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14 연중11주일(가해)_감사성찬례 설교
창세 18:1-15 _시편 116:1-2, 12-19_로마 5:1-8_마태 9:35-10:8(9-23)
소명 가운데 배려
채야고보 신부 (artist / 성공회 사제)
우리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을 주님께서 받으시길 원합니다.(시편19:14 비교) 아멘.
하느님은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지만 동시에 위로 또한 주십니다. 단순히 무엇을 하라고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 한 개인과 관계를 맺는 첫 단계에서 늘 소명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봅니다. 오늘 창세기 18장처럼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많은 판관들과 사무엘이 그러했으며,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소명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과의 계약 또는 약속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필요와도 중첩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필요는 우리의 희망과도 일치합니다. 물론 요나와 같이 거부하고 싶은 소명도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소명은 우리에게 큰 힘과 희망을 줍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자손이 있어야 하는데 아브라함에게는 본처의 자식은 없고 첩의 자식인 이스마엘이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스마엘이 하느님의 약속인 줄로 생각해서 이스마엘을 잘 키우는 것이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창세기 18장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생각을 바꾸십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몸소 아브라함의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한 개인과의 약속을 확증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울로는 로마서 5장을 통해 이러한 하느님의 배려와 소명에 응답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언급합니다. 키워드는 ‘인내’입니다. 소명에 응답하는 믿음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사람들마다 경험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기도하면서 뭐라도 하는 것이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인고의 시간도 있는 법입니다. 열매를 빨리 먹겠다고 식물을 닦달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가 맺듯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느냐?입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주님의 때는 전적으로 그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약속의 자녀인 이사악을 백세에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기다림의 시간은 소명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복음을 살펴보면 이러한 점이 더 두드러집니다.
마태오는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복음서를 편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구조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마태오는 서론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배치하고, 결론 부분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적에 해당하는 본론 부분을 매우 계획적으로 편집을 합니다. 다섯 개의 예수님의 행적과 다섯 개의 설교 모음집을 교차해서 배치한 거죠. 정리하면 첫째 행적인 ‘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3:1~4:25) 다음에 ‘산상 설교’(5:1~7:29)를 배치하고, 둘째는 ‘치유와 구마 행적’ (8:1~9:38) 다음에 오늘 읽은 ‘파견 설교’(10:1~11:1)를 배치한 것입니다. 셋째, 넷째, 다섯째도 각각 그러합니다. (셋째는 ‘배척과 음모당하시는 행적’(11:2~12:50) 다음에 ‘비유 설교’(13:1~53)를, 넷째는 ‘기적 논쟁 사화’ (13:54~17:27) 다음에 ‘교회 설교’(18:1-35)를, 마지막으로 ‘적대당하시는 사건’ (19:1~22:46) 다음에 ‘심판 설교’(23:1~25:46)를 각각 배치했습니다.) 행적과 설교가 교차되는 편집이죠. 그 의도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9장 35절의 ‘요약문’입니다. 이는 ‘산상설교’ 바로 전인 마태오복음 4장 23절에도 있습니다. 마태오는 ‘산상 설교’ 바로 전과 오늘 ‘파송 설교’ 바로 전에 이러한 ‘요약문’을 배치하여 예수님의 행적과 뒤편의 설교문을 자연스럽게 연결합니다. 이 요약문을 살펴보면 제자들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마태9:35]
요약을 잘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한다고들 합니다. 맞는 말입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특히 학교 선생님들은 그렇게 가르치셨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선생님으로 생각했던 마태오는 마태오 복음을 편집하며 이러한 교사다운 면모를 드러낸 것같습니다. 그것이 이런 ‘요약문’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산상설교는 5장부터 7장에 있습니다. 그다음에 8장, 9장에 ‘치유와 구마 행적’을 기록합니다. 그런 후에 다시 10장에 ‘파송 설교문’을 배치합니다. 그러므로 9장 35절의 요약문은 바로 앞 장의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 행적에 대한 총정리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오는 ‘추수할 일꾼’에 대한 언급은 10장의 ‘파송 설교’에 대한 예고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약문에서 우리는 예수님 사역의 핵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르치시고(διδάσκων디다스콘), 선포하시고(κηρύσσων 케루손), 고치셨다(θεραπεύων 테라퓨온)”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사역의 요약입니다.
마태오가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문을 통해 제시한 것은 이제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이 오늘 10장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도 사명으로 주어졌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는 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는 세례 요한의 선포(3:2)에 이어 예수님의 선포(4:17) 그리고 이제 10장에서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 선포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르친다’는 무엇입니까? 이 문장은 산상설교 이전의 요약문인 4장 23절에도 똑같이 언급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가르침은 곧 ‘산상 설교’의 내용을 말합니다. 산상 설교의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선포하다’는 무엇입니까? 케루손은 ‘설교하다’, ‘전도하다’의 뜻입니다. 그러니 선포하다는 곧 ‘전도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전도합니까? 바로 마태오복음의 주제인 ‘하늘 나라의 복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치다, 치료하다’는 무엇입니까? 테라퓨온의 원형은 테라뽄(θεράπων)이란 명사입니다. 동료, 동지, 하인의 뜻입니다. 그 동사형은 테라퓨어(θεραπεύω)로 ‘시중들다, 복종하다, 상담하다, 치료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어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결국 ‘치료하다’는 ‘시중을 들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섬김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이지요. 이는 물리적 치료뿐만 아니라 정신적•영적 치유를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교부들의 해석에 의하면 ‘육신의 병리학적 치료는 하느님의 신성으로, 정신적•영적인 병은 자비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병든 사람을 돌볼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하인이 주인을 섬기듯 병자를 자비로 돌보면서 하느님의 권능에 의지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느님의 치료의 은총이 우리의 섬김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산상 설교의 가르침대로 사시고,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며, 치유와 구마 사역을 하셨던 우리 주님처럼 이제 제자들도 그렇게 살라는 것이 오늘 소명설교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 계획 없이 어려운 임무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어린양들을 이리의 소굴로 보내듯이, 길 떠나는 어린 자식의 안전을 염려하는 부모처럼, 아주 꼼꼼하게 다양한 지침들을 내리십니다. 그 예가 마태오 10장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10장 5절의 말씀을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배려가 잘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활동할 장소를 갈릴리 지역으로 한정합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지방은 남으로는 사마리아 지역이고 나머지 세 방향은 모두 이방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지역을 다니시며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아직 연약한 제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이방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을 제외시킨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해석하는 학자들에 따라 다르게도 해석됩니다. 예수님이나 마태오가 민족주의적 성향이 있어 이스라엘 민족에게 집중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벗어나 마태오 8장28절에 ‘가다라 지방’을 방문한 것을 보면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주님께서는 핍박이 뻔하게 예견되는 지역보다는 그들에게 익숙한 고향땅인 갈릴리 지방에 한정하여 제자들을 파송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감당할 만큼의 임무를 주신 것입니다.
