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8.가해_성 토요일(부활 전야 예식)
천지창조 1:1-2:4상_ 홍해를 건넘: 출애 14:10-31, 15:20-21_ 값없이 주시는 구원: 이사 55:1-11_ 마른 뼈의 골짜기: 에제 37:1-14 / 로마 6:3-11 / 시편 114 / 마태 28:1-10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주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단순히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시는 눈물을 흘리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를 다시는 못 보는 것에 대한 슬픔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이 어떻게 인간의 모든 관계성들을 끊어 놓는지를 목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선한 목적인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무너뜨린 죽음의 권세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마치 왕노릇하듯이 사람들을 모든 관계성에서 끄집어내어 외롭고 두렵고 처절히 절망적인 실존으로 이끈 것에 대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길이 바로 이러한 죽음과의 투쟁임을 분명히 인식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소외된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육신이 신진대사를 멈추고 심장이 멈추는 것이 죽음이 아닙니다. 사탄은 이러한 죽음을 인간에게 감행했고,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에 대해 승승장구해왔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십자가에서 자신이 최후 승리를 했다고 자만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고 묻히신 사흘의 시간 동안 사탄은 승리에 도취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가장 절망의 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어둠이었고, 모든 관계가 단절이 됐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는 외침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철저히 단절된 어둠의 순간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느님의 부재. 인간의 절망. 그래서 마귀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위해 큰 일을 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공기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공기의 중요성을 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하느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모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신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인식의 한계가 이해는 됩니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은 아담과 하와의 배반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회복 불가능한 ‘하느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해방을 넘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완전한 회복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노예로부터의 해방이고, 참다운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태초에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으로 치닫는 이 세계에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참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하느님의 길입니다. 절망으로 절망을 이기고,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출애굽을 할 때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했지만, 이제 인류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절망에서 벗어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과 화해하시길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멸망당할 사탄은 예수님 뒤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보다 ‘생명’에 대해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죽음에 대해 티베트 종교처럼 깊이 있게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죽음은 멸망당할 원수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연의 한 부분은 될 수 있지만, 죽음에 예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말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인간을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시키기 때문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이 말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죽음 이전에 이미 우리의 영이 죽은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와의 관계도, 이 현재의 시간과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의 시간은 철저히 고립되어 과거로부터도 미래로부터도 어떠한 연결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철저한 고립무원孤立無援입니다. 그래서 쳇바퀴 돌듯 매일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번뇌와 번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가 없는 삶입니다.
인간이 항상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삶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있어도 모든 관계에서 단절됐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로부터 고립됐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고립됐습니다.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세계, 다른 시간과 연결시킬 ‘관계의 권능’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는 시작입니다. 이것이 죽음으로 단절된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고난과 고통이 인간 실존에 수반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 의도와 상반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가 끊어졌을 때 우리는 불안과 공포, 고난과 고통 속에 이미 던져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혜를 얻은 대신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러한 생명으로 죽음을 몰아낸 사건입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 염려와 걱정 속에서 삽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죽음에 굴복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직도 그러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이 온전하게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망각은 우리 안에 모든 영적인 은총의 기억을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주일 성찬례를 통해, 주님의 몸과 피를 통해, 그러한 망각에서 벗어나고자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은 부활을 향한, 생명에 대한 표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례를 통해 부활하신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기억’을 통해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남네시스, 기억과 기념’은 매우 영적이며 우리를 밝은 빛 가운데로 이끌어주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부활의 능력을 몸에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마치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팔을 벌려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슴으로 품으시기 바랍니다. 의심의 구름을 걷어버리시고 그분의 능력을 마음껏 호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두려움과 공포, 번뇌와 번민의 사슬을 끊고 참다운 해방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밤. 우리에게 그러한 성령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전례독서: 성 토요일 부활밤 (가해)
본기도
주 하느님, 거룩한 이 밤을 주님의 부활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교회에 부활의 은총을 내리시어, 세례성사로써 주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마음을 북돋아주시고, 우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경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서신 독서_ 로마 6:3-11
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 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 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성시_ 시편 114
1 알렐루야!
.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
. 야곱의 집안이 야만족을 떠나올 때
2 유다는 그의 성소가 되고 ◯
.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3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치고 ◯
. 요르단 강은 뒤로 물러섰으며
4 산들은 염소처럼 뛰놀았고 ◯
. 언덕은 양처럼 뛰었다.
5 바다야! 너 어찌하여 도망치느냐? ◯
. 요르단아! 너 어찌하여 물러서느냐?
6 산들아, 어찌하여 너희가 염소처럼 뛰며 ◯
. 언덕들아, 어찌하여 양처럼 뛰느냐?
7 땅이여, 너는 네 주인 앞에서 ◯
. 야곱의 하느님 앞에서 떨어라.
8 그분은 바위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
. 바위로 하여금 샘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복음서_ 마태 28:1-10
1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내려와 그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 3 그 천사의 모습은 번개처럼 빛났고 옷은 눈같이 희었다. 4 이 광경을 본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떨다가 까무러쳤다. 5 그 때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6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아라. 7 그리고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거기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오.' 하고 알려라. 나는 이 말을 전하러 왔다.” 8 여자들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 9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 그 여자들을 향하여 걸어오셔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가까이 가서 그의 두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하였다. 10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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