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Amor Ex Nihilo 무로부터의 사랑”

James Chae 2022. 12. 18. 05:21

2022.12.18. 가해. 대림4주일
이사 7:10-16 / 시편 80:1-7, 17-19 / 로마 1:1-7 / 마태 1:18-25

“Amor Ex Nihilo 무로부터의 사랑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Creatio Ex Nihilo 무로부터의 창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떠한 질료도 사용하지 않고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히브리 사상에 기반하며,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현대 신학자 몰트만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해왔습니다. 과학에서는 빅뱅의 원인이 수소나 헬륨의 영향 때문이라 추측하고 있어 빅뱅 이전에도 이 우주에는 어떤 물질이 있었다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무로부터의 창조’는 과학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단지 신학적 진술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가 단순히 과학적 사실을 기록한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하고 계신지에 대한 진술임을 알기에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과학과 대립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과 인간이 관계하기 위해 빛과 시간 그리고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갈 공간 즉 ‘땅’이 창세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창세 1:1


여기에서 ‘하늘’은 하느님의 공간이고 ‘땅’은 바로 인간의 공간입니다. 하늘과 땅이 상호 관계하고, 그 속에서 인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의지와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 사랑의 징표로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또 이후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자신을 이 역사 속에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히브리적 생각은 철저히 하느님의 전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며, 영원불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하며 죄성으로 가득하고, 죽음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초월과 내재는 결코 하나로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 고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 세상이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무로부터 창조’를 하셨는지를 우리는 묵상해봐야 합니다. ‘무無’가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기도 하고, 단지 형체만 없었다고 말하기도 해서, 학자들 간에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합니다. 이러한 ‘무’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 동양사상에서는 이러한 ‘무’가 매우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도’, ‘기’, ‘음양’과 같이, 어떤 실체가 있는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어렴풋이 ‘느낍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앎’과 ‘깨달음’을 통해 이를 인지할 수 있는 ‘육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무’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하느님은 이 세상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소부재’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질료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하느님은 이 세상에 편재하시지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관계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과 형상의 특징입니다. 신의 형상을 만드는 순간 신은 ‘눈에 보이는 물질’로 대체가 됩니다. 장소와 시간을 갖는 것은 유한성 또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관계하시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편재하시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분다운 존재양태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느님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 사랑하고 관계를 만들어가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전설 이야기에 나오는 산신령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산신령은 ‘지역령’으로 자신의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에 나옵니다. ‘무로부터 창조’는 그분 자신이 창조의 원인임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창조의 전능’(키르케고르)입니다. ‘창조의 전능’ 관점에서는 인간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만들 엄두도 못 냅니다. 그래서 오직 ‘전능자’ 편에서 인간에게 길을 열어주셔야만 이러한 관계는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님께서 먼저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야곱에게 ‘직접’ 하느님께서 ‘야곱의 사다리’로 그와 소통하셨던 것처럼, 오직 하느님의 일방적인 관계에 의해서만 인간과 하느님은 관계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전능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전능’(키르케고르)입니다. 그것은 구약에 기록된 바 모든 이야기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사랑의 전능’은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 7:14


‘처녀’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젊은 여인’이란 뜻도 있습니다. ‘처녀’이든, ‘젊은 여인’이든 논쟁의 소모는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와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여자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다는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난자와 정자의 ‘직접적’ 결합 없이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떤 과학적 진술도, 의학적 진술도 아닌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하는 ‘관계성’에 대한 진술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낸 사랑의 감정을 담은 ‘연애편지’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고자 인간의 육신으로 오신 일은 완전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Amor Ex Nihilo’ 즉 ‘무로부터의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집중할 것은 ‘여인’이란 일반적 질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라는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온전히 자신을 비웠습니다. 관습과 율법에 따라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워 하느님의 소명을 은총으로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그 순종의 중심에 요셉을 놓았지만, 루가복음은 마리아에게 더 중점을 둡니다. 요셉의 비움과 마리아의 비움 모두 귀하지만, 어린 여인의 순종은 더욱 고결해 보입니다. 완전한 비움, 완전한무無 되지 않고는 결코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할 없습니다. 무언가로부터 창조를 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의 전능’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 자기 비움, ‘무無’가 아니었으면 하느님의 신탁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순종은 ‘자기 비움’이고 그것이 바로 ‘무無’입니다.

