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 재의 수요일_감사성찬례
요엘 2:1-2, 12-17 / 시편 51:1-18 / 2고린 5:20하-6:10 / 마태 6:1-6, 16-21
“위선에 대한 경계”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오늘 읽은 말씀은 마태오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중간 부분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메시지, 특히 예수의 율법을 재해석하신 말씀들을 ‘산상설교’에 모두 담았습니다. 9가지의 ‘행복선언’을 시작으로 6개의 ‘대당명제’를 덧붙였습니다. 율법을 재해석한 6가지의 ‘대당명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내지도 말라”, “남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라”, “아내를 소박하지도 말라”, “맹세하지도 말라”, “보복하지도 말라”, 그리고 “원수도 사랑하라”. 이러한 대당명제의 결론은 물론 마지막의 “원수도 사랑하라”입니다. 이로써 마태오는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는 율사로서의 예수님의 이미지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주제가 되는 말씀을 레위기 11장 45절을 인용하여 이어서 기록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48)
마태오 사가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다다른 결론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완전한 사람”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깊은 수행을 통해 완덕에 이르는 것도 아니며, 예수께서 재해석하신 율법의 정신대로 행하고 지키는 자가 “완전한 자”입니다. 루가복음이 이 말씀을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라고 기록한 것과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아마도 루가의 진술이 ‘예수 어록’과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는 “자비로운,오이크티르몬οἰκτίρμων” 대신 “완전한, 온전한”이란 뜻의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텔레이오스’는 복음서 중에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 단어로 마태오복음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완전함에 이르러야 함을 보여줍니다. 대당명제의 명령을 지킬 때, 특히 산상수훈의 정신인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대로 행할 때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자비’를 강조한 루가복음과는 다른 교사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마태오복음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실천하기란 매우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크 데리다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엄격한 종교적 윤리나 율법은 오히려 ‘위선’을 낳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위선’이 위험한 이유는 ‘위선’은 자기 자신에게 범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베푸는 것” 즉 타인이나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선’은 무엇입니까? ‘거짓 위僞’ ‘선할 선善’.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태오 기자가 ‘행복선언’과 율법을 재해석한 ‘대당명제’ 이후에 오늘 ‘위선’과 관련된 말씀을 배치한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는 ‘자선’, ‘기도’ ‘단식’ 등 신심 활동을 통해 드러난 인간 위선의 모습을 적나라게 보여줍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사들이 실제로 그런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남에게 자선을 베풀 때 만천하에 소문내고, 기도를 통해 자신의 신심의 깊음을 자랑합니다. 또 단식을 할 때는 동네방네 소문을 내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 합니다. 이런 행태는 비단 유대교뿐만이 아닐 겁니다. 우리의 종교 생활 속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윤리적 기준은 오히려 사람을 위선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윤리적 기준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명하신 것일까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루가 18:27)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높은 윤리적 기준 설정은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합니다. 인간은 아무도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은 인간에게 좌절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는 행위만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의로움은 ‘은총’이 더해져야지, 우리의 행위나 선행의 결과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성화는 오직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오직 은총(Sola Gratia)으로!”.
구약의 율법이 사도 바울로의 말처럼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 은총의 시대인 성령의 시대에는 율법을 재해석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합니다. 즉,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행함이 아니라 ‘은총’에 더 방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선행과 실천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함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이 있기에 성덕의 과정에서 ‘지향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향성’은 희망을 견인합니다.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는 지향성은 ‘성덕의 과정’을 온전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필립 3: 14)
사도 바울로는 여기에서 ‘완전하다’란 동사형 ‘텔레이오우τελειόω’를 사용합니다. 마태오가 사용한 형용사 ‘완전한, 텔레이오스 τέλειος’와 같은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한 부분은 “목표를 향한 선한 달음질”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올바른 지향점’을 제공하고, 우리는 그 지향점을 희망으로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재가 축적되다 보면 최후에 은총으로 그러한 “진정한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생각한 것입니다. 목표 없이 달음질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우리의 선행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노력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노력에 은총을 더하십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느님 간에 형성된 신앙의 실존적 양태입니다. 틸리히의 말처럼 한 개인의 “윤리적 결단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서가 언급한 ‘위선’은 우리 자신을 거짓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만듭니다. 마치 자신이 신앙의 방향키를 잡은 듯 착각하여 자신을 포장하고 기만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국에는 허공을 향해 헛손질을 날리는 권투선수처럼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폴 틸리히의 언급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행동에 따라 다르게 반응합니다. 논리상 이는 하느님이 부분적으로 인간에게 의존함을 뜻합니다. 인간이 이전과는 달리 행동한다면 하느님은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폴 틸리히
이것이 인격으로 오신 예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실존입니다. 결국 우리의 윤리적 결단, 즉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대한 결단이 향후 우리의 신앙과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를 두려워하거나 그것에 집착하기보다 현재의 우리의 결단과 과정에 더 집중을 해야 합니다. ‘위선’은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자선’, ‘기도’, ‘단식’