이 외에도 10장5절~15절까지 ‘전도 명령’을 하시면서 또 다른 세세한 지침들을 주십니다. 이는 마태오가 Q복음과 마르코복음을 참고한 것인데 마르코보다는 Q복음의 엄격한 지침을 따른 것입니다. 여장을 꾸리는 문제에서부터, 전도 여행 중의 처세술까지 정말 다양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담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활동하던 유랑전도사들의 문화가 여기에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아무튼 이러한 섬세한 지침에서 우리는 주님의 자상한 배려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섬세하면서도 자상한 선생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무례한 행위에도 화를 내지 않으시고 인내하셨던 하느님의 자상한 배려처럼, 따뜻한 위로가 느껴집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말씀의 중요한 부분에 다다릅니다.
아브라함에게 소명을 주신 하느님, 제자들에게 소명을 주신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고 있는 로마서 5장의 말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결국 하느님의 소명은 한 개인과 하느님 간의 올바른 관계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아브라함처럼”, “예수님 앞에서 선 제자들처럼” 이제 우리도 매 주일 예배를 통해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한 개인”.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매 주일 하느님과의 관계 설정을 하고 나름대로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한 주간을 살아갈 힘을 예배를 통해 얻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부족하고 잘못했던 일들을 회개하고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주님 앞에 선 개인”으로 세상을 향해 파송을 받습니다. 그 한 주간의 삶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우리는 알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제자들을 챙겨 주신 것처럼 우리도 지켜주실 것을 믿기에 용기를 얻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믿음과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시든, 주님을 향해 여러분이 바로 서시는 순간 여러분이 할 일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설정을 통해 우리 삶을 향한 하느님의 소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고’, ‘선포하고’, ‘섬겨라’. 제자들의 소명은 오늘 우리의 소명이 됩니다. 부담스러운 소명이지만, 우리가 ‘아멘’으로 화답할 때 주님의 배려 또한 함께하실 겁니다. 우리 일상의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이러한 소명을 따르려고 결단할 때 ‘하느님 앞에 선 한 개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명은 분명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배려심 깊게 도와주실 겁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연중11주일 (가해) 성서 말씀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을 주시어, 우리가 모든 악을 물리치고 주님 안에서 더욱 굳세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창세 18:1-15
1 야훼께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2 고개를 들어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천막 문에서 뛰어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3 청을 드렸다. “손님네들, 괜찮으시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4 물을 길어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 5 떡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피곤을 푸신 뒤에 길을 떠나십시오. 모처럼 소인한테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시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 그렇게 하여주시겠소?”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고운 밀가루 서 말을 내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이르고 7 소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살이 연하고 맛있어 보이는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종에게 맡겨 빨리 잡아서 요리하게 하고는 8 그 송아지 요리에다가 엉긴 젖과 우유를 곁들여서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손님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그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부인 사라는 어디 계시오?”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사라가 천막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천막 문 어귀에서 이 말을 엿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늙은이였고 사라는 달거리가 끊긴 지도 오래였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 13 그러자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사라가,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랴 하며 웃으니, 될 말이냐? 14 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느냐?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오리라. 그 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15 그러자 사라는 겁이 나서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으나, 야훼께서는 “아니다. 너는 분명히 웃었다.” 하시며 꾸짖으셨다.
시편 116:1-2, 12-19
1,2 주님은 나의 사랑,
⋅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주셨다. ◯
⋅ 내가 부르짖을 때마다 귀를 기울여주셨다.
12 주께서 베푸신 그 크신 은혜 ◯
.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구원의 감사 잔을 받들고서 ◯
.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14 주님께 서약한 것, 내가 채워 드리리니 ◯
. 당신의 백성은 빠짐없이 모여라.
15 주님께 충실한 자의 죽음은 ◯
. 그분께 귀중하다.
16 주여, 이 몸은 당신의 종이옵니다. ◯
. 당신 여종의 아들인 이 종을
. 사슬에서 풀어주셨습니다.
17 내가 당신께 감사제를 드리고 ◯
.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주님의 모든 백성이 모인 가운데서 ◯
. 주님께 나의 성원을 채워드리리라.
19 주님의 집 뜰 안에서,
. 너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
. 나의 서원을 바치리라.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로마 5:1-8
1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7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마태 9:35-10:8(9-23)
35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36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37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38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10: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세리였던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가나안 사람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5 예수께서 이 열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6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10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11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12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14 어디서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려라. 15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과 고모라 땅이 오히려 그 도시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16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17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19 그러나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21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제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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