‘Amor Ex Nihilo’
‘완전한 무無’에서 완전한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은 이 세상의 다른 질료를 공유한 적이 없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이 세상 끝까지 남는다고 사도 바울로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랑은 이 세상의 질료를 공유하지 않았기에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요한 4:7~8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만 옵니다. 사랑은 오직 하느님만 제1원인으로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직 하느님을 압니다. 세상은 ‘무’로부터 나왔지만, 세상은 하느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제2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이미 새로운 것이 들어설 여유를 잃습니다. ‘무로부터의 사랑’은 오직 ‘자기 비움’에 의한 ‘무’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비움’을 우리는 ‘케노시스κενοσις’라 부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은 철저히 하느님의 자기 비움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비움만이 사랑을 창조할 선재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사랑은 하느님이다’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사랑은 오직 하느님만을 제1원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비움’, ‘완전한 없음’, ‘완전한 무’에서만 ‘완전한 사랑’이 나옵니다. ‘케노시스’, ‘자기 비움’없이는, ‘하느님의 사랑’없이는, 주님께서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실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자기 비움’이 없었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이 아니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이러한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결국 대림절, 우리의 기다림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 위함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천사의 신탁에 순종한 것은 다른 어떤 기대나 바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온전히 주님의 명령에 자신을 비워 완전한 ‘무’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하느님은 성육신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무’가 되게 하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아무것도 창조하실 수 없습니다(키르케고르). 이것이 ‘무로부터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를 ‘본보기’로 하느님의 형상을 ‘본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전능’으로 우리 안에 심긴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그래서 그분은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아픔과 고통, 슬픔과 기쁨을 모두 경험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그 완성은 물론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마리아와 요셉의 ‘자기 비움’, 자신을 완전한 ‘무’가 되게 함으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들에게도 원하십니다. 그러나 선재 조건은 우리가 마리아와 요셉처럼 우리 자신을 모든 욕심으로부터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면서도 마리아와 요셉의 ‘자기 비움과 순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탄절은 아기 예수의 생일로만 결코 소급될 수 없습니다. 성탄절은 분명 인간의 완전한 ‘자기 비움과 순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비워 인간의 몸을 입으신 사건. 마리아와 요셉이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자신을 비워 성령을 받아들인 사건. 이것이 바로 ‘무로부터의 사랑’인 것입니다.

대림 4주일. 이제 우리는 성탄을 앞두고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을 보냅니다. 여러분은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안에 임하실 임마누엘 하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축하하고 있습니까? 아기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비움’입니까? 여러분을 비워서 ‘무’에 이르게 하십시오.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Something이 되려 마시고, 하느님 앞에서 Nothing이 되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마리아처럼 임마누엘 하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잉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오늘 말씀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가득 차 있는 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아무것도 창조하실 수 없습니다. 오직 ‘무로부터의 사랑’만이 여러분 안에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거하시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 비움’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를 ‘본보기’로 하여 그를 ‘본받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탄절에 주님께 드리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한 축복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 대림4 (가해)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은총으로 마리아를 택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이제 우리도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7:10-16
10 야훼께서 아하즈에게 다시 이르셨다. 11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께 징조를 보여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달라고 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습니다.”
13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14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 젊은 여인이라는 뜻도 있음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라 하리라. 15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될 때는 양젖과 꿀을 먹게 될 것이요, 16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네가 원수로 여겨 두려워하는 저 두 왕의 땅은 황무지가 되리라.”




성시_시편 80:1-7, 17-19
1 이스라엘의 목자여,
. 요셉 가문을
.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이여,
. 귀를 기울이소서.
. 거룹 위에 좌정하신 분이여,
2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나쎄 가문 앞에,
. 햇빛처럼 나타나소서.
. 힘을 떨치고 오시어,
. 우리를 도와주소서.
3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4 만군의 주, 하느님,
. 당신 백성의 기도소리를
. 언제까지 노엽게 들으시렵니까?
5 당신 백성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 싫도록 눈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6 이웃들에게는 시빗거리가 되게 하셨고
. 원수들은 우리를 비웃습니다.
7 만군의 하느님,
.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17 당신 오른편에 계시는 분,
. 몸소 굳건히 세워 주신 그분을 붙들어주소서.
18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니
. 우리를 살려 주소서.
.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 하리이다.
19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주시면,
.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1:1-7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 2 이 복음은 성서에 있는 바와 같이 일찍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입니다. 3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4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내가 은총으로 사도직을 받은 것도 그분을 통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복종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6 여러분도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7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신 로마의 교우 여러분에게 문안 드립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깃들기를 빕니다.




복음서_마태 1:18-25
18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20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22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23“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칠십인역 이사 7:14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택의 엄중함”  (0) 2022.12.25
“밤을 깎아 불을 지르며”  (0) 2022.12.24
"그리스도의 이미지"  (0) 2022.12.11
“거룩한 본성”  (0) 2022.12.07
“기다림의 현재: 종말의 현재성”  (0) 2022.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