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26.가해_사순5주일
에제 37:1-14, 시편 130, 로마 8:6-11, 요한 11:1-45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요한복음의 일곱 표징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오늘 라자로의 소생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은 이제 “세상의 구원자”, “참 생명”이심으로 예수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차분하게 읽어보시면 이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에서 묘한 감동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표징은 앞에 있었던 6가지 표징의 종합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사가가 편집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한 메시지입니다. 삼십 대의 갈릴레아 청년은 이로써 ‘그리스도’ 임을 요한 사가는 확증 합니다. ‘역사적 예수’에서 ‘신앙의 예수’로 그의 신원이 바뀝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은 이제 라자로를 소생시킴으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증명합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야훼 하느님께서 자신을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요한복음도 예수의 신원을 ‘에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 즉 ‘나는 ~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이 ‘생명’이심이 밝혀졌으니 이제 그를 믿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길 요한복음은 촉구합니다.
오늘 라자로의 소생이야기는 정확하게 앞으로 예수께서 어떤 죽음을 맞이하실 것과 어떻게 부활하실 것에 대한 예고이기도 합니다. 라자로는 소생했지만, 다시 나이 들어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지만,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부활’과 ‘소생’의 차이점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징은 이로써 마무리되고 이후 후반부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가득 찹니다. 이를 우리는 ‘영광의 책’이라 부릅니다. 아이러니하게 이 영광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깊이 관련됩니다. 죽음이 ‘하느님의 영광’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요한복음은 ‘영광의 책’에서 이를 상세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순절기도 사순 5주일을 지나며 죽음과 영광이 있는 골고다 언덕으로 향해갑니다.
라자로는 “하느님이 도와주신다”는 뜻으로 히브리어로 “엘 아자르”라 합니다. 라자로는 당시 흔한 이름으로 이를 구분하기 위해 라자로의 고장 이름을 붙여 ‘베다니아의 라자로’라고 우리는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가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빠인지 아니면 남동생인지는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편의상 ‘오빠’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라자로가 죽은 이유는 9장에서 ‘태생 시각장애인’을 구원했을 때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표징 사화는 결국 하느님의 영광을 증명하는 역할임을 말합니다. 일반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확인할 길은 이와 같은 표징이 아니고는 쉽지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는데, 이제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났지만, 그 영광을 본 자는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표징은 이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과 관련됨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곧 예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의 영광’은 저 십자가를 향합니다. 라자로가 죽었던 것 같이 예수도 이제 죽음을 당하고, 묻히셨다가 다시 부활하실 겁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들 한가운데 이끌려 나가 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에제 37:1 b
오늘 1 독서에서 에제키엘이 본 환상은 라사로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에제키엘은 성령에 인도되어 광야로 나가 널려 있는 뼈들을 봅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라고 그에게 묻습니다. 물론 에제키엘은 주님께서 아신다고 하며 즉답을 피합니다. 생명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이 본 뼈들은 바로 ‘죽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 복음서에서 무덤에서 나온 라자로도 이러한 ‘죽음의 상태’를 상기시킵니다. 그의 “손발이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라고 합니다. 이는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주님께서 나오라 해서 무덤에서 나왔지만, 에제키엘의 뼈들처럼, 아직 완전히 숨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에제키엘이 본 뼈들도 서로 이어지고 살이 붙어 두 발로 설 수 있었지만, 아직 숨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모두 생명이 없는 육체만 보여줍니다. 사방에서 숨이 불어와 그 ‘살이 붙은 뼈들’을 스쳐지나니 그들이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라자로도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숨을 쉬기 시작했고 완전히 살아났습니다. 육신에서 이제 영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로마 8:9
사도 바울로는 이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뼈와 살이 있지만 영이 없으면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육체의 일에 신경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온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영과 육을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두 가지의 차이를 강하게 도출하는 대비법을 통한 강조일 뿐입니다. ‘육’은 ‘영’을 통해 생명을 얻고, ‘영’은 ‘육체’을 통해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몸, 소마σῶμα’는 영과 혼과 육을 모두 포함하는 전인적인 개념입니다. 성서 신학자 불트만(R. Bultmann)은 “인간이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바로 인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육과 영이 대립적인 것은 육은 썩을 수 있는 물질이고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우리는 ‘사르크스 σάρξ’라고 부릅니다. 이 ‘육’를 이루는 물질은 자연에서 온 것입니다. 자연에서 온 것이니 우리 육신은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단순히 육과 정신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육신의 존재는 육신에 머무를 뿐 영이 없이는 하느님과 관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영을 받은 자로 이제 썩어 없어질 육신과 사라질 정신이 아닌 영원한 영으로 새로운 ‘몸’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구원받을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은 하느님의 말씀과 관계하며 또 우리 믿음과 관계함을 깨닫습니다. 영은 우리와 분리된 다른 어떤 인격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가 영을 인식할 수 있으니 영은 바로 ‘믿음의 영’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성령을 아직 삼위일체적 인격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알게 하는 권능’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창조해 내는 권능’으로 인식했습니다.