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20. 연중7주일 감사성찬례
창세 45:3-11, 15 / 시편 37:1-11, 39-40 / 1고린 15:35-38, 42-50 / 루가 6:27-38
새학기 새학년 책가방 축복식 및 대학 새내기 축복 기도
“인류 보편적 지혜” - 평지설교 2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평생에 걸친 다양한 종교 연구의 결과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일치하는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황금률’이라 부릅니다. ‘황금률’은 황금과 같은 귀중한 보편적 가르침이나 교훈을 일컫는 말입니다. 각 종교가 추구하는 신론은 달라도 인류 보편적 염원이 담긴 ‘황금률’은 모두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1세기경에 활동했던 유대교 랍비 힐렐은 “네가 당하기 싫은 일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12 사도의 가르침을 담은 디다케 1장 2절은 “무슨 일이든지 당신에게 닥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공자도 “너 자신에게 행해지길 원치 않는 것은 타인에게도 행하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황금률’이 오늘 읽은 복음서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루가 6:31)
루가의 ‘평지설교’에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에 이어서 같은 주제의 단절어들을 모아놓은 ‘단절어 집성문’이 오늘 읽은 부분입니다. 이는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의 결론 부분으로 “원수를 사랑하라”, “남을 판단하지 말라”입니다. 나머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말씀대로 행하라” 등의 내용은 또 다음 주 전례독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들은 모두 방금 말씀드린 ‘황금률’로 소급됩니다.
우리는 보통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남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남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길 바라는 것이 보통 인간의 정서입니다. 그래서 유튜브나 SNS에서는 ‘좋아요, 구독, 알림 설정’을 강요하는 말들이 넘쳐나고, 조회수와 댓글의 반응에 매우 민감합니다. 단순히 타인의 관심을 원하는 차원은 인간의 본능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면 ‘관심병’이라는 정신증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비하하여 ‘관심종자’의 준말인 ‘관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참 무서운 표현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사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타인들의 반응에 매우 민감하게 마련입니다. 만나는 사람의 표정이 혹시 어두워보이면 마치 자기 때문에 그런 양 괜히 신경이 쓰이곤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자신의 중심과 감정보다 타인들의 중심과 감정에 자신을 내어 맡기게 됩니다. 타인들의 기분과 반응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결국 모든 신경들이 지쳐서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남을 칭찬하고 남에게 관심을 주는 것 또한 매우 인색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칭찬에 인색한 우리 민족성도 한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또 자신에게는 무한히 관대하면서도 타인에게는 매우 엄격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남의 잔소리는 듣기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은 남에게 잔소리를 쉽게 합니다. 뭐든 타인이 한 일에 간섭하고 트집을 잡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심리도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누구누구는 이러하다’, ‘그건 아니고 이거다’, ‘그것은 이렇고 저건 저렇다’라는 식으로 모든 일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상황을 정리하려 듭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타인을 정의하고 분류하여야만 본인의 마음에 안정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만, 타인을 인정하는 데는 매우 주저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은 늘 정당화시키고 싶고, 사람들의 인정 또한 동시에 받고 싶어 합니다. 참 복잡한 사람들의 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칭찬해주고 인정해 주라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정의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높여주라고 말하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기준도 판단도 없습니다. 어떠한 조건도 없이 그렇게 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단 하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즉 ‘자비’이지요.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나’ 자신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존재이듯이, 다른 타인 또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존재는 더 이상 실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나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가인의 죄는 아벨의 존재를 없이 한 데 있습니다. 그 결과 가인은 끊임없이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남에게 잔소리나 비판을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먼저 잔소리와 비판 듣는 것을 좋아하는지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또 자신이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칭찬하고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칭찬을 받을만한 일을 했을 때 칭찬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칭찬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어도 상황에 따라 격려는 해줄 수 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라고 격려할 때 상대 또한 마음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기분과 감정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기분과 감정 또한 중요합니다. 누구나 일과 관계를 망치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과 상황에 따라 늘 결과는 모두에게 만족하는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인과론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 관계는 결국 어그러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결과 만을 고집하기보다 과정의 정당성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정의는 뭐든지 옳은 것과 바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정의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시편 85:10)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과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이고 자비이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황금률’을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칭찬을 받고 싶은 사람인지,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사람인지, 자신이 사랑받고 싶은 사람인지를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강한 사람인지, 아니면 약한 사람인지, 자신이 화를 잘 내는 사람인지, 참을성이 있는 사람인지, 자기 자신이 남을 배려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남에게 무례한 사람인지, 아니면 남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인지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 성장해서 어른이 된 이후에 아무도 우리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주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들 예의상 말을 안 하든가, 말을 해도 기분 나쁘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이 말하는 충고를 잘 듣기 힘들어합니다. 