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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평범성(Banality of Resurrection)”

James Chae 2023. 4. 23. 05:31

2023. 4. 23.가해_부활3주일

사도 2:14, 36-41 / 시편 116:1-4, 12-19 / 1베드 1:17-23 / 루가 24:13-35

 

부활의 평범성(Banality of Resurrection)”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루가 24:16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랬을까요? 오늘 공동번역성서가그들의 눈이 가려져서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로크라테오κρατέω’ 입니다. 말은명령하다, 지배하다라는 뜻과 함께우세하다’, ‘정복하다’, ‘잡다’, ‘쥐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예는붙들다’, ‘잡다입니다. 이를 수동태나 중간태로 사용하면 붙잡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타자가 됩니다. 말은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무언가에 의해 붙들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눈이 가려져서라는 의미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제대로 없게 상태를 말합니다. 아마도 이를 우리는 다양하게 해석할 있겠지만, 이를 우리는 간단하게편견 또는 선입견 붙들렸다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편견에 붙들린 것일까요? 아니 어쩌면 편견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그들이 소망했던메시아 대한 이미지에 붙들렸다고 해야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언급됐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심을 믿었지만, 그가 십자가 처형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를 잃고 절망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중국 청원유신 선사(?~1117) 말을 성철 스님이 사용하셔서 유명해진 말이지요. 마치 헤겔의 변증법처럼 청원유신 선사는 처음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깨달음에 이르렀다가 나중에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깨달음을 얻은 후에 다시 처음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깨달았다고 합니다. 언어유희(言語遊戱) 같은 말이 주는 의미는 깊이 생각하면 정말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심지어 매일 거울로 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정말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이런 변증법의 순환 속으로 쉽게 빨려 들어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산과 물은 우리 밖에 그대로 존재하는 이에 대해 깨닫는 주체가 변화됐다고 말해야 것입니다. 같은 꽃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같은 색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데, 어느 누구도 눈에 보이는 것을 보편성을 가지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역사적 사건도 해석에 따라 너무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함을 세계는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산은 산일 있지만, 누구에게는 산은 산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대상을 바라보고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계는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위대한 아티스트를 우리가 칭송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자신 만의 시각으로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과 일반인의 차이점이 있다면 예술가는 그러한 세계를 섬세하게 자신의 관점에서 표현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무심히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부활 바라보면 그것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일견 느낍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

