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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현재: 종말의 현재성”

James Chae 2022. 11. 27. 06:52

2022.11.27. 가해. 대림1주일 

이사 2:1-5 / 시편 122 / 로마 13:11-14 / 마태 24:36-44

 

기다림의 현재: 종말의 현재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교회력은가해입니다. 우리는가해에는 주일마다 마태오복음을, ‘나해에는 마르코복음을, ‘다해에는 루가복음을 각각 읽습니다. 요한복음은 특별 절기마다 사이사이 나눠서 읽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 예배에만 충실히 참석하면 3년에 번씩은 복음서를 모두 읽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력에 읽는 복음서를 묵상하면공간복음요한복음 특징과 차이점 그리고 공통점 등을 있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사가들의 신학과 그들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당대의 교회에 그것을 적용했는지도 더불어 알게 됩니다. 이것이 3 주기의 주일 성서정과의 특징입니다.

 

새로운 교회력의 시작을 우리는 대림절로 시작하면서세상을 구원하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세상을 심판하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 대한 기다림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가해 대림절의 말씀은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은 내용이 간단하면서도 너무나 명료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종말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하느님의 아들도 모른다. 2) 종말은 오직 하느님만 아신다. 3) 그러므로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항상 깨어있으라.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복음이 주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말씀들은예수어록 마태오의 특수자료를 첨부하여 구성되었습니다. ‘예수어록 예수님의 전승된 말씀이 상황이나 배경 설명 없이 예수님의 어록 형태로 전승된 자료를 말합니다. 배경이나 상황 없이 가르침의 핵심 메시지만 담은 말씀으로 어떤 상황에서 발화되었는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들은 이러한 예수어록 전승자료를 다루면서 적절한 상황묘사나 뜻에 대한 해석을 덧붙여 본문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사가들의 편집을 통해 복음사가들의 신학적 특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영화 이야기를 하고 가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영화감독고레에다 히로카즈’. 그의 영화 가장 제게 충격을 줬던 영화는아무도 모른다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철저하게 사회에서 소외된 어린아이들로만 구성된 가족 이야기. 영화를 보는 내내 끊임없이 반문하게 했던 말이 바로 아이들의 이웃들은 정말 몰랐을까?”입니다. 도시 복판에서 어린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방치되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대도 주변 사람들은 정말 몰랐을까? 물론 정말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아무도 몰랐다 말은 단지 사건의 공모에서 벗어나려는 우리들의 심리적 변명으로만 들립니다. 그들의 이웃은 아이들만이 살고 있는 것을 알았고, 매일 마주치면서 냄새나고, 수척해져 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충분이 짐작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이웃은 어느 누구 하나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기 싫기도 했겠지만, 그냥 자신의 일이 아니니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이웃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태도. 무심함과 무관심으로 그들의 모름이 정당화될 없다는 점을 영화는 철저하게 고발하며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을 기소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데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강도짓하지 말라는부정 명령만큼이나 똑같은 비중으로 다뤄져야 합니다. 우리는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니,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은연중에 자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하신 것과 하라고 하신 모두 같은 분의 입에서 발화된 명령 아닌가요? 칸트는 이를정언 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이라 했습니다. ‘정언 명령 명령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행할 것이 요구되는 윤리적 법칙을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도 살인죄만큼 치명적인 죄입니다. ‘ 이웃을 사랑하라 명령은 적극적이며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것도 몰랐다 말로 사랑하지 않은 죄를 결코 회피할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검찰에 불려 수세에 몰리면 하는 말이나는 몰랐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입니다. 세상 법정은몰랐다라고 우기고, 증거가 없으면 처벌하기 힘들지만, 하느님의 법정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주님 앞에서  몰랐다라고 변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종말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말씀에는 모종의 역설이 숨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정말 역사적 예수는 종말의 때를 몰랐을까요?

물론 오늘 말씀에서아무도 모른다 언급에는 역사적 예수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육체적 한계에 계셨기 때문입니다(히브 4:15). 종말의 때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를 살펴보면 역사적 예수께서도 종말의 때를 인지하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때에 대한 많은 전승 자료가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주님께서는 자신을 칭할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번도 자기 스스로를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원래 히브리어의아담의 아들’(בן אדם, ben ‘adam)로써 관용적으로 사람’, 개인으로서의 자신 뜻하던 말이었는데, 이것이 후기 히브리 묵시문학 속에서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전용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다니엘서 7 13절인데, ‘사람의 아들 세상 끝날에 하느님의주권과 영화와 나라 물려받을 자로 칭하고 있습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신약에서 예수를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됐습니다. 주님께서 칭호를 사용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 간에 많은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께서 칭호를 묵시문학에서 언급한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하신 것은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해석입니다. 역사적 예수께서 자신을 다니엘서에서 언급한사람의 아들 자기 동일시 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는 종말의 정확한 시간은 몰랐지만, ‘그때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할 있습니다. 이미 메시아의오심 시대가 종말의 때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종말은 아무도 모른다.”