그 결과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남을 힘들게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지 자기 자신만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만약 알아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면 그때에서야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우리 자신을 먼저 잘 살펴야 합니다. ‘나’를 정확히 알아야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에게 남이 해주길 바라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황금률들이 대부분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주님께서는 “~받고 싶은 대로 ~하라”라고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데 먼저 하라는 것이고, 남을 대접하는 데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행함’을 더욱 강조하신 표현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물론 어렵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더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실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12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선 교회로서 또한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사랑받고 싶으십니까? 그럼 먼저 타인을 사랑하십시오. 대접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타인을 대접하십시오. 인정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타인을 인정하고 격려하십시오. 물론 그 결과가 참혹하게 내게 다시 상처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자부심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황금률’대로 우리가 실천하여, 우리의 모든 일상의 관계들이 조금은 더 밝고 기쁜 것으로 변화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오늘 우리는 이제 새 학기에 올라가는 학생들과 새내기 대학생이 될 친구들과 함께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또 대학 새내기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관계에 적용될 ‘황금률’입니다. 어떤 친구들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은 여러분을 올바른 관계로 이끌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기 싫은 것은 남들도 다 하기 싫은 일입니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남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므로, 사람들의 반응에 ‘일희일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존재감 만으로도 여러분이 처할 모든 상황들에서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 (다해) 연중7주일
본기도
인자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말과 행실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분열된 이 세상에서 화해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창세 45:3-11, 15
… 3 요셉은 형제들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형제들은 그의 앞에서 너무나 어리둥절하여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4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자, 그제야 가까이 옆으로 갔다.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5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6 이 땅에 기근이 든 지 이태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밭을 갈아 곡식을 거두려면 다섯 해가 더 지나야 됩니다. 7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그러니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라오의 어른으로, 그 온 집안의 주인으로 삼으시고 이집트 전국을 다스리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9 지체말고 어서 아버지께로 올라가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저를 온 이집트의 주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로 내려오십시오. 10 아버지께서는 여러 아들과 손자들을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고센 땅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11 다섯 해 기근이 지나가도록 아버지께서 사실 수 있게 모든 것을 거기에 장만해 놓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거느리시는 식구들과 딸린 목숨이 아쉬운 것 없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성시_ 시편 37:1-11, 39-40
1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
.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마라.
2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
.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3 주님만 믿고 살아라. ◯
. 땅 위에서 네가 걱정 없이 먹고 살리라.
4 네 즐거움을 주님에게서 찾아라. ◯
.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5 주님께 앞날을 맡기고 그를 믿어라. ◯
. 몸소 당신께서 행해주시리라.
6 햇빛처럼 너의 옳음을 빛나게 하시고 ◯
. 대낮처럼 네 권리를 당당하게 해주시리라.
7 고요하게 주님 안에 지내라.
. 주님만 믿고 있거라. ◯
. 남이 속임수로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마라.
8 화내지 말고 격분을 가라앉혀라. ◯
. 불평하지 마라.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9 악한 자는 망하게 마련이요, ◯
.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땅을 물려받으리라.
10 조금만 기다려라. 악인은 망할 것이니 ◯
. 그 있던 자리를 찾아도 그는 이미 없으리라.
11 보잘것 없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
. 태평세월을 누리리라.
39 주께서 의인을 구원하시고 ◯
. 고난 중의 성채가 되신다.
40 의인들이 주님을 피신처로 삼으니,
. 주께서 도우시고 구해주시며 ◯
. 악인들에게서 빼내어 살려 주신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1고린 15:35-38, 42-50
35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6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37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38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하나에 각각 알맞은 몸을 주십니다. …
42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3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44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47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창세 2:7)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50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
복음서_ 루가 6:27-38
27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29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30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31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32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34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36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38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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