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상호 거주의 길”

James Chae 2023. 5. 7. 02:09

2023. 5. 7. 가해_부활5주일

사도 7:55-60 / 시편 31:1-5, 15-16 / 1베드 2:2-10 / 요한 14:1-14

 

상호 거주의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요한 14:8

 

필립보의 간청입니다. 구약의 신론에 의하면 하느님의 현현을 눈으로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출애 33:20) 그러나 오늘 그러한 사실을 아는 필립보가 예수께 감히 하느님 아버지를보여달라 요청합니다. 필립보가 헬라계 유대인인 것을 감안해도 그의 요청은 당시 유대인으로서 너무 당돌합니다. 이는 그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도 아니고 유대교의 신론을 무시해서도 아닐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립보의 말을 당시 요한공동체가 놓인 상황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의 공동체가 있었던 지역은 팔레스타인에서 별로 멀지 않은 이방인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서부 소아시아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에페소스 저작 장소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그곳이 정확히 어디이든, 요한공동체는 당시 유행했던신비주의 밀교들특히 영지주의와 유대교 신비주의 등의 도전에 직면했던 같습니다. 이들은 밀교형식을 뛰며 특별한 계시나 환시 등의 종교적 체험을 강조한 종교들입니다. 그들의 도전은 매우 집요했고, 심지어 그들의 이분법적인 교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실제 예수가 아니라 그의 환영이었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필립보는 철저히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께 요청을 했던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를 눈으로 확인하게 달라는 요청은 다른 말로신비체험 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필립보의 요청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도 우리 기독교 안에 넘치게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것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면 하느님께 헌신하겠다고.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기도를 응답해 주시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우리는 다양한 조건을 내걸고 기도를 드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느님보다 우리의 조건이 앞섭니다.  "~하면 ~하겠다" 조건문은 철저히 영지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관점에 빠진 사람은 "나를 보면 아버지를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바로 육체를 가진 33세의 청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성부께서 성자 안에, 성자께서 성부 안에 "상호 거주"하는지 개념을 도저히 이해할 없었습니다. 영과 육을 철저히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러한상호 거주 불가능합니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는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그러니토마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겠다고 오늘 복음서는 말합니다. 거룩한 영만이영지 얻을 있기 때문에 육체가 어디로 간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기에 토마는 예수의 죽음을 그대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의 몸을 직접 만져보고 믿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육은 철저히 죽어 없어질 물질일 뿐입니다.  이러한 육신의 감옥에서 영이 자유해지는 것이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육신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거룩한 영광을 덧입는다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없었습니다. 요한공동체가 그랬던 것처럼 현대의 교회도 영지주의의 영향이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만질 있는 것만 실재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물질적인 축복과 세상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나는 길이다.”라는 예수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말을 도저히 이해할 없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께서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나는 길이다.”라는에고 에이미자기 정체성 말씀을 다시 접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언급하신 후에 오늘 고별사화를 통해 자신이 떠난 후에 혼란에 빠질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유언과도 같은 요한복음 14장은 스승이 떠난 후에 두려움 가운데 떨게 제자들을 위해 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것을 요약해서 당부하십니다. 잠시 잠깐 동안 스승의 부재는 그들을 깊은 두려움에 빠지게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14장은명령어문장으로 이루어진 당부의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을 믿고 지키는 것은 오롯이 남아 있는 제자들의 몫입니다. 

 

“Μὴ ταρασσέσθω 메 타라세스도.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요한 14:1a

 

 