과연 그것이 부활일까요? 역사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서에도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의 이야기(1 열왕 17:17-24) 있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이야기(루가 7:11-17),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이야기(마르 5:21-43), 라자로의 소생이야기(요한 11),  삼층 난간에서 사도 바울로의 설교를 듣다가 졸려 떨어져 죽은 청년 유디코를 사도 바울로가 살려낸 이야기(행전 20:7-12)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는 넘쳐납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모든 것의 끝이라는 인식이 있기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불로장생(不老長生)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여전히 과학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아나서 숨을 다시 쉬는 것이 부활의 전부라면 예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사건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해야만 오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영원히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성서를 유심히 보면 부활한 예수는 살아계실 때와 비교해서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살아 있을 때처럼 공개적으로 병자를 치료하는 기적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오랜 시간 예수와 동행했으면서도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아마도 70명의 제자단에 속한 사람들일 겁니다. 빈무덤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조차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증언은 최소한 그의 제자 그룹으로 한정이 됐습니다.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처럼 불특정 다수를 부활 후에 만났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분은 부활 후에 살아계셨을 때처럼 놀라울 정도로 일상적인평범성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부활 이후의 행동은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같습니다. 그의 모습도 평범했고, 단순히 제자들을 만났고, 대화도 나누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만져보게 하셨으며, 음식도 함께 드셨습니다. 심지어 갈릴레아 호수가에서는 제자들의 아침도 준비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추측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의평범성때문에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부활한 예수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평범한 여행자처럼 보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가 동산지기인 착각했습니다(요한  20:15).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부활이 지닌 지극한평범성 일반성입니다. 그것은 영광에 휩싸여 신성을 뿜어내는 거룩한 신의 현현과 완전히 상반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초자연적인 현상이고, 신적인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상상한 나머지 부활한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언니인 마르타도 마지막 부활의 때에 하느님의 권능과 함께 부활이 있을 것이란 것을 알았지만(요한 11:24), 그것이 지금 여기에 일상 속에서 있을 것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가 이미 그들이 변화산에서 목격했던 영광에 둘러싸인 신적 현현의 모습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의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연결성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는 토마가 직접 만져볼 있을 정도로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진 33살의 팔레스타인 청년의 모습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하셨지만, 십자가의 죽음 사건 이후 제자들은 이전의 예수를 완전히 잊은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공포가 그들의 눈을 가린 것일까요? 그것은 라자로의 얼굴을 덮은너울처럼 그들의 인식과 눈을 덮어버린 편견의 너울이었습니다. 산은 산인데 산이 산이 아닌 경우가 됐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깨닫는 순간 이른 것은 결국 일상적인 식탁에서 진행된 성찬례를 통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평소에 식사하던 대로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셨다.”라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들고, 기도하고, 떼고, 나누기.” 단순한빵을 떼는 동작 성찬례에서 영성체 기도의 가장 핵심적인 동작이며 이는 살아계실 예수께서 항상 식사 하시던 평범한 동작이었습니다.  단순한 4가지빵을 떼는 동작 제자들에게 주님을 연상시키는 행위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도 주님께서 이와 같은 동작을 하셨습니다. 동작은 최후의 만찬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로 제자들에게 새롭게 각인됐습니다. 일상의 식탁에서 반복되는 평범한 동작이 결국 제자들과 예수를 연결하는 고리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닫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는 그들의 시선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이 부활한 예수를 깨닫는 순간 그들이 그분을 붙들려했기 때문입니다. 깨닫는 순간 인간은산이 산이다하기도 하고, 산이 산이 아니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집작 하는 것에서, 자신의 편견에서 좀처럼 자유롭지 못하는 법입니다. 라자로의 소생을 직접 보고도 사람들은 죽음을 이긴 예수의 권능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특수성보다는 평범성과 일상성만 남기시고 그들이 집착하는 순간 홀연히 사라지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주님을 붙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이 깨달음이 되지 않고 집착이 되면 부활한 주님은 무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산은 산일 수도 있고, 산은 산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불가지론적인 진술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인간 인식과 경험의 한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평범성과 일반성을 지닌다는 점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서구두수선공 마틴 만난 지극히평범한하느님처럼 말입니다. 부활은 특별한 특수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될 의미가 커지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특별한 것을 원합니다. 특히 자식들을 교육하는 부모들을 보면 그러한 욕심이 가장 투영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평범성을 자식들이 물려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식이 특별하다는 기대에 집착합니다. 자기 자식은 영재이거나 남보다 뛰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서 점점 평범해지는 것에 조금씩 실망도 하고 나름 익숙해져 갑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과잉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껏 뛰어놀아야 아이들에게특수성 덧입히고 싶은 마음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평범성이 지닌 위대한 가치는 깨닫지 못합니다. 평범성 속에 감추어진 삶의 비밀은 무시합니다. 우리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러한 평범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거부하고 싶어 집니다. 자수성가하면 자신이 대단하다는 자부심에 붙들립니다. 남보다 조금만 나아져도 우리는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특수성 남과 비교하는 우리 심리에서 발생되는 욕망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존재의 자리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지 못하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곳에서 삶의 시간과 물자를 낭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당할 없는 것을 바라는 특수성에 대한 욕망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각자가 감당할 능력의 총량이 있는 법입니다. 또한 우리가 감당할 없는 하느님의 축복을 간구하며 하느님과 자신을 시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복만큼만 누리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의 축복의 특수성을 간구하다 보면 우리는 일상성과 항상성을 잃고 속에서 끊임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늙어서 깨닫는 것처럼 비극도 없습니다. ‘하면 된다 구호가 얼마나 우리 인간을 성공의 노예로 만들었는지 우리는 지난 20세기를 통해 경험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일이 분명 있다는 것을 깨닫는 . 단순히 운이 나빴던 아니라, 단순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존재의 자리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사양지심(辭讓之心)’ 인간이 인간의 본분을 깨닫게 하는 본성인 것입니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 이것이 맹자가 인간의 인간됨에 대해 말한 진리입니다. 진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부활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식하고 기다린다면 그러한 부활은, 그러한 특수한 부활은, 결코 없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우리의 입맛대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은총을 받아도 은총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부활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삶처럼 지극히 일상적입니다. 그것은 이웃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웃고 살아가는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하고,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일상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 희생하고 남을 섬기며 사랑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특별함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자취에서 발견할 있습니다. 부활은 끊임없는 지적 탐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의 강의를 들었지만, 결국 깨달음에 이른 것은 식탁에서평범성이었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일상 속에서 깨달음의 특수성을 잠깐 맛보는 . 그것은 비록찰나이지만 그것이 은총임을 압니다. 깨달음은찰나이고, 은총의 효력은 우리 영에 깊이 영원히 각인되는 법입니다. 너무나 평범해서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놓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평범성, 우리의일상성 기뻐하십시오. 아무리 못난 인생이라도 소중한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가 죽은 사자보다 위대한 법입니다(전도 9:4). 살아 있는 우리는영원한 현재 누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바로 부활의 아침이며, 재림의 그날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일상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 8요일인 주일 아침이 아름다운 것은 자리를 우리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주 반복되는 자리에서 서로를 있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이렇게 우리 평범한 일상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서로의 모습 속에서 찾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부활3 (가해)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실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았나이다. 비오니,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지금도 세상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사도 2:14, 36-41

