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죽었던 자식을 다시 찾은 심정으로...

James Chae 2021. 1. 17. 09:58

 

Rembrandt_ Abraham and Isaac (oil on canvas), 1634 (자료출처: wikipedia)

 

 

2020.6.28. 가해_연중13주일 감사성찬례

창세22:1-14 _시편13 _로마6:12-23 _마태10:40-42

 

 

죽었던 자식을 다시 찾은 심정으로...

 

채야고보 신부 (artist / 성공회 사제)

 

 

오늘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산은 ‘모리야 산’입니다. 많은 논란은 있지만 이 산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과 같은 곳이라고 전해 내려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역대하 3장 1절에 “솔로몬은 선왕 다윗이 환상으로 본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야훼의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관계를 떠나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과 골고다의 십자가 사건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확실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부활 사건의 유비”(아날로기아, ναλογία) 라고 합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팔레스타인 남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했던 시나이 반도의 중부에 위치한 ‘바란 사막’에 기거했다고 하니 그곳에서 북쪽에 있는 예루살렘의 모리야 산까지는 약 일주일 이상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 긴 여정 동안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각자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귀한 자식을 제물로 바치러 가는 아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브라함에게는 야훼 신앙에 최대 위기가 온 것이고, 이사악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제물로 바칠 양도 없이 제사를 지내러 간다니…?

 