명령어로 사용된 헬라어 ‘ταράσσω 타라소 요한복음에서 주님의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는 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뜻은혼란, 혼돈 가깝습니다. 주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직면하시면서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요한 11:33)하셨으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요한 12:27)라고 하셨습니다. 가리옷사람 유다의 배반에 직면해서몹시 번민하시며”(요한 13:21)라고 요한복음은 기록했습니다. 모두 같은타라쏘 사용했습니다. 혼란 마치 심연의 물이 출렁이는듯한 격한 동요를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물이 세상을 덮치던 노아의 홍수 때의 공포이기도 합니다. 대홍수의 폭풍우 속에서 마치일엽편주처럼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떠다니는 인간의 실존이 타라쏘라는 말속에 담겼습니다. 요한복음이 단어를 주님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사용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말은 주님의 극심한 번뇌와 번민을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런 고통과 혼란을 친히 겪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친히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이렇게 직접 경험하신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가 영지주의와 다른 길을 가는 분기점이라 있습니다. 성육신은 완전한 인간이시면서 완전한 하느님이시다는 고백으로 우리 기독교를 영지주의와 완전히 결별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도 끝도 없이걱정하지 마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근거는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믿음을 거론하시면서 믿음을 뒷받침할 약속을 또한 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요한 14:2

 

 

너희가 있을 헬라어 “μονή 모네라는 말은 영어로맨션 masnsion”으로 번역될 있는데, 이는 우리말로있을 ”, “거처 말합니다. 이를 물리적인 장소로 해석하면 말씀이 매우 뜬구름 잡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맨션처럼 마치 주택청약을 받는 듯한 말씀으로 오해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 그리스도께서 서로가 서로에게 거주하시는 하느님의 실존, 상호 거주 의미로 이해될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오셨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우리에게하느님과 상호 거주 있는 길이 열린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을양우리의 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양우리 맨션 결국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존재의 자리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한 15:4)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머물 곳은 바로 주님 안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말하는맨션 의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만 거할 , 또는 나의존재의 자리 아닌 곳에 거할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놓인 양무리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과 염려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하느님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지를 분명히 말합니다. 핵심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b

 

 

예수 만이이고이라는 요한복음의 핵심 신학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상 신비주의적 환시나 환상과 같은 영적체험은 무의미합니다. 이미 예수를 자들은 하느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적인 체험이나 신비한 기도 응답, 또는 기적을 아직도 구합니다. 직접적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그러한 기대가 숨어 있습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외롭고, 지칠 우리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서 건져줄 특별한 무엇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러한 기대심리가 어쩌면 믿음으로 가장되어 우리를 좌절시키는 한몫을 하는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하나요?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잘못 기도한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기도가 잘못됐고, 아니 하느님이 계시다고 심지어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 무용론은 결국 영지주의의 소산이라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거나 느낄 있는 기도 응답이나, 신비 체험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눈에 보이는 예수를 통해 오신 것이 기적이고, 저주받은 육체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부활한 것이 기적임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 같습니다. 하느님의 현현을 목격한 제자들과 우리는 구약시대처럼 죽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짜 기적임을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주님의 유언은 다음 말씀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요한 14:11a

 

 

앞에서 살펴본 대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맨션은 이러한 상호 거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상호거주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실존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셨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믿어라 강조합니다. πιστεύω 피스테우. 요한복음은피스티스πίστις”라는 명사 대신에 동사형을 주로 사용합니다. 말인즉 이론보다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믿는 대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의 말씀을 믿겠거든 그분이 하신표징들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래서 일곱 개의 표징을 설정했다고 이전에 말씀드린 있습니다. 표징들 하나하나가 예수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징인 것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표징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다음에 고별사는 위로의 말씀과 더불어 드디어성령 약속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믿음성령보다 약간 앞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성령보다 약간 앞섭니다. 우리가 믿음의 의지를 발휘할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협조자, 돕는 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일지라도 그것이 우리 안에 뿌려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성령에 의해 믿음은 자라 가는 것입니다. 더욱 풍성하고 차고 넘치게 말입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12

 

 