14 베드로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 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37 사람들은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것입니다. 39 이것은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40 베드로는 밖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그들을 설득시키고 사악한 세대가 받을 벌을 면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41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날에 새로 신도가 사람은 삼천 명이나 되었다.

 

 

 

 

성시_시편 116:1-4, 12-19

1,2 주님은 나의 사랑,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주셨다.
     내가 부르짖을 때마다 귀를 기울여주셨다.
3    죽음의 끄나풀이 나를 두르고
     저승의 사슬이 나를 묶어
     불안과 슬픔이 나를 덮쳐누를 ,
4    나는 이름 부르며 부르짖었다.
   주여, 구하옵나니, 목숨 살려주소서.”
12  주께서 베푸신 크신 은혜
.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구원의 감사 잔을 받들고서
.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14  주님께 서약한 , 내가 채워 드리리니
.     당신의 백성은 빠짐없이 모여라.
15  주님께 충실한 자의 죽음은
.     그분께 귀중하다.
16  주여, 몸은 당신의 종이옵니다.
.     당신 여종의 아들인 종을
.     사슬에서 풀어주셨습니다.
17  내가 당신께 감사제를 드리고
.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주님의 모든 백성이 모인 가운데서 
.     주님께 나의 성원을 채워드리리라.
19  주님의 안에서,
.     예루살렘 가운데서 
.     나의 서원을 바치리라.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베드 1:17-23

17 그리고 여러분은 각자의 업적에 따라서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18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일이 아니라 19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20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22 여러분은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해져서 꾸밈없이 형제를 사랑할 있게 되었으니 충심으로 열렬히 서로 사랑하십시오. 23 여러분은 새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썩어 없어질 씨앗에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앗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났습니다.

 

 

 

 

복음서_루가 24:13-35

13 바로 거기 모였던 사람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삼십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면서 14 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15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인 걸음을 멈추었다. 18 그리고 글레오파라는 사람이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께서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하신 일과 말씀에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20 그런데 대사제들과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 보았더니 23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사람이 무덤에 가보았으나 과연 여자들의 말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25 때에 예수께서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26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예수께서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29 그들은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십시오.” 하고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30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셨다. 31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32 그들은길에서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33 그들은 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가보았더니 거기에 열한 제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34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35 사람도 길에서 당한 일과 빵을 떼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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