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2. 나해_연중24주일(창조질서 회복 기원 주일)
잠언 1:20-33 / 시편 19 / 야고 3:1-12 / 마르 8:27-38
아집我執을 버리고 자아를 후퇴시키기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제자 베드로의 첫 번째 고백과 예수의 수난예고,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께 “사탄”이란 소리까지 들으며 꾸중을 듣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베드로가 한 입으로 한 번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또 같은 입으로 예수의 일을 방해하는 실수를 저지른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성서 본문에는 이 이야기가 연속으로 나오는 바람에 이 이야기들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는 마르코가 상황어인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31-33)를 두 이야기 사이에 넣음으로써 편집적 구성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상황어는 앞뒤 맥락이 없이 전해진 예수의 전승에 앞뒤 맥락에 맞는 상황이 전승과정에서 첨가된 문장을 말합니다. ‘아포프테그마(apophthegma)’라고 하는 수사적 기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맥상 “베드로의 고백”과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경거망동”이 극한 대비를 이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마르코는 이 이야기들을 이렇게 연속 배치를 한 것일까요?
마태오와 루가는 이 이야기들을 마르코 전승을 참고하여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가 몇 가지 첨언을 했지만 마르코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에 비해, 루가는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다음에 오는 “베드로의 경거망동”이야기를 생략했습니다. 이는 각 편집자들의 신학적 관점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이야기를 접근할 때 이 두 이야기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편집상 베드로가 고백을 한 후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듣고 금방 경거망동을 한 것 같지만, 이 이야기들 간에는 시간적, 공간적 설정이 원래 달랐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마르코가 이 이야기들로 이렇게 강한 대비를 이루는 편집을 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전통을 이해할 때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는 어떤 말씀과 전승들이 지닌 의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전승 자료와의 일종의 “공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이해나 깨달음과 다른 정서적 느낌에 가깝습니다. 즉, 내용이 담고 있는 ‘삶의 자리’를 이해하고 우리가 잠시나마 그 삶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그 전승을 계승한 사람 또는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상황과 생각 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감적 방법론”의 첫 출발점은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이는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고전에 대한 접근 방법입니다.
왜 마르코는 이러한 대비적 편집을 했을까? 왜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까? 또 왜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막으려 했을까? 여러분도 말씀을 묵상하며 이와 같이 많은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왜 그랬을까?” 그러면 말씀은 이전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여러분 앞에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많은 질문 중 마르코의 편집 의도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왜 마르코는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수난 예고”, 그리고 “베드로의 경거망동”을 대비시켜 나란히 편집을 했을까? 제가 마르코의 신학을 온전히 이해를 하는 데 아직 부족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근거하여 떠오르는 단상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마르 8:38)
오늘 마르코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말인데 여기서 ‘절개 없고’라는 말은 ‘μοιχαλίς 모이찰리스’로 ‘간통 또는 간음한 여인’을 뜻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를 ‘절개 없는’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모이찰리스’라는 말은 유대교에서는 하느님만 믿지 않고 이 신 저 신 가릴 것 없이 믿는 사람을 뜻하는 경멸의 단어입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 입장에서 하느님뿐만 아니라 다른 신을 믿는 것은 간통 또는 간음과 같은 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코가 이 두 이야기를 대비시킨 이유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는 믿는 사람도 포함된 우리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처음부터 예수의 정체를 철저히 감추는 편집구성을 합니다. 이를 ‘그리스도 비밀 사상’(브레데)이라 부른다고 일전에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서 제자들은 늘 예수의 말과 행동을 잘 이해 하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이방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처음으로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을 봤습니다. “주님, 큐리오스κύριος”. 마르코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고백으로 예수 정체의 서막을 연 후 오늘 8장에서 처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의 수난 예고를 동시에 배치시킵니다. 비밀을 잠시 드러낸 것이지요. 그러나 이 비밀은 마지막 십자가 사건과 부활 후에나 이 세상에 명백하게 드러날 비밀입니다. 마르코가 이해한 “그리스도”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면서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 구원을 위해 친히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 분입니다. 고난 받고 실패자처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마르코는 독자들에게 역설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범만이 처벌받는 ‘십자가 처형’을 예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코를 통해 이러한 십자가 처형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아직 그러한 이해 단계까지 다다르지 않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한 베드로의 깨달음은 부활 이후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자료를 편집하면서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의 칭찬이나 “천국의 열쇠”를 주었다는 점을 첨언하였지만, 마르코는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매우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감정이나 어떤 느낌도 배제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전부입니다. 마르코의 관점에서 인간의 고백은 분명 한계를 가진 불안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코는 인간 신앙의 한계를 분명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통은 내가 그것을 몸으로 살아보고 초월의 세계로 뚫린 창을 열기 위해 만들어진 의식을 지킬 때만 살아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카렌 암스트롱의 [마음의 진보 중에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말입니다. 