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영원성에 대한 정열”

James Chae 2022. 8. 13. 21:47

 

 

2022.8.14. 연중20주일

예레 23:23-29 / 시편 80:1-2, 8-9 / 히브 11:29-12:2 / 루가 12:49-56

 

영원성에 대한 정열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말씀은 여러 개의 단절어들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주님께서 발설하셨을지 추측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상황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이 전승된 자료들이기 때문입니다. 앞뒤 맥락이 빠졌기 때문에 말씀의 진의를 빗나갈 위험이 있습니다. 루가는 이러한 단절어들을종말론적인관점에서 여기에 모아 놓았습니다. 세부적으로 갈라 보면 4 정도로 나눌 있습니다. 49, 50, 51절에서 53, 54절에서 56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절어들을, 쉽지는 않지만, 모두 주제로 연결하여 묵상을 수도 있고, 이를 각각 구분하여 개별적으로 단절어들을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상황이 생략된 단절어를 해석할 때는 상당한 신중함이 요구됩니다.

 

저는 오늘 49 말씀과 50 말씀 중심으로 이를 다른 단절어들과 연결 지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가르멜산 위에서 바알 사제들과 투쟁했던엘리야의 연상시키고, 오순절에 제자들 위에 임했던불의 같은 연상시킵니다. 집회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예언자 엘리야가 불과 같이 일어났으니,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집회 48:1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 20:9

 

 

그리고 오늘 읽은 1 독서에서도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예레 23:29 a)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서 유추되는 것은주님의 말씀이고주님의 성령입니다. 그리고 불은 우리 내면과 영혼을 뜨겁게 태우는열정’, ‘열망’, ‘정열등과 같은파토스 pathos’ 연상시킵니다. 그러므로 불은세례 임하시는 성령’(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이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암브로스)이고,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예루살렘의 키릴루스)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말씀을 보면,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대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너무나 많은 핍박을 받아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 같습니다. 그러나뼛속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주님의 말씀, 영원성에 대한 정열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정열뼛속에서 심장으로 불처럼 타올랐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지친 예레미야는 침묵을 하고 요나처럼 어디론가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하느님 앞에 개인에게는 그럴 없는 경우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 있는, 그의 존재 안에 이미 내재된영원성에 대한 정열때문입니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정열 우리 영혼을 휘감는 거부할 없는입니다. 그것은이기에 우리의 이성을, 우리의 경험을, 우리의 모든 지식을 일순간에 태워버립니다. 우리의뼛속에서 솟아나는 정열 우리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형상에서 솟아오르는영원성 향한 갈망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틸리히는 이를궁극적 관심이라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는 누구나 영적으로 초월을 향해비약하고자 하는 열망이 선재함을 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주님께서불을 지르러 왔다 표현은 그러한정열 관련된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시는복음 하느님의 말씀과 경륜 자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신의 사역과 열정을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는복음 듣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불이 번지듯이, “영원성에 대한 정열 사로잡히길 바라셨습니다. 그러한 정열로 세상이 활활 불타오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으로 세상이 전복되고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길 열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주님의 바람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고난의 세례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인류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진노를 그분은 십자가에서 혼자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성육신의 비애입니다. 인간은 실낙원 주님을 배반했고, 배반의 역사는 오롯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없다고 변명할 없습니다. 그리고 배반 역사는 결국 골고다 언덕에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배반 여전히 오늘날의 우리의 실존 가운데 깊이 배어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애써 하느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이사 53:1

 

 

무지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무심함 때문일까요? 

초월이 육신을 입은성육신의 신비 모두에게 감춰있었습니다. 제자들도 오순절 전까지 그러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반드시고난의 세례 받으셔야 했는지과거에나 오늘이나 우리는 달콤한 신앙적 위로와 종교적 교리에 익숙해져서 그러한고난의 세례 대해 무지하고 무심해진 오래입니다. ‘고난의 세례 대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 10:38

 

 

고난의 세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를 기다리는 주님의 초조함이 오늘 읽음 복음서 말씀에 새겨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를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라고 의역했지만,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쉬네코συνέχω’입니다. 이는 “어떤 것이 산산조각이 나지 않도록, 무언가가 그것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붙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그러니 우리 말로는초조하다’, ‘전전긍긍하다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동사 하나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성육신하신 주님께서는 그런 극심한 고통을 느끼시면서까지고난의 세례 물리치지 못하셨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기에 우리와 똑같이 죽음과 고난 앞에서 떨고, 초조하셨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그러한 주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거부했기에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전혀 느끼시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은 예수는 예수의 환영이라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성복 시인의 표현대로육체가 없었으면 겪지 않았을…”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러셨을까요? 그분께서는 그것을 피할 권한이 전혀 없으셨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의 실존과 겹쳐진 초월은 그렇게 육신 속에서 육신의 유한함을 몸소 느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실존입니다. 유한한, 썩어 없어질 육신을 가진 인간이 썩지 않을 영원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성육신 아니고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간에 놓인 심연의 간격은 흘림 없이는’, ‘고통이 없이는결코 매워질 없는 간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주님께서 겪으신 고통만큼의 거리감이 설정된 것입니다. 실낙원의 아픔은 오직어린양 피로써만 극복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랑한 하느님의 경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스스로 설정하신 정의의 심판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 이성으로는 그러한 하느님의 경륜과 영원성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영원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육신을 믿는 신앙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유한함에서 영원성으로의비약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증명하신 것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분의고난의 세례그리고 그분의부활의 영광 모두 우리에게 영원성에 대한 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인간이시고, 완전한 하느님이신 성육신하신 주님에 대한 우리 교회의 고백입니다. “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반드시 핏값으로 용서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실존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영원성을 상실한 우리 인간이 성자 하느님을 통해 영원한 존재로 거듭날 있는 가능성은 이러한 성육신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경륜이기에 주님께서는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말들이 우리의 이성과 생각 안에서만 맴돌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모든 하느님의 경륜이 이해될 있는 교리로 확정이 되는 순간 우리는 종교적 시스템과 종교적 위로 체계를 갖게는 됐지만, 반대로영원성에 대한 정열 잃어가고 있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우리의 예배는정열보다는 종교적 의무와 신앙적 위로에 의존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항상 신앙과 분리되고, 우리의 말과 행동도 서로 엇박자를 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가 12:51

