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4. 가해_성삼위일체대축일(세례 성사)
창세 1:1-2:4상 / 시편 8 / 2고린 13:11-13 / 마태 28:16-20
“삼위일체, 관계성, 그리고 세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읽은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야훼’라는 이름과는 다른 신론을 보여줍니다.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이름들은 ‘벨 하우저’의 ‘문서비평’에 큰 힘을 실어줍니다. 아직도 구약학계에서는 이 ‘벨 하우저의 문서론’을 뒤집을 학설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논쟁까지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만, 이 두 이름을 통해 역설적으로 깨닫는 것은 인간이 보이지 않는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 그리고 이성의 구조를 넘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드리면 ‘엘로힘’이란 이름은 인간과 거리가 있는 초월적인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이에 반해 ‘야훼’는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친밀하게 대화가 가능한 매우 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쉽게 말해서 ‘초월적 하느님’과 ‘내재적 하느님’이라고 각각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철학적으로 이해한다면 ‘플라톤적인 초월’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내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러한 단순한 분류는 위험성은 있지만 신을 이해하는 단초로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습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틀을 벗어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편 우주에 편재한 하느님의 ‘보편계시’와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은총계시’를 모두 인정합니다. ‘엘로힘’이란 이름은 북이스라엘에게 익숙한 이름이었고, ‘야훼’라는 이름은 남유다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신약의 시대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하느님의 세 가지 이름을 만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그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폴리캅의 제자였던 이레네우스, 라틴교부 터툴리안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등 참으로 많은 교부들이 이단논쟁 속에서 한결같이 ‘삼위일체론’을 옹호하며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지켜낸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닙니다. 사실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 담긴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읽어보면 언어유희와도 같은 구절들이 일견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논리만으로 ‘삼위일체’를 완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믿음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 1세기에 기록된 신약성서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성서 어디에도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성령은 1세기 기독교에는 인격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신적 속성으로만 이해됐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부들이 이러한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교회의 예배 안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교로서의 하느님’, ‘관계성으로서의 하느님’이란 새로운 신론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삼위일체가 상호 권위, 상호 섬김, 상호 나눔, 상호 봉사라는 교회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일신론적 신과 같이 가부장적이고 전체군주적인 하느님이 아님을 말합니다. 또 다신론적인 하느님과 같이 권위의 위계를 세우는 봉건군주적인 하느님도 아님을 말합니다. 교부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수평적이며, 상호 섬김과 사랑의 관계를 가지는 ‘관계성의 하느님’을 말합니다. 이는 철저히 교회 예배와 사귐인 ‘코이노니아’ 속에서 현시된 하느님의 새로운 이름인 것입니다. 이를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21
이러한 상호거주는 삼위일체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고 또 교회공동체의 예배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 진술로만 또는 믿음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는 철저히 예배 현장을 중심으로 사목적으로 형성된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성찬례가 없는 ‘삼위일체론’은 무의미합니다. 교회공동체가 없는 ‘삼위일체론’은 불가능합니다. 삼위일체로 말미암아 교회는 “관계성 속에서”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의 전혀 새로운 관계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성찬례에는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그리고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로 인해 견고한 ‘관계성의 구조’, ‘친교의 구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관계성을 세례성사를 통해 구현합니다. 역사의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부의 음성이 들렸으며,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다고 복음서들은 일관되게 진술합니다. 역사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세례의 현장에 동시에 현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인간에게 드러난 사건이지만 그 일로 구약이 말하는 바 죽은 이들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출애 33:20
하느님의 영광이 예수를 통해 드러났는데 그를 본 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광을 보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예수의 세례 이후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예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느님의 관계성 속에서 하느님의 본성에 참예해야만 ‘참 인간’이 됩니다. 물론 이 ‘참 인간’은 실낙원 이전의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된 인간을 말합니다. 히틀러에게 저항하다 감옥에서 순교했던 “알프레드 델프” 예수회 사제는 “사람은 하느님과 더불어서만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 관계성 속에서, 상호 사랑 속에서 한 하느님이시듯이 우리 사람은 세례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 하느님과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관계성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성이 드러난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 ‘친교로서의 교회’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시작이 됩니다.
세례는 또한 모든 생명의 원천인 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죽음을 상징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물로 깨끗함을 입어 새로운 생명으로 재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주는 영적인 효과입니다. 또한 세례는 물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듯이 우리의 허망한 것들과 우리를 속이는 거짓된 모든 것들을 물속에 묻어버리는 효과도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효과는 ‘죽음의 힘’을 수장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죽음은 하느님 앞에 당연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단지 우리의 죄 때문에 권세를 잠시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산 자의 하느님이시지 결코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십니다.(마태 22:32) 주님께서 부활로 죽음의 권세를 꺾으신 것처럼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놓이지 않게 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다 “위로부터 새로 남”(요한 3:3)은 세례를 통해 새 새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온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영세자는 이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지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는 하늘의 영광과 지상의 평화가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와 세례의 순간 교류하고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함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례를 단순한 입교 통과의례로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진지하게 세례를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세례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삶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 됨은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이러한 질문들을 계속해서 물어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세례 전이나 후나 상관없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질문이 세례를 통해 본격화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이 결코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기에 우리는 이제부터 그러한 질문을 끊임없이 우리의 실존 속에서 묻고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사실 기도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자문하고 살피는 것. 그것은 아마도 세례를 받는 이 순간의 진지함 만큼 이후에도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진지함입니다. 그러한 진지함을 여러분의 생애 동안 견지하시길 바랍니다. 세례는 한번뿐이지만, 그 효과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례 받은 자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인격에 예수님의 인격이 덧입혀졌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인격에 누가 되는 행동을 마시고 그분의 인격이 여러분의 인격을 변화시키도록 스스로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 놓으시길 빕니다. 그러할 때 우리를 공동체 안에서 관계성으로 이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이 험한 세상에서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더욱 풍성한 생명으로 여러분과 항상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오늘 세례를 받는 세 분과 그 후견인들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하신 세례의 증인들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성삼위일체주일 (가해)
본기도
거룩하신 하느님, 교회로 하여금 삼위일체의 영광과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이 신앙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 신비를 굳게 믿어 진리로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1:1-2:4상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4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5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을 갈라놓으셨다. 8 하느님께서 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이튿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9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나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 나무가 돋아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 나무가 돋아났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3 이렇게 사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15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놓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 18 이리하여 밝음과 어둠을 갈라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9 이렇게 나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20 하느님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1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23 이렇게 닷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24 하느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26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2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29 하느님께서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 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30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엿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2:1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4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1:1: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던 한처음이었다.”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1:2: “기운”은 “바람”, “영”, “혼”, “얼”이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2:1: 히브리어 본문은 “이렛날”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성시_시편 8
1 하느님, 우리의 주여! ◯
. 주님의 이름 온 세상에
. 어찌 이리 크십니까!
¶ 주님의 영광 기리는 노래,
. 하늘 높이 퍼집니다. ◯
. 어린이, 젖먹이들도 노래합니다.
2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
.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3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
.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 사람이 무엇이기에
. 이토록 생각해주시며 ◯
. 사람이 무엇이기에
.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
5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
.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
.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
.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 하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
.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 하느님, 우리의 주여! ◯
. 주님의 이름 온 세상에
. 어찌 이리 크십니까?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고린 13:11-13
11 형제 여러분,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며 내 권고를 귀담아들으십시오. 그리고 뜻을 같이하여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주실 것입니다.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복음서_마태 28:16-20
16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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