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인식됩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주님께서는 라자로가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 하여 그들의 생각을 수정해 주십니다. 그랬더니 토마의 말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라고 합니다. 즉 함께 가서 죽자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라자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 말씀하셨지만, 토마는 이를 듣지 않고 진짜 죽음을 말합니다. 아마도 그는 핍박을 받아 죽을 것을 각오한 듯합니다. 이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마지막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 때 결국 도망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겠다는 용기를 진심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토마의 발언은 당시 ‘제자들의 몰이해’를 드러내는 암시일 뿐입니다. ‘제자들의 몰이해’는 아직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느님의 영광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으로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
마르타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의 핵심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핵심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믿음을 촉구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는 마르타에게 한 질문이기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모두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를 믿습니까? 마르타는 마지막 부활의 때에 우리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임 또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그녀의 믿음에 부족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된 것인지입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 신원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아직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녀는 라자로의 무덤에서 돌을 치우라는 예수의 명령에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대꾸를 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죽음을 마지막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아직 몰랐습니다. 그가 친히 죽으심으로 오히려 죽음을 결박시키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분이심을 아직 몰랐습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여러분은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은 한갖 종교적인 신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권능이고, 그분의 영광이 인간에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이를 믿었기에 사도 바울로는 호세아서 13장 14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담대하게 외칩니다.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1 고린 15:55
사도 바울로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그의 당당함은 이미 그가 예수의 부활에 완전히 전도됐음을 보여줍니다. 마르타처럼 우리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타처럼 아직 그분의 부활과 생명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패기 넘치는 외침은 그가 진정 부활한 예수를 만났음을 암시합니다. 사도들 중 유일하게 ‘역사적 예수’를 보지 못한 사도 바울로는 ‘예수의 영’을, 예수의 영광을 통해서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의 믿음은 십자가를 넘어 그의 부활과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자신의 손을 결박했던 죽음의 ‘끈’을 끊고 자신의 눈을 가렸던 ‘너울’을 벗어버렸습니다. 라자로의 손을 결박했던 ‘끈’과 얼굴을 덮은 ‘너울’은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만 벗겨지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이 본 뼈들이나 베로 묶인 라자로의 모습은 영이 없는 죽음의 상태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활과 생명이 없으면 우리도 이와 같이 죽음의 권세 밑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뼈와 살로만 이루어진 단백질 덩어리. 이것이 우리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영으로 온전한 ‘몸(σῶμα)’를 이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몸’ 즉 ‘소마σῶμα’는 ‘소마 크리스투 σῶμα Χριστοῦ’, ‘그리스도의 몸’(1 고린 12:27)으로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유기체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완전한 ‘몸(σῶμα)’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에제키엘이 봤던 마른 뼈들은 하느님의 숨이 임하면서 생명을 가졌습니다. 이 ‘루아흐רוּח’, ‘숨’은 곧 하느님의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 숨이 떠나가면 우리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에 ‘너울’을 쓰고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손은 베로 결박당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이 없는 상태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다고 확신했고,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하느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신했지만, 그들은 ‘너울’에 얼굴이 가려져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제 사순절도 반환점을 돌아 우리는 매일매일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던 우리의 순례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갑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주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영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갈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우리가 드리는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단순히 그분께 드리는 기도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오늘 본 마른 뼈들과 베로 묶인 라자로의 모습은 우리의 원죄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죄를 부정하는 많은 이론들과 주장들이 있지만, 아담의 죄는 ‘죄성'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죄성’은 죄로 향하는 성질입니다. ‘죄의 삯’은 그러므로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그러한 운명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이는 우리는 결국 ‘죄성’으로 인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마른 뼈와 같이 또 나흘이 되면 썩어 냄새나는 ‘육신’과 같이 온전한 몸을 가질 수 없게 합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귀중한 몸입니다. 이 몸은 장차 부활로 그리스도의 영광 속으로 들어갈 몸입니다.