 

영원성에 대한 정열 임하는 곳에는 양가성의 마음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A 또는 B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 내면에 심긴영원성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갈등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자아와의 관계 때문에 우리는 내적인 분열을 종종 겪습니다. 또한 가족 간에도영원성 상호 갈등의 원인입니다. ‘영원성 대한 믿음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리 가족이라도 서로가 지향하는 점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영원성 결코유한성과는 함께할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성에 대한 정열 사랑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랑의 관계에서 우선됩니다. 마태오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37

 

 

주님께서는 부모나 자식,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관계보다 우선하는 관계, 하느님 앞에 개인으로서의 관계를 우선하라는 것입니다(교부 암브로시우스). 우리의 모든 관계들 속에서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의 때가 바로종말의 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영원성유한성 더욱 강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할 우리는 어떤 선택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징조 재해 상황을 예측하듯이 우리 안에영원성에 대한 정열 우리로 하여금지금 여기 종말의 때임을 확신하게 합니다. 루가복음은 시대를 이러한 종말의 , 교회의 시대 보고 있습니다. ‘종말의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에서영원성에 대한 정열 사라진다면 우리는 세상의 급류에 휩쓸려 버리고 것입니다. 

 

영원성에 대한 정열 우리를 종교적 교리와 종교적 의무의 속에서 이상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정열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성령의 뜨거움 속에 내어 맡기게 합니다. 그래서영원성에 대한 정열 우리로 하여금 뜨겁게 기도하게 하고, 뜨겁게 사랑하게 합니다. 불붙지 못하는 젖은 장작 같은 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성령으로 말미암는 뜨거운 불꽃이 우리 가운데 활활 타오르길 기도합니다. 우리의볏속에서부터 우리의 심장을 관통하는영원성에 대한 정열 우리 모두를 휘감아 하느님의 은총의 불꽃이 우리와 우리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도 옮겨 붙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할 우리 모두는 진리의 자유함을 속에서 느낄 있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 연중20 (다해) 1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구하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시어,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죄를 버리게 하시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끝까지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예레 23:23-29

23  말을 똑똑히 들어라.
.      내가 가까운 곳에만 있고
.       곳에는 없는 신인 아느냐?
24  사람이 제아무리 숨어도
.       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      똑똑히 들어라.
.      하늘과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
.      똑똑히 들어라.

25 예언자라는 것들이 이름을 팔아 예언하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 하면서 거짓말하는 것도 나는 들었다. 26 망상을  말이라고 전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말이라고 전할 것인가? 27 예언자라는 것들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백성을 속여 이름을 잊게 속셈이다. 조상들도 바알을 섬기다가 이름을 잊지 않았더냐? 28 꿈이나 꾸는 예언자는 이야기나 하여라. 그러나  말을 받은 예언자는 말을 성실하게 전하여라.

.      내가 똑똑히 말한다.
.      검불과 밀알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9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      똑똑히 들어라.

 

 

 

성시_ 시편 80:1-2, 8-9

1    이스라엘의 목자여,
.     요셉 가문을 떼처럼 인도하시는 이여,
.     귀를 기울이소서.
.     거룹 위에 좌정하신 분이여,
2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나쎄 가문 앞에,
.     햇빛처럼 나타나소서.
.     힘을 떨치고 오시어, 우리를 도와주소서.
8    이집트에서 뺏어 포도나무
.     이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자리에 심으시고,
9     앞의 땅을 가꾸시어
.     뿌리박고 널리 퍼지게 하셨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히브 11:29-12:3

29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집트 사람들도 그렇게 건너려고 했으나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30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으로 예리고 성을 이레 동안 돌자 성은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31 창녀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자기 편처럼 도와주어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당하는 멸망을 같이 당하지 않았습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옙타, 다윗, 사무엘그리고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하자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고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고 사자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피하였고 약했지만 강해졌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돌아오는 식구들을 만난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나은 생명을 누리려고 석방도 거부하고 고문을 달게 받았습니다. 36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38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39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2: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복음서_ 루가 12:49-56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50 내가 받아야 세례가 있다. 일을 겪어낼 때까지는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51 내가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이 사람을 반대하고 사람이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

54 예수께서는 군중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비가 오겠다.’ 말한다. 과연 그렇다. 55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날씨가 몹시 덥겠다.’ 말한다. 과연 그렇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시대의 뜻은 알지 못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