고대 종교에서 흉년이나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때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허다했습니다. 우리의 민간 설화 심청전에도 이러한 풍습이 남아 있죠. 이를 ‘인신공양’이라 하는데, 이는 단순한 야만적 행위로 치부해버리기에는 고대 사회에서 절박한 인간의 기원이 담긴 종교 행위로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을 발휘했습니다. 열왕기하 3장 27절을 보면 이스라엘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절망에 빠진 모압왕이 자신의 왕세자를 성벽 위에서 제물로 불사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에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유다 연합군은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하고 맙니다.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ex. 판관 11장 입다의 이야기, 2 열왕 16:4-5 아하즈 왕 이야기 참조) 이런 ‘인신 공양’의 풍습을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야훼 신앙도 맏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는 것은 여느 고대 종교와 같았지만, 인신공양 대신 가축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아브라함에게 물은 겁니다. ‘인신공양’을 염두에 둔 질문이지요. 이 대화가 아마도 일주일 넘는 여정 속에서 부자가 나눈 유일한 대화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 무거운 제삿길이 이 부자에게 흥겨운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을 겁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만을 믿습니다. 이 몸 건져 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오늘 시편 구절입니다. 이사악을 바치기 전 아브라함의 고백이 이러했을 겁니다. 눈물로 이러한 기도를 드렸을 아브라함을 묵상합니다. 그 처절함. 그렇습니다. 죽음은 처절하고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삶이 그러하듯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고 우리 삶의 실제적인 부분에서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삶의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이러한 아브라함의 고통을 우리도 매일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답을 찾고 싶어 기도하지만, 하느님은 늘 침묵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혹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막고 계신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아~, 이 칼날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 심리학적으로 ‘덫에 걸린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의 먹먹함이 느껴집니다. 날카로운 칼끝을 사랑하는 자식의 심장에 갖다 대는 그 순간까지 침묵하셨을 하느님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차라리 자기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더 쉬웠을 겁니다. 절망, 가장 절망의 순간, 드디어 하느님의 침묵이 끝이 납니다. 드라마 같은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믿음 생활도 그러한 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극심한 절망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겨우 일어서기도 합니다. 그러한 일이 반복되는 삶. 그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들어가 잠시 고대 이스라엘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아브라함이 고민했던 지점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유추해보기 위함입니다. 야훼 신앙에서 야훼는 생과 사를 모두 관장하는 권한을 가지신 분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묘사합니다. 야훼께서 생명을 주셔야지만 인간은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야훼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면서 또한 그 생명을 보존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은 전적으로 야훼의 권능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리라.”[욥기 33:4] 야훼는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 또 빼앗아가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은 야훼께서 한 존재에게서 생명을 거두신 상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이사악에 대해 취했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가져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야훼는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야훼가 맺은 계약이 파기되지 않은 이상 그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사악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의 주관자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신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서 너의 후손이 퍼져 나가리라" 하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를테면 죽었던 이사악을 되찾은 셈이 되었습니다.”[히브 11:17-19]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백세의 나이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내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빼앗길 운명에 처했지만 하느님의 구원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입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야훼를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만나서 대화도 하고 식사시중까지 드렸던 아브라함입니다. 늘 불가능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은 오늘 모리아야 산 사건을 통해 야훼 신앙의 정점에 닿게 됩니다.  약속의 자녀인 이사악을 하느님께서 당연히 살리실 것이란 믿음.  그리고 그는 이제 ‘믿음의 조상’으로 당당히 서게 됩니다. 이사악을 육신의 자식이 아닌 약속의 자식으로 제대로 보게 된 거죠. 그는 잃었던 자식을 되찾은 ‘돌아온 탕자’의 아비 같은 심정으로 다시 살아난 이사악을 새롭게 맞이했습니다.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모압왕의 절박함과 아브라함의 절박함. 이러한 절박함은 곧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켜야 했던 하느님의 절박함에 대한 유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절박한 숭고 앞에 우리는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풀고 그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14절에 ‘율법의 지배’와 ‘은총의 지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은총의 지배’ 아래 있으려면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로마 6:12]....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만이 ‘은총의 지배’ 아래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죄의 지배’가 아니라 ‘은총의 지배’ 아래 있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사악까지도 이 사건을 통해 진정한 ‘은총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죄사함도 없느니라!’[히브 9:22] 개역성경 버전입니다.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켜 완전한 ‘은총’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은 이렇게 우리를 ‘은총의 지배’ 아래 놓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창세기 말씀을 유비로 받아들이기를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이사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비이고,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유비라면, 우리는 이 모리야 산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 사건의 유비를 봅니다. “어떤 사람의 사자 또는 대리자는 그 사람 자신과 같다.”는 히브리 전통의 “샬리아”라는 개념이 오늘 복음서 말씀의 기초가 됩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친 이사악을 “죽었던 자식을 되찾은 셈”으로 다시 영접했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서 되찾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좌우를 살펴보세요. 누가 보이십니까? 모두가 죽었다가 다시 산 자들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주일에 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처럼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죽었다 다시 산 자”를 영접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를 살리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보내신 선물이고 또 죽었다 다시 산 귀한 생명입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영접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나아가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시선에 일치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죽었다 다시 산 사람”으로 여기신다면 아직 죽은 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의 이웃들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물은 우리의 물질과 더불어 “길 잃은 어린양”들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보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칼 끝은 늘 우리 자신에게 놓여 있습니다. 이사악을 바치는 절박한 마음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모두 너무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우리 앞에 당면한 재건축문제, 사람들 마다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은총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이고 또 “죽었다 다시 산 사람들”이라면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각자의 마음과 생각들을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모리야산 제단 위에 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에게 미세하게 말씀하셨던 성령의 음성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동시에 울려 퍼지길 기원합니다. 어차피 한번 넘어야 할 산이라면 모두 함께 손을 잡고 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죽었던 자식을 다시 찾은 심정”으로 바라보며, 서로에 대한 감사와 하느님께 대한 찬양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연중13주 (가해) 성서 본문

 

본기도

주 하느님, 성자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푼 자선도 주님께 행한 것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어려움을 늘 살피게 하시고,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늘의 상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창세 22:1-14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2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가지고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4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5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 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6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   “아버지!”

.   “얘야! 내가 듣고 있다.”

.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8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9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11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12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13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14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하고 말한다.

 

14절은 칠십인역을 따랐습니다.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의 히브리어 본문은 “야훼의 산에 장만되어 있다.” 혹은 “야훼의 산에서 그가 나타나신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시편 13

1    주여! 언제까지 나를,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3    주, 나의 하느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4    원수들이 이겼다고 뽐을 내며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입니다.

5    나는 주님의 사랑만을 믿습니다. ◯ 이 몸 건져 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6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주님께 찬미드리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로마 6:12-23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할까 하여 이렇게 인간사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여러분은 정의에 예속되지 않고 제멋대로 놀아났었습니다. 21 그 때에 여러분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활은 결국 죽음을 안겨줍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마태 10:40-42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