말씀은 또한 주님께서 우리 시간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절대적이라 생각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도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2 베드 3:8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측정된다고 했지만, 우리 성서는 시간이 하느님을 기준으로 상대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그분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있습니다. 그때는 시간 속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권한 속에 있는 것이기에 그때는 철저히 비밀 속에 숨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대에 대한 복음적인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이 종말의 때임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 속의 이웃들이 모르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전혀 종말의 때를 모른다고 말할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노아의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언덕 위에 방주를 만들고 있을 사람들은 비웃기만 했지 그의 말에 기울지 않았고, 그를 도우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회개의 기회 또한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는 시간만큼이 그들에게 주어진회개의 였습니다. 기간이 인간의 시간으로 10 일지 20 일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회개를 하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노아가 외치는복음 소리에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우리는노아의 처럼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통해 종말의 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충분히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루가 12:54-56; 마태 16:2-3)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계십니까? 바로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망한다 것입니다. ‘노아의 처럼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 베드 3:9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것이다.”(2 베드 3:10)라고 베드로가 외친 것처럼 오늘 복음서도 똑같은 말씀을 합니다. 그러니깨어 있으라”.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을깨어 있으라라는 말이 받습니다. 주님께서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이래로 우리는 현재에도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날이 더디 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를 주님께서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대한 많은 메시지를 성서를 통해 듣고, 세상의 전쟁과 재앙, 환경 파괴의 소식을 듣고 목격하고 있는 우리는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모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진지하게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은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때에 닥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현재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지 종말이 닥치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종말은 철저하게 우리의 현재의 삶을 규정합니다. 종말을 믿는다면 종말을 믿는 사람처럼 살아가십시오. 현재의 자신을 자꾸 미래의 나에게 맞추어 현재를 좌절하며 보내시지 말기 바랍니다. 현재에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욕심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에 풍족하시다면 더욱 가난한 이웃들과 은총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내일의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의 행복을 위해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는 우화개미와 베짱이속의베짱이 자신의 현재를 마음껏 노래하고 즐기며 축복했습니다. 왜냐하면 베짱이의 시간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이 추워지기 전에 모두 죽습니다. 개미도 현재에 충실하며 겨울의 때를 준비했습니다. 개미에게는 추운 겨울의 시간을 이겨낼 준비와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베짱이와 개미는 서로의 존재 양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와 삶을 비교하면 되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 있고, 존재의 양식은 모든 개인마다 다릅니다. 자족하는 마음,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마음. 여러분의 행복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지, 결코 남과 비교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시간을 결코 미래의 시간과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존재의 의지가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소유로, 남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결코 인간은 행복해질 없습니다. 여러분이 건강하다면 남과 비교해서 건강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면 남과 비교하여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상황이 어려운 것뿐입니다. 남들은 잘되는 같은데 나는 모양 꼴이지?라고 자신의 존재를 학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공중의 새보다 귀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을 살고 있고, 우리는 현재 주님의 축복을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현재에 집중하면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자유로울 있고 현재에 있는 감사의 조건들을 발견할 있습니다. 그러면 남을 챙겨줄 여유 또한 생깁니다.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 새벽. 이것이 우리의 현재이고 우리의 종말의 시간들입니다. 현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모든 염려, 걱정, 근심은 번뇌이고 망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직시하며 살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어정쩡하게 미래의 막연한 시간 속으로 집어던집니다. 그곳은 오직혼돈, 카오스(Chaos)’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의 하느님이십니다. 대림절 첫날, 우리의 대림절이기다림의 현재’, ‘종말의 현재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끝으로 이번 수요일에 있을 대림절 특강의 교재로 사용될 키르케고르의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나오는 내용을 읽어드리며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공중의 나는) 새가 생계에 대한 염려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는 한 날을 다른 날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말씀대로 볼 때, 새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중에서)

 

우리는공중의 나는 보다 귀한 존재가 아닙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 대림1 (가해)

 

본기도

신실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어 구원의 약속을 변함없이 지켜주시나이다. 비오니, 그리스도꼐서 세상의 심팡과 구원을 위하여 다시 오실 우리가 기쁨으로 맞이하도록 항상 깨어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2:1-5

1    이것은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이 어찌 것인지를 내다보고 말이다.

2    장차 어느 날엔가
.     야훼의 집이 있는 산이
.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들리라.
3    수많은 민족이 모여와서 말하리라.
.   “,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길을 따라가자.
.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
4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5    , 야곱의 가문이여,
.     야훼의 받으며 걸어가자.

 

 

 

성시_시편 122

1    주님 집에 가자 ,
.     나는 몹시도 기뻤다.
2    우리는 벌써 왔다,
.     예루살렘아,
.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3    예루살렘아,
.     과연 수도답게 잘도 지어졌구나.
.     모든 것이 몸같이 잘도 짜여졌구나.
4    지파들이, 주님의 지파들이
.     이스라엘의 법도에 따라
.     주님의 이름 기리러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5    재판석이 거기에 있고
.     다윗 가문이 앉을 자리
.     또한 거기에 있구나.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 외쳐라.
.     집안에 평화가 있기를!
7    성안에 평화가 있기를!
.     궁궐에 평화가 있기를!
8    겨레, 벗들을 사랑하므로
.     크게 외치나니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9    우리의 주님이신
.     하느님의 집을 사랑하노니
.     너에게 복이 있으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로마 13:11-14

11 이렇게 살아야 하는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12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14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복음서_ 마태 24:36-44

36 그러나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7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38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39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그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40 때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43 만일 도둑이 시에 올는지 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것이다. 44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이다. 그러니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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