그녀는 종교를 연구하면서 본인 스스로 어떤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 스스로 어느 정도 체험하고 느끼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어떤 개념도 무시하지 않는 연구 자세를 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깨달음은 비록 그녀가 어떤 종교를 신앙하지는 않더라도 그 종교인들이 서서 바라보는 지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음을 봅니다. 아마도 마르코도 바로 이러한 지점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사실이 우리의 고백이 될 때 그것은 종교적 교리로 개념화될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백이 입으로 발설되는 차원에 머무를 때, 고백에 따르는 합당한 실천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을 때, 고백은 결국 박제처럼 말의 감옥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혀는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 8:3 b)
말이 몸으로 표현되지 않고 혀에 붙들리게 되면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저 교리적 고백을 줄줄 읽고 외우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 교리가 담고 있는 진리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말에 진심이 담기고 그 말이 발설된 대로 행동으로 옮겨질 때 우리가 고백하는 모든 신앙적 진술들은 형이상학과 초월적인 것을 넘어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야고 3:10 a)
바로 이 경우가 사도 베드로의 경우가 된 것입니다. 한 입으로 주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또 같은 입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니 말입니다. 마르코는 고백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베드로를 통해 우리와 같은 일반적인 신앙인들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늘 고백과 말이 앞서지만 실천과 행동이 더딘 우리의 모습을 베드로를 통해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 한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마르 8:32 a)
여기에서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온 31절에 예수의 수난 예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 ‘말씀’을 ‘로고스λόγος’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예수의 수난 예고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하느님의 뜻을 발설한 예수를 향해 당돌하게 예수를 ‘꾸짖었다’고 기록합니다. 공동번역이 의역한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는 표현은 본문에는 “ἐπιτιμάω 에피티마오” 즉 “예수를 꾸짖었다”입니다. 이와 같은 동사를 마르코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는 장면에서도 똑같이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는 예수께 오만무례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꾸짖다니요. 그러니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베드로에게 외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념과 고백을 넘어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정말로 정신이 잠깐 나갔던 것이 아닌가 추측될 정도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정확히 예수께서 38절에 말씀하신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크레도 우트 인텔레감(Credo ut intellegam):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캔터베리의 성 안셀무스)
성 안셀무스가 말한 이 유명한 말을 카렌 암스트롱은 캔트웰 스미스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나를 던진다.”(캔트웰 스미스)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체적으로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불교 등 여러 종교를 연구하면서 카렌이 깨달은 지점이 바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그러나 종교학자도 종교적 진실에 다가가는 연구를 위해 자신을 내어 던지는데, 종교를 신앙하는 우리 자신들은 과연 어떠한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베드로보다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어쩌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부 출신 베드로가 예수를 3년 따라다니며 아무리 실제로 예수의 기적과 가르침을 보고 배웠다 해도 오늘날의 신학자들에 비견하면 신학적, 교리적 이론에는 많이 부족했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신학적, 교리적 내용을 몰랐어도 예수를 몸으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부활과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는 이전의 베드로와 달리 자신의 고백과 믿음을 몸으로 살았습니다. 베드로의 삶도 비포와 에프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도 오늘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우선시하며 고백과 행동이 분리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에서 그려낸 베드로의 모습은 분명 이 사람이 교회의 기둥일까? 할 정도로 무지하고 약한 모습입니다. 마태오가 베드로를 ‘천국의 열쇠’를 지닌 교회의 대표자로 묘사한 것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마르코는 철저히 ‘그리스도 비밀 사상’에 입각하여 제자들을 무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르코의 기획은 그 당시의 원시 기독교 교회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믿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했지만, 깨달은 후에는 180도 달라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코복음의 제자들보다 더 많은 예수에 대한 정보와 신학과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180도 달라진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설교를 해도 아마도 여러분은 이미 다 들어본 이야기이고 다 아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설교에서 선포된 말씀대로 결단하고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자신부터도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말씀에서 깨달은 바대로 실천할 용기가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 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려하니 너무 많은 것들을 내 자신이 포기해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하지만, 그 은총에 응답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몫입니다. 응답은 말로 또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제 자신의 ‘아집’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나의 ‘아집’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이기심입니다. 오늘 베드로처럼 주님의 수난 예고에 자신은 함께 할 용기가 없었기에, 아직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베드로는 오히려 예수께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아집’이 순간 폭발한 것이지요.