우리의 믿음이 작동하면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일뿐만 아니라 큰일도 하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분명 양적으로는 이미 성취가 듯합니다. 예수께서 제자그룹을 만드신 것은 많아야 사도 바울로의 언급대로라면 500 정도로 추정되는데(1 고린 15:6), 현재의 기독교는 이미 세계에 양적으로 차고 넘치니 말입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2 동안 기독교는 양적으로 무척 풍부해졌습니다. 이제 인터넷 매체의 영향으로 복음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유대인의 종교에서 세계의 종교로 기독교는 우뚝 섰습니다. 그러나 양적인 성장에 비해 질적인 성장은 매우 초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보다는 신념이 앞서고, 그리스도보다는 교회가 앞서며,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앞서고, 감사보다는 축복을 간구하는 우리 기독교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물질에 천착하는 사람들과 영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들로 교회가 양분된 것은 이미 오래입니다. 영지주의는 요한복음의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뿌리 깊게 우리 기독교 안에 존재해 왔습니다. 서로가 허심탄회하게 드러내지 않았을 정말 개인의 신앙 이야기를 듣다 보면 복음보다 영지주의 기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 애초에 뿌려진 씨앗이 가시덩굴과 함께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나는 돈이 좋습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라는 외침이 하느님의 강단에서 뻔뻔하게 울려 퍼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헌금 순위를 주보에다 기록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도 문제이지만, 신자들도 자신의 귀한 것을 하느님께 드리기보다 자기만족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경향이 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적, 물적 자산이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마태 22:21)라고 예수의 발언을 흉내 내며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과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눕니다. 성육신의 은총은 모든 이분법적인 것을 무력화시키고 그것을 하나로 통합했지만, 우리는 스테이크를 자르듯이 열심히 그것을 둘로 나누려 애씁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뒷전이요 자신의 일이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주일 예배 참석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행위를 쫓는 사람들은 있는데, 그리스도를 쫓는 제자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로 채워졌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찾아보기 정말 어렵습니다. 부활은 우리 가운데 빛을 잃었습니다.

 

하느님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실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관계하시는 길은 우리가 그분의양우리의 통과하는 뿐입니다. 영지주의의 이분법적인, 물질적이거나, 영적인 편협한 길에서 벗어나상호 거주 은총 가운데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신인합일의 경지에 까지는 아니더라도 속에서 우리가 평안을 얻을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고통을 미리 아시고너희는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신 것처럼 이미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배반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길이요 진리이며,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부활5 (가해)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어 주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부활의 삶에 참여하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7:55-60

55 스데파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외쳤다. 57 그러자 사람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스데파노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58 성밖으로 끌어내고는 돌로 치기 시작하였다. 거짓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에게 맡겼다. 59 사람들이 돌로 때에 스데파노는 예수님,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주님, 죄를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데파노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성시_시편 31:1-5,15-16

1    주여, 당신께 피하오니,
.     다시는 욕보는 없게 하소서.
.     바르게 판정하시는 하느님, 나를 구해주소서.
2     기울여 들어 주시고,
.     나를 빨리 건져주소서.
.     피할 바위와 성채 되시어
.     나를 보호하소서.
3    당신은 정녕 나의 바위,
.     나의 성채이시오니
.     , 이름의 힘으로
.     나를 이끌어 데려가소서.
4    당신은 나의 은신처시오니
.     나를 잡으려고 숨긴 그물에서
.     나를 건져주소서.
5    진실하신 하느님, 나의 주여,
.     영혼 당신 손에 맡기오니 건져주소서.
15  나의 앞날을 당신의 손에 맡기오니
.     악을 쓰는 원수들의 손에서 몸을 건져주소서.
16  나는 당신의 종이오니, 웃는 얼굴을 보여주소서.
.     한결같은 사랑으로 몸을 구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베드 2:2-10

2 그리고 갓난아이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서 구원을 얻게 것입니다. 3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않았습니까(시편 34:8)? 4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을 받은 귀한 돌입니다. 5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쓰일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6 성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
내가 귀중한 하나를 골라
.    
머릿돌로 시온에 두었다.
.    
그를 믿는 사람은
.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이사 28:16
7
그러므로 돌이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시편 118:2) 돌이며 8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장애물이 바위(이사 8:14)입니다. 그들이 걸려 넘어진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탓이며 또한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기도 했습니다.
9 ¶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신명 7:6, 10:15; 이사 43:20)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백성입니다(출애 19:5-6; 이사 61:6).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놀라운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10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호세 2:23)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서_요한 14:1-14

1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2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3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가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6 예수께서는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없다7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8 이번에는 필립보가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주시면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9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무슨 말이냐?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다고 말을 믿어라.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정말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일도 하게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13 너희가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14 너희가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이루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