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결박하는 ‘베옷’과 얼굴을 가린 ‘너울’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망을 향해 담대히 외친 사도 바울로처럼, 죽음에 갇힌 라자로에게 외친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 사순절에 그것을 모두 벗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부담으로 남는 관계가 있다면 가셔서 그 속박을 먼저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아직 다 못해서 찜찜한 일이 있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마시고 과감하게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주춤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게 무엇이든, 또 여러분이 제대로 볼 수 없도록 여러분의 눈을 가린 ‘너울’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을 성령의 숨으로 날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 앞에 선 개인’로 우뚝 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숨이 불어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났다.”라는 에제키엘의 말씀처럼 우리가 모두 자신의 발로 당당하게 일어나 ‘하느님 앞에 선 개인’으로서 큰 무리를 이루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사순5주 (가해)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참 자유를 주시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일생 거룩한 생활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에제 37:1-14
1 야훼께서 손으로 나를 잡으시자 야훼의 기운이 나를 밖으로 이끌어내셨다. 그래서 들 한가운데 이끌려 나가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2 그분이 나를 그리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들바닥에는 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라 있었다. 3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내가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 하고 아뢰니, 4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5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6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7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 8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9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10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11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13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성시_시편 130
1,2 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주소서. ◯
.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3 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
.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4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
.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5 나는 주님 믿고 또 믿어 ◯
. 나의 희망 그 말씀에 있사오니,
6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
.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7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
. 이스라엘이 주님을 기다리옵니다.
¶ 인자하심이 주님께 있고 ◯
.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8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
.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8:6-11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7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8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9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11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복음서_요한 11:1-45
1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가 사는 베다니아 동네에 라자로라는 병자가 있었다. 2 앓고 있는 라자로는 마리아의 오빠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는 여자였다. 3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전했다. 4 예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7 제자들에게 “유다로 돌아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선생님, 얼마 전만 해도 유다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그 곳으로 다시 가시겠습니까?” 하고 걱정하자 9 예수께서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하시며 11 이어서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라자로가 잠이 들었다면 곧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3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라자로가 죽었다는 뜻이었는데 제자들은 그저 잠을 자고 있다는 말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14 그래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 곳으로 가자.” 16 그 때에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가 자기 동료인 딴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 보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18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오리밖에 안 되는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다. 그 동안 마리아는 집 안에 있었다. 21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23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24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26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27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이 말을 남기고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귓속말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고 일러주었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달려갔다. 30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마중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던 것이다. 31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해 주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곡하러 무덤에 나가는 줄 알고 뒤따라 나갔다.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 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34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 하고 말하였다. 37 또 그들 가운데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38 예수께서는 다시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셨다.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39 예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40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41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2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43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44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를 찾아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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