고집은 의지가 발현되는 것으로 때론 필요하지만, ‘아집’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집’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는, 자신이 신념 하는 것이 항상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아집’은 결국 ‘자기(self)’라는 존재가 아닌 ‘자아’(ego)에 붙들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아직 자신의 자아에 붙들려 주님과 함께할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정확히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지만, 아직도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하는 데 소극적입니다. 고백은 있지만, 그 고백을 뒷받침해줄 ‘실천하는 몸’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양보한다는 뜻이다.”
카렌 암스트롱의 말이 오늘 저의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제 마음속에 아직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아를 후퇴시키면 시킬수록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을 담을 공간이 넓어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생각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안에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의 공간을 조금만 남을 위해 양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힘들게 해도 그것을 견딜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조금은 더 여유롭고 관대한 사람으로 우리가 성장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관대함 속에서도 때론 불의에 대한 단호함도 보여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한 부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연중24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구하오니, 우리를 도우시어 서로 용서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잠언 1:20-33
20 지혜가 거리에서 외치고
⋅ 장터에서 목청을 돋우며
21 떠들썩한 네거리에서
⋅ 소리치고 성문 어귀에서 말을 전한다.
22“철부지들아, 언제까지 철없는 짓을 좋아하려느냐?
⋅ 거만한 자들아, 언제까지 빈정대기를 즐기려느냐?
⋅ 미련한 자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거절하려느냐?
23 내 훈계를 듣고 돌아서면
⋅ 내 속마음을 부어주고
⋅ 내 속엣말을 들려주련만,
24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25 나의 온갖 충고를 물리치고
⋅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아
26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27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28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29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30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
31 사람은 제가 맺은 열매를 먹고
⋅ 제가 꾸민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법,
32 어리석은 자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가 자멸하고
⋅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놓았다가 나둥그러진다.
33 내 말을 들어야 마음 편히 살고
⋅ 변을 당할 걱정 없이 평안히 살리라.”
28절: “너희들은” – 히브리 본문은 “그들은”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19
1 하늘은
⋅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 창공은
⋅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3 그 이야기도 그 말소리도 ◯
.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주시니,
.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
⋅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
.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 주님의 법도는 변함 없어
⋅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 주님의 법은 맑아서
⋅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
.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주소서.
13 일부러 죄 지을세라 이 몸 막아주시고 ◯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주소서.
.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요, 내 구원자이신 주여, ◯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야고 3:1-12
1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2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은 입에 재갈을 물려야 고분고분해집니다. 그래야 그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습니다. 4 또 배를 보십시오. 거센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크디 큰 배라도 아주 작은 키 하나로 조종됩니다. 그래서 키잡이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 배를 마음대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5 이와 같이 혀도 인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허풍을 떱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굉장히 큰 숲을 불살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6 혀는 불과 같습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망쳐버리는 악의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혀 자체도 결국 지옥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 7 인간은 모든 들짐승과 새와 길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을 길들일 수 있고 또 지금까지 길들여 왔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9 우리는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11 같은 샘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솟아 나올 수 있겠습니까? 12 내 형제 여러분, 무화과나무에 어떻게 올리브 열매가 달릴 수 있으며 포도 덩굴에 어떻게 무화과 열매가 달릴 수 있겠습니까? 짠 물에서 단 물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마르 8:27-38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28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고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29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31 그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32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33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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