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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 결단" - 평지설교 3

James Chae 2022. 2. 26. 14:43

2022.2.27. 연중8주일 감사성찬례

이사 55:10-13 / 시편 92:1-4, 12-15 / 1고린 15:51-58 / 루가 6:39-49

 

 

궁극적 결단” - 평지설교 3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오늘 복음서 말씀은 여러 가지 단절어들을 모아서평지설교 결론을 도출하는 부분입니다. 살펴보면소경 길잡이의 비유’, ‘제자가 스승보다 높아질 없다는 말씀’, ‘ 속의 들보 비유’, ‘좋은 나무, 좋은 열매 비유’, ‘반석 위에 세운 비유등입니다. 모든 단절어들의 주제는 하나로 집약됩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루가복음은 평지설교를 제자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말인즉 예수의 가르침대로 제자들이 행하라는 명령을 주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나도 스승만큼 밖에는 되지 못한다. (루가 6:40)

 

제자가 아무리 깨달음을 얻어도 스승보다 높아질 없지만, 스승만큼은 성장할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더도 말고 스승인 예수께서 사신 그대로, 가르침을 본받아 똑같이 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율법의 형식과 모양만 있고 율법의 정신인사랑의 실천 없으면소경 길잡이 다를 것이 없다고 강조하십니다. 명쾌하고 분명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이 우리 인간 실존과 괴리가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매우 주저하게 되고, ‘결의론적으로 말씀을 해석하게 됩니다. 물론 제자들 또한 그러했을 것입니다. 행함에는 다양한 변수와 상황들이 따르게 마련이고, 인과율대로 선을 행하면 반드시 선한 결론이 난다는 확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착하게 살다가 뒤통수를 맞는 일도 허다한 것입니다. 선한 행위가 선한 결과를 견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가 선을 행하는 주저하게 만듭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루가 6:43-45)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없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면서 또한 루가 기자의 확신인 같습니다. 얼핏 들으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묵상해보면선한 사람 누구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론적인 정의가 아님은평지설교전체 문맥에서 읽힙니다. ‘선한 사람 앞에 언급된좋은 나무 뜻합니다. ‘좋은 나무 좋은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좋은 나무’, ‘선한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행하는 사람 뜻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 왜냐하면열매 선한 행실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악한 사람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뜻함을 있습니다. 결국선한 사람악한 사람 결정짓는 것은 타고난 선재적 인간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위로 말미암아선과 이라는 실존적 양태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여기에 추가됩니다.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 (루가 6:46)

 

이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루가 기자가 첨언한 구절일 가능성이 큽니다. , 말씀을 듣고 있는 대상들을 염두에 말이지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루가공동체와 메시지를 듣고 있는 현재의 우리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를주님, 주님!’하면서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기도도 드리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주님의평지설교처럼 행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상황논리와결의론(casuistry)’ 따라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루가복음의 공동체도 오늘날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평지설교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실제 삶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이 보여주신자기비하, 자기희생케노시스κένωσις’ 대로 우리도 그대로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할 우리는 결국하느냐 마느냐 양가성의 감정에 휘말리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주신 것일까요? 이는 마치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 심으셔서 인류를 죄악의 유혹에 빠지게 하셨을까?라는 질문과 유사합니다. 

 

인간에게는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자유와 선악과를 따먹을 자유, ‘원수도 사랑하거나 미워할 자유 있습니다. 이는 철저히 우리의선택과 결단 의존합니다. 이를 우리는자유 의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묵상할 창세기를 무시하고 묵상할 없습니다. 창세기는 우리 인간이하느님의 형상대로, 자유 의지 지닌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만약자유 의지 없다면 인간은 오늘날 AI처럼 입력된 값에 따라 작동하는 로봇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자유 의지 없는 존재와는 결코 사랑의 관계를 만드실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신의 한계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 자신에 의해만 제한되십니다. 사랑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이것이존재존재자 관계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하느님 본인도 결국에는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벗어나서 우리 인간과 관계할 없음을 이미 창세기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이러한 관계가계약 관계로 표현되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개인과 부족을 통해 관계를 이어오다가, 종국에는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의 관계로 발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구약의 계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약속 됩니다. ‘사랑의 약속’. 그것은 세상 끝날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약속이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은 철저히사랑의 속성 제한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신 것은 그가 자신 안에 설정하신사랑의 관계 기초한 그분의인격으로 드러납니다. 초월적 존재는 존재자와 관계할 인격적으로 관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는 상호 관계가 인격적으로 형성되어야 상호 사랑의 관계가 가능합니다. ‘비인격적 것과는 사랑의 관계가 성립될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자유 의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 존재에 참여하고 하느님과 합일에 다다를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있습니다.  자유 의지 어떻게 발현됩니까? 오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루가 6:45b)

 

단지에서 나오는 뿐이겠습니까? 결국자유 의지 우리의 행위를 통해 발현되게 마련입니다. 우리마음속에 가득 바로 우리의자유 의지입니다. 의지에 따라 우리는결단 하고, 결단 따라 우리는 행동하게 됩니다. 모든 우리의 행동은 이미 우리 마음속의결단 통해 미리 결정됩니다. ‘결단다음에행동과 행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오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마태오 5:27-28)

 

자유 의지 의한 마음의 결단은 이미 행위가 있기 전에 벌써 죄로 판명이 납니다. 그래서문화신학으로 유명한 조직신학자 틸리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윤리적 실존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의 명령’은 ‘인격적 결단’을 요구합니다. 모든 결단은 긴급합니다. 그것은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 폴 틸리히 -

