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7. 가해. 대림2주 수요일 / 성 암브로스(밀라노의 주교, 397년)
故 황귀남 별세기념성찬례
이사 40:25-31 / 시편 103:6-14 / 마태 11:28-30
“거룩한 본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짧은 복음서 말씀에는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가 이 말씀 속에 모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식들을 열심히 교육시키고 잘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녀들이 조금은 더 편안하고 안정되며 존경받는 직업을 가지고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우리의 정성을 다 쏟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많고 또 우리 자녀들과 같은 아이들도 넘쳐납니다. 안정되고 수익도 좋고 존경받는 직업은 매우 한정되고, 많은 사람들을 그 자리를 차지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도나도 과잉경쟁 속에 몰입하게 됩니다. 모두에게 기회는 주어졌지만, 모두에게 동일한 자원과 능력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행복의 길을 일찍부터 스스로 찾기보다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과잉경쟁체계에 내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정된 자원은 결국 한정된 사람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의 직업 체계는 피라미드식으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서있을 자리가 한정된 것입니다. 일찌감치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 그리고 자원에 집중해서 각자의 삶에 맞는 길을 찾았다면 아마도 우리들은 더욱 높은 질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율법도 그와 같습니다. 율법의 조문을 그대로 지키며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율법의 준수도 마치 직업의 피라미드처럼 지키는 자와 지키지 못하는 자 간에 계층을 만들게 만듭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러한 율법 준수의 삶에 가깝게 삽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율법을 조문대로 지키며 살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처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지 우리를 구원시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이스라엘은 오랜동안 율법을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를 구분하여 계층을 만들어 사람들을 옭아매었습니다. 율법을 조문대로 지킬 수 없기에 가식적인 종교인들을 많이 양산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식적인 신앙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는 조건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고, 지킬 수 없는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세상의 어느 철학자가, 어느 선인이 이러한 말을 자신 있게 말을 하던가요?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쉼’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의 본성을 정확하게 알라는 것입니다. 그 본성은 남보다 더 나은 직업, 남보다 더 많은 돈, 남보다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오염된 본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을 닮은 ‘거룩한 본성’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좋은 직업, 좋은 명예, 물질적 축복을 가진다고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라고 ‘거룩한 본성’은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무거운 조문들을 지키기 위해 죄책감과 무력감에 허덕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자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허덕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거룩한 본성’을 가진 존재라고 오늘 말씀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세속적 욕망의 멍에와 율법의 멍에와 전혀 다른 ‘거룩한 멍에’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그 ‘거룩한 멍에’는 바로 예수님의 본성과 일치합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은 ‘온유와 겸손’이라 부릅니다. 세속적 출세의 길과 율법 준수의 길은 같은 본성에 기반합니다. 바로 ‘욕망’입니다. 그것은 남보다 더 잘 되길 바라는 이기심과 경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온유함 (πραΰς)’은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본성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평화적으로 대하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온정을 다해서 대하는 태도입니다. ‘겸손함 (ταπεινός)’은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그분 앞에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으로 서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보다는 더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덕목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가지셨던 ‘거룩한 본성’입니다. 이 ‘거룩한 본성’은 여러분이 삶 속에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 잠시 고통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여러분이 결코 넘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우리는 오늘 故 황귀남 님을 기억하며 이렇게 모였습니다. 작년에 이어 저는 두 번째로 그분을 기억하는 감사성찬례를 집례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길을 예비하라”라는 제목으로 작년에 설교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스라엘이 야훼를 체험했던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에 기억함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갔던 것처럼, 故 황귀남 님을 기억하는 것, 그 기억 속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가 되고, 남은 가족의 내일의 희망을 오늘에서 찾게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거룩한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그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이면서도, 오늘 이 가족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본성’은 남편과 사별하시고 지난 15년 동안 자녀들을 돌보고 기도해오신 로이스 님 안에서도 발견되는 ‘거룩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故 황귀남 님은 이미 하느님의 품 안에 일찍 가셨지만, 지금 남은 가족에게 주어진 사명은 어머니를 통해 명확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계보인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그동안 주님 안에서 은총으로 받으신 ‘거룩한 본성’을 자녀들도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아버님을 기억하며, 또 어머님의 ‘거룩한 본성’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이 가정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기억과 거룩한 본성은 자손 대대로 끊임없이 축복 가운데 전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만큼 귀한 하느님의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9 b~3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무게는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멍에를 짊어지시기 전에 고통 속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멍에’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 겁니다. 이 말씀은 오직 ‘은총’의 관점에서만 이해 가능한 말입니다. 비록 세상의 짐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무겁고 어려워도 하느님의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이를 가볍게 짊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거룩한 본성’, 즉 ‘온유와 겸손’이 우리 가운데 아름답게 꽃피면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도 평온한 안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가 가벼움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율법과 세상적 출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우리 안에 있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 故 황귀남 님을 기억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과 모든 분들에게도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 대림2주 수요일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회개를 선포하며 구원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로 하여금 죄악과 불의를 물리치고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40:25-31
25“내가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 내가 누구와 같다는 말이냐?”
. 거룩하신 이께서 말씀하신다.
26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라.
.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 그 군대를 불러내시어
.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점호하시는 이는 그분이시다.
. 힘이 세고 기력이 장사이신 그분의 부르심에
. 누가 빠질 수 있으랴?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
.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두지 않으신다.
.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체도 않으신다.”
28 너희는 모르느냐?
. 듣지 못하였느냐?
.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29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30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31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성시_시편 103:6-14
6 주께서는 정의를 펴시고 ◯
. 모든 억눌린 이들의 권리를 찾아 주신다.
7 모세에게 당신의 뜻을 밝혀 주시고 ◯
.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장한 일을 알리셨다.
8 주께서는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
.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넘치신다.
9 끝까지 따지지 아니하시고 ◯
. 앙심을 오래 품지 않으신다.
10 우리 죄를 그대로 묻지 않으시고 ◯
. 우리의 잘못을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
. 경외하는 이에게 베푸시는 그 사랑 그지없으시다.
12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
. 우리의 죄를 멀리 치우시고
13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
. 주께서는 당신 경외하는 자를 어여삐 여기시니
14 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시며 ◯
. 우리가 한낱 티끌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복음서_마태 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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