이 세 가지가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순절을 지키며 우리의 신심 활동에 대해 성찰하라는 메시지일 겁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사랑을 베푸는 것에 대해, 기도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회개하고 단식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때보다 우리는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심 활동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는 ‘위선’을 버리고 깊은 영성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이상과 지향점은 예수님처럼 율법 정신의 지고한 윤리적 기준에 두고, 우리의 실천은 실생활에서 가능한 것부터 은밀하게 조금씩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심 활동의 이상은 높이 세우더라도, 실천은 거북이처럼 한발 한발 자신의 처지에 맞는 실천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즐겨하던 것들을 조금씩 줄이고, 평소에 하던 지출을 줄여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창하게 지키기 어려운 기도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단 1분이라도 조금씩 기도를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루 세 번 식사 기도가 아닌 단 1분이라도 일상 속에서 조금씩 기도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무리한 단식보다는 조금씩 절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위선’보다 훨씬 우리의 신심 활동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한발 한발 나가다 보면 어느새 천리길도 다다를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의 ‘재 바름’이 이러한 작은 실천을 위한 결단의 징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재의 수요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지으신 만물을 극진히 사랑하시며, 죄를 통회하는 모든 이를 용서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진심으로 죄를 통회하고 탐욕과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온전한 구원을 바라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요엘 2:1-2, 12-17
1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라.
.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떨도록
.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보를 울려라.
. 야훼께서 거둥하실 날이 왔다.
.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2 어둡고 음산한 날,
. 짙은 구름이 덮인 깜깜한 날,
. 산들이 까맣게
. 수도 없이 많은 무리가 덮쳐온다.
. 이런 일은 전에도 없었고
. 앞으로도 천만대에 이르도록
. 이런 일은 다시 없으리라.
. …
12“그러나 이제라도,
. 야훼의 말이다,
.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너라.
.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13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너라.
. 주는 가엾은 모습을 그냥 보지 못하시고
. 좀처럼 노여워하지도 않으신다.
. 사랑이 그지없으시어
. 벌하시다가도 쉬이 뉘우치신다.
14 혹시 마음을 돌이키시어
. 재앙을 거두시고 복을 내리실지
. 그 누가 알겠느냐?
.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바칠
. 곡식과 포도주를 내려주실지 그 누가 알겠느냐?
15 시온 산 위에서 나팔을 불어라.
. 단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어라.
16 백성을 불러모으고,
. 거룩한 대회를 열어라.
. 노인들을 불러모으고
. 어린이들을 모아들여라.
. 젖먹이도 오라고 하여라.
. 신혼 부부도 신방에서 나와 모이게 하여라.
17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를 오가며
. 야훼를 섬기는 사제들아, 울며 빌어라.
. “야훼여,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 당신의 유산으로 삼으신
. 이 백성이 남에게 욕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 ‘너희 하느님이 어찌 되었느냐?’며
. 손가락질받지 않게 하여주십시오.”
시편 51:1-18
1 하느님, 선한이여,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 어지신 분이여,
. 내 죄를 없애 주소서.
2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
.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3 내 죄 내가 알고 있으며 ◯
. 내 잘못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4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지은 몸, ◯
.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입니다.
¶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
.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습니다.
5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
.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6 당신은 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니 ◯
. 지혜의 심오함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7 정화수를 나에게 뿌리소서, 이 몸이 깨끗해지리이다. ◯
. 나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8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 주소서. ◯
. 꺾여진 내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9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
. 내 모든 허물을 없애 주소서.
10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
.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 주소서.
11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 내지 마시고 ◯
. 당신의 거룩한 뜻을 거두지 마옵소서.
12 그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
. 변치 않는 마음, 내 안에 굳혀 주소서.
13 죄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
. 빗나갔던 이들이 당신께로 되돌아 오리이다.
14 하느님, 내 구원의 하느님,
. 죽음의 형벌에서 이 몸을 건져 주소서. ◯
. 이 혀로 당신의 정의를 높이 찬양하리이다.
15 나의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
. 이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16 당신은 제물을 즐기지 아니하시며 ◯
.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하십니다.
17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
.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
. 당신께서 얕보지 아니하십니다.
18 어지신 마음으로 시온을 돌보시어 ◯
.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고린 5:20하-6:10
5:20 …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이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 21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2 하느님께서는,
. “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 네 말을 들어주었고
.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 이사 49: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우리가 하는 전도 사업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6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10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 6:1-6, 16-21
1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2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3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5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17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18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19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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