견된다. 최근에 발견된 ‘에블라 문서’에서는 성서의 인물들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들이 많이 나왔다. 이는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북부 시리아 일대에 이스라엘 선조와 유사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누지Nuzi문서에서는 B.C. 15C경 동부 티그리스 지역에 있던 후리족의 관습법이 나오는데 B.C. 18C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살던 이 후리족의 관습은 당시의 ‘아모리족’ 주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누지문서에는 아브라함이 양자인 다메섹 종 엘리에셀(15:2, 24)에게 재산 상속이 될까 염려했던 사건이나 자식이 없는 본처가 첩을 얻어줄 의무가 있다는 성경의 내용들과 비슷한 당시의 풍습이 기록되어있다. , 장자 상속법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족장 설화 속의 삶의 방식은 이 시기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많은 부분 일치하고 있다. 특히, 장막 생활상이나 목초지를 찾아 유랑생활, 즉 반 유목민 생활을 했고 도시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점등이 일치한다. 이들은 이동할 때 낙타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낙타의 사용은 보다 후대의 이야기이다.

 

족장시대의 연대는 성경에서 제시한 족장들의 나이를 근거로 연대기를 만들 수 없다. 정확한 연대기를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B.C. 2000년 경으로 추정한다. 앞 장에서 언급한 것같이 족장들의 시기는 아모리족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도처로 밀려들어온 시기로 추정되며 이 시기는 ‘아모리족’이 메소포타미아 우르 제 3왕조와 이집트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던 시기이다. (B.C.20C )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포함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모리족의 후예들인 것이다.

 

3) 히브리인 선조들과 역사

이스라엘 선조들이 상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증거는 계약법전(21~23)과 에쉬눈나Eshnunna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의 유사성에서도 입증된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우르Ur에서 상류의 하란Haran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이어진다. 이 하란은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고향이다. 창세기 2장의 창조설화와 창6~9장의 홍수설화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자료들과 매우 유사하다. 우르는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의 고향인데 이를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 족장들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현재 학자마다 많은 이견이 있다. 이스라엘의 선조는 서북 셈족인 아람인들이었다. ( 26:5 참조) ‘아모리족’은 ‘서부인’이란 뜻의 아카드어로서 족장시대와 상부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서 ‘서북 셈족’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성경의 족장들은 큰 씨족들의 추장들이었다. 성경은 개인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는 거대한 씨족의 역사인 것이다. 이들은 동명의 씨족들의 시조로 치부해서는 않된다.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을 히브리인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이스라엘로 불렀다. 이 ‘히브리인’은 외부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르는 명칭인 것이다. 아피루Apiru는 히브리인을 뜻하는 명칭으로 이집트 라암세스 2세 치하에 종살이 하던 아피루 가운데 이스라엘 구성원이 끼어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족장들의 역사를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B.C.2000년 초, 서북 셈족(아모리족)의 이주민들이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지배계급은 힉소스족의 귀족 계층이었고 이들의 이동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일부는 도시 국가를 건설하고 일부는 유목민으로 남은 것 같다. 이 반 유목민들은 목초지를 찾아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녔고 이들 중 일부는 정착해서 농경사회를 이뤘다. 또 일부는 무법자나 도적떼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이러한 유목민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며 씨족공동체를 형성했다. 족장들은 씨족공동체의 대표들이었으며 이들은 하란 부근의 ‘아람평원’에서 이주해온 것 같다. 이 시기는 중기 청동기 시대 또는 그 이전이었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이집트의 ‘힉소스’시대에 이집트에 들어갔고 후에 이집트의 국가 노예가 되었다.(ex. 창세기의 요셉이야기 참고)

 

4) 족장들의 종교

신구약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 J에는 족장들의 하나님이 야훼 Yahweh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나 족장들의 시기에는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족장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야훼’는 출애굽기 62절에서 모세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이름이다. 모세 등장 이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엘로힘Elohim’으로 표기했다. 족장시대에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은 엘 사다이(El Shaddai, 전능의 하나님/6:3,17:1), 엘 엘리욘(El El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14:18~24), 엘 올람(El Olam, 영생하시는 하나님/21:23), 엘 로이( El Ro i ,감찰하시는 하나님/16:13) 야훼 이레 (예비하시는 하나님/22:14), 엘 벧엘(El Bethel, 벧엘의 하나님/31:13) 등이 있다. ‘야훼’의 신앙은 결국 모세 때 부터이다.

 

씨족 사회에서는 계약시 씨족의 대표의 이름이나 대표 신의 이름을 사용했으므로 족장들의 이름이나 당시의 이름들은 씨족과 신의 혈연 관계에 대한 고대 유목민의 예민한 감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씨족이나 가정의 가장이며, 그 가정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의 가정의 한 식구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아비람Abiram은 나의 (하나님)아버지이고 아히람Ahiram은 형제는 존귀하다는 뜻이다. ‘엘’은 신을 뜻하는 셈어의 보통명사로 ‘올람’, ‘엘욘’, ‘샷다이’ 등의 이름이 야훼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바알’은 제외되었다.

 

5) 족장들의 종교의 성격

족장들의 이동에는 경제적인 요인도 있지만 ‘씨족’의 하나님을 섬기던 당시의 배경을 생각한다면 ‘종교’적인 원인도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족장들의 ‘씨족’의 신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씨족’의 신앙은 유일신교(monotheism)가 아니었지만 가장 유력한 신을 가장 높이 숭배했던 것 같다. 족장들의 종교는 메소포타미아의 공식적인 다신교나 가나안의 풍산제의를 닮지는 않았다. 이들의 제의는 조상으로부터 전래된 교유한 씨족신의 제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산 속에는 부족의 연대감, 즉 백성과 하나님의 연대감이 있었다. 이는 후에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약속과 언약이라는 양식은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신앙의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신앙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공으로 이 ‘약속’이 일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만족할 수 없었고 이 약속에 대한 정신은 유대교를 거쳐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까지 이어진다.

 

 

참고도서

-이스라엘 역사/ 존 브라이트 저; 박문재 역,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이스라엘의 역사/ 데이비드 F. 힌슨 저; 이후정 역. 컨콜디아사, 1983.

-공동번역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