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30.가해_부활4주일
사도 2:42-47 / 시편 23 / 1베드 2:19-25 / 요한 10:1-10
“부활-관계성의 문”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도 2:43
공동번역성서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라고 의역을 했지만,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경외감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입니다. ‘경외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φόβος포보스’입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어떤 원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즉, 어떤 권위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두려움’보다는 ‘경외감’에 가장 가깝습니다. 두려우면서도 놀라는 마음이 동시에 포함됩니다. 기쁨이 있는 ‘경탄’과는 조금 뉘앙스가 다릅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구약성서 전반에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로 반영됐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엘리야도 야훼의 현현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나눔 공동체’가 된 것은 이러한 ‘경외감’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이상적인 교회의 표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소공동체 운동의 시도가 여럿 있었지만 성공한 전례가 없습니다. 이와 유사한 공산주의도 결국에는 계급투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아픔을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운동 초기에 잠깐 동안 이러한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존재했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이상이 실현되기에는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경험했던 이러한 현상은 오직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에 의해 가능했다고 루가는 보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공동체의 구심력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적 자유의지가 이러한 경외감을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 혹은 homoeostasis)’있게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스템 안에 권위의 체계를 세웁니다. 높은 권위에서 낮은 권위로 피라미드식 권위 구조가 세워져야만 인간의 권위의 시스템이 작동됩니다. 인간은 평등을 주장하지만 너와 내가 비슷한 것은 못 참는 습성이 있습니다. 각 개인은 조금이라도 남보다 자신이 우월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항상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다툼과 분쟁의 원인입니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 7장에게 다음과 같이 한탄합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로마 7:18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비천한 인간”으로 인식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부활한 예수에게 매달린 이유는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죽음의 육체”에서 자신을 건져주실 분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토록 집착했던 율법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체는 이러한 바울로 같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깨어짐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공동체를 이 땅에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함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이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의 때에 완성될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완성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권능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상반된 개념들이 나열됩니다. ‘목자’와 ‘도둑’, ‘양우리의 문’과 문이 아닌 ‘다른 데’, 하나는 구원을 하나는 파멸을 각각 상징합니다. 양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목자의 소리를 듣던지 아니면 도둑이나 강도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이 선택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목자의 음성을 도둑의 음성으로부터 구분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자신의 주인인 목자의 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은 그분의 양이고, 그분의 양우리 가운데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양은 모두 도적의 소리, 늑대의 꼬임을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렵고 힘든 것입니다. 언제 늑대가 나타날지, 언제 도적이 나타나 자신을 해할지 두렵습니다. 허허벌판에서 풀을 뜯는 양무리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방이 모두 뚫려 있습니다. 적은 언제든지 공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양들은 ‘선한 목자’를 믿습니다. ‘선한 목자’만 믿으면 폭풍우도, 배고픔도, 들짐승의 위험도, 골짜기의 위험도, 도둑이나 강도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위험에 노출되어도 그분 만을 향하면, 그분의 목소리만 들으면 위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독자 행동은 양무리에게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의 음성대신 도둑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끝까지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의 선하심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왜 양들을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모두 헤아릴 수 없지만, 그분의 양으로서 우리는 하염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부활은 인간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정한다고 이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성 말입니다.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의(義)’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그 온전한 관계성이 바로 양무리와 선한 목자의 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양들이고, 부활하신 예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목자와 양은 은유로써, 이는 하느님과 우리 간의 온전한 관계를 상징하는 표상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양임을 믿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고백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이사 53:6
우리 인간의 죄성이 이렇게 양무리의 습성과 유사합니다. 양들은 모두 제각기 행동하길 좋아한다고 합니다. 좀처럼 하나가 되기 힘든 무리 습성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양들이 목자를 떠나 ‘제멋대로 놀아난 것’처럼 우리 인간도 하느님을 떠나 그랬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러니 선한 목자는 자신을 배반한 양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해야만 했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우리가 제멋대로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의 길에서 입 한번 열지 않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처형을 당했습니다. 양들인 우리는 선한 목자를 배반했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그분은 배반한 우리들을 위해 먼저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감당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참 잔인한 양들입니다. 우리의 경거망동으로 그분이 죽으셔야 했는데, 우리는 한 번도 그분의 목소리를 경청하지도 또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0:6
여기서 말하는 비유는 ‘파로이미아παροιμία’입니다. 일반적으로 ‘속담’이란 뜻이지만, 이는 ‘은닉된 말투’, ‘애매한 말투’를 연상시키는 ‘수수께끼 같은 비유’를 나타냅니다. 즉, 이 수수께끼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열린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목자와 도둑을 구분하는 것도 이러한 원리입니다. 믿음은 수수께끼가 가리키는 지향점을 분명하게 알게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도둑과 목자의 소리를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성서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던 그들이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한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입니다. 구약에서도 백성과 지도자의 관계, 또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할 때 목자와 양의 비유가 종종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이 비유 수수께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 말씀처럼, “믿는 자들은 보게 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믿음이란 것이 신기한 것은 일단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처럼 순식간에 증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마치 생명처럼 차고 넘치며 풍성해지는 특성이 믿음입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를 나타내는 “에고 에이미’ 문장을 우리는 다시 만납니다. 이는 오늘 읽지 않았지만 요한복음 10장 14절의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표현과 연결된 의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도 내어놓는 자입니다. ‘문’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은 ‘하느님과의 관계성'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도 하나이고, 선한 목자도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관계성의 문’이며 ‘관계성의 길’이십니다. 그 문은 곧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며,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인도하실 분은 양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 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고, 다른 목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외의 다른 문, 다른 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요 강도입니다. 이는 예수의 자기 계시를 통해 드러난 종말론적인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부활절에 우리는 부활을 축하한다고 서로 인사합니다. 그런데 과연 누구를 위한 축하입니까?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축하할 정도로 부활의 기쁨과 권능을 느끼고 있습니까? 또 우리는 정말 부활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부활을 축하하는 걸까요? 우리 가운데 시기와 질투가 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상호 섬김과 상호 신뢰, 상호 희생이 없다면 우리에게 부활은 아직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염려와 걱정 근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면 아직 우리는 부활의 양우리의 문을 통과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보다 이 세상일을 더 사랑하고 그것에 시간을 내고 그것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부활은 아직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의 음성이 들려올 때 그것을 무시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도적의 음성뿐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우리는 또한 주님과 이웃을 향해 그러한 관계를 만들 사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없다면 부활은 갈기 빠진 수사자처럼 힘없는 무의미로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에는 ‘항상성’이 있습니다. 그의 음성은 어떠한 조건에도 변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도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와 장소를 마련하여 드리는 기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부활의 아침인 제 8요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항상성’ 있는 기도 가운데 하느님을 ‘선한 목자’로, 우리 자신을 그분의 양으로 자기 정체성을 부활 속에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도적의 소리가 아니라 목자의 소리에 기뻐하는 우리 양무리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부활4주 (가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가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의 거룩하신 자취를 따라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2:42-47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43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45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47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성시_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놀게 하시고 ◯
.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 그 이름 목자이시니 ◯
.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
.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
.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
.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베드 2:19-25
19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며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영예스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21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 22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이사 53:9). 23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맡기셨습니다. 24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이사 53:4, 12). 25 여러분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복음서_요한 10:1-10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2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간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양떼를 불러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 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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