 

이러한결단 틸리히는궁극적 결단이라 명명합니다. 그가 사용한궁극적이란 말은 영어로 ‘The Ultimate’라고 합니다. 이는궁극적인’, ‘최종의’, ‘최고의’, ‘근본적인이란 뜻입니다. 틸리히는 하느님에게 적합한절대적이란 말에 상응하는 인간 편에서의 응답으로궁극적이란 말을 사용한 같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르 12:30)

 

이는 신명기 6 4-5 말씀을 예수께서 인용하신 것으로 3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틸리히는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자신의 신학적 용어로 명명하여 자신의 신학의 근본 개념으로 삼았습니다. “궁극적이란 말은신앙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존재의 상태 뜻합니다.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표현할 있는궁극적 고백과 반응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없는 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자유 의지 인간 개인의인격으로 드러나게 되며 이는 최종적으로궁극적 결단 통해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는 바로 인간 실존 속에서윤리적 형태 발현됩니다. 

 

존재이신 하느님께서존재자 인간에게 계시할 있는 유일한 통로는사랑뿐입니다. 그분의 사랑 만이 초월과 내재를 소통하게 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보내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러한사랑 구속(?)되는지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한은총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복음의 핵심에 다다릅니다. 우리가 수도 없이 듣고 들었던 말씀.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16)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사랑이 아니셨다면 인간은 존재를인격적으로 전혀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존재에 대한 물음을 찾지만 종국에는 존재 안에서 소멸되는 인간의 허무를 만납니다. 우리 복음은 인간을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존재자로 존재 안에 일치시킵니다. 

 

이제 3회에 걸친평지설교 마무리하며,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 결국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가식적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를 넘어설 없습니다. 그러나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1 고린 3:7) 사랑의 속성에서 하느님도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시고, 우리 인간 어느 누구도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랑은 우리 인간의자유 의지조차 내어놓게 만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준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양가적 감정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궁극적 결단 감행해야만 합니다. 순간의 결단이 향후 존재자의 실존을 결정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해도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풍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사랑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궁극적 결단 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틸리히가 말한 대로 그러한궁극적 결단 시급을 다투고지금 여기라는 현재성을 요구합니다. 한마디로지금 바로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말지를 말입니다. 당장에는 손해를 보는 같지만, “홍수가 나서 물이 들이칠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윤리적 실존 기준이 매우 높음에 당황되지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안일함 속에서 그동안 윤리적인 부분을 등한시하고 살았던 우리의 삶을 벗어나행위로 믿음을 보이는 실천 통해 우리의 믿음을 증거 때가 같습니다. 

 

이제 시작되는 사순절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행위가 어긋났던 부분들을 점검하고, 매사에 언행일치의 높은 수준의 윤리적 성장을 이뤄가야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말은 외면해도, 우리의 행동의 진실성은 분명히 알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사순절을 통해 각자가궁극적 결단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주님 안에서 그러한 결단을 통한그리스도의 제자도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결단에 은총으로 함께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다해) 연중8주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죄의 억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영광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55:10-13

10“하늘에서 쏟아지는 , 내리는 눈이
.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11   입에서 나가는 말도
.     받은 사명을 이루어
.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12  이제, 너희는 기뻐 뛰며 길을 떠나
.     안내를 받으며 탈없이 돌아가리라.
.     너희를 맞아 산과 언덕들은 환성을 터뜨리고
.     들의 나무가 모두 손뼉을 치리라.
13  가시나무 섰던 자리에 전나무가 돋아나고
.     쐐기풀이 있던 자리에 소귀나무가 올라오리라.
.     이런 일이 야훼의 이름을 들날리고
.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표가 되리라.

 

 

시편 92:1-4, 12-15

1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     주님께 감사하며
.     이름을 노래하는 ,
.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으리까?
2    아침에 당신의 사랑을 알리며
.     밤마다 당신의 미쁘심을 전하는  
.     보다 좋은 일은 다시 없습니다.
3     비파와 거문고를 뜯으며
.     수금 가락에 맞추어 노래합니다.
4    주여, 당신의 업적 생각하며
.     몸은 행복합니다.
.     손수 이루신 일들을 생각하며 환성을 올립니다.
12  의로운 사람아,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     레바논의 송백처럼 치솟아라.
13  우리 주님의 집안에 심어진 자들아,
.     하느님의 뜰에 뿌리를 내리고 우거지거라.
14  늙어도 여전히 열매 맺으며
.     물기 또한 마르지 말고 항상 푸르러라.
15  그리하여 나의 반석이신 주께서는
.     굽은 없이 곧바르심을 널리 알려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15:51-58

… 51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52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53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54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때에는,
.   “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55  
죽음아, 승리는 어디 갔느냐?
.    
죽음아, 독침은 어디 있느냐?”
.   
 이사 25:8, 칠십인역 호세 13:14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루가 6:39-49

39 예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있겠느냐? 그러면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가 스승보다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배우고 나도 스승만큼밖에는 되지 못한다. 41 너는 형제의 속에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 더러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 하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보여 형제의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있다.”
43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없다. 44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없다. 45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46 너희는 나에게주님, 주님!’ 하면서 어찌하여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 47 나에게 와서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다. 48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물이 집으로 들이치더라도 집은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49 그러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큰물이 들이치면 집은 무너져 여지없이 파괴되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