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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의 상실 시대”

James Chae 2023. 6. 11. 06:33

2023. 6. 11. 가해_연중10주일

창세 12:1-9 / 시편 33:1-12 / 로마 4:13-25 / 마태 9:9-13, 18-26

 

모험의 상실 시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많은 분들이 마크 트웨인의 소설톰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의 모험 읽어 보셨을 겁니다. 지금은 내용이 아득하지만 어린 시절 우리에게 꿈과 모험을 자극했던 소설인 것만은 분명했던 같습니다. 마치 로드무비처럼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대리만족과 같은 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안에 잠재된, 우리 유전자 깊은 곳에 내재된 모험심이 불쑥 우리 안에서 솟구침을 느낍니다. 권선징악이란 뻔한 틀의 성장 소설이 고전이 것은 바로 인간 내면의 있는 이러한 모험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전례독서들도 우리 인간의 오랜 역사가 이러한 모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 톰과 허크와는 다른 영적인 모험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라크인 페르시아 해에 인접한우르라는 지역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로마서를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철저히 믿었던 율법과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을 버리고 회심 후에아라비아의 라바데아 왕국으로 믿음의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세례 마태오도 매일 세관에 앉아 돈과 숫자와 씨름하던 지긋지긋한 일상을 박차고 나와 예수 운동에 가담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오랜 병에서 탈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헤집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죽음이란 잠에 빠져 있던 회당장의 딸은 죽음의 어둠을 박차고 생명의 아침으로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톰과 허크가 각자 다른 이유로 가출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을 감행했던 것처럼 오늘 성서의 인물들도 그동안 자신들을 붙들고 있던 일상을 박차고 믿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삶의 자리 옮긴 것입니다. 

 

모험에는 두려움과 스릴이 함께합니다. 미지에 대한 동경과 낭만도 있습니다. 위험도 있지만 전혀 새로운 만남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험은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삶의 자리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모험은 인간의 운명을 가장 극명하게 시험해 있는 기회입니다. 모험을 떠난 사람은 다시는 이전의 자리로 돌아올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모험이 아니라 단순한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모든 위험을 무릎 모험과 도전으로 항상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새로운 세계를 열며 진화해 왔습니다. 모험이 없었다면 우리 호머 사피엔스(Homo sapiens)들은 오늘과 같은 문명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을 겁니다. 진화와 진보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이 우리 인류의 진화 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없습니다. 모험이 제국주의의 전유물이 됐던 적도 있었지만, 모험은 항상 다양한 문화와 문명들의 충돌과 결합을 통해 전혀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것이 어디 문명뿐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모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신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조상들이 섬기던 수메르 문명의 농경의 신이 자연신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야훼라는 신을 모험을 통해 경험하게 됐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지금의 튀르키에 지방의타르수스라는 지역 출신으로 유대인이며 바리사이파 가말리엘 학파의 엘리트였고, 로마 시민이었으며, 헬라철학과 수사학에 뛰어난 율사였지만, 다메섹의 회심 이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떠나는 모험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이 살아 있던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들에게 자신의 회심에 대한 믿음을 인정받고 약속의 자손인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기보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서자였던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살고 있던 아라비아로 갔습니다.(갈라 1:16-17) 사도 바울로가 갔던 아라비아는 현재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위치한나바테아 왕국입니다. 우리에게는 고대 문명의 유적지인페트라 알려진 곳입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을 만났을 것이고, 천막 짓는 일에 능통했던배두인들 만나서 천막 짓는 법도 배웠을 것입니다. 이상 우리가 추측할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곳에서 그는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과 이스마엘의 흔적들과 다양한 문물을 접하는 모험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아라비아의 모험을 통해 선민의식에 빠져있던 자신의 과거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아브라함의 첩의 후손들인 아랍인들 속에서 예수의 겸손의 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로마서에서 믿음의 조상으로아브라함 예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사람으로 할례 받은 자들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방인들의 조상도 된다는 사도 바울로의 논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일 겁니다. 그것은 이삭의 후손이든, 이스마엘의 후손이든 전혀 차별이 없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새로운삶의 자리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와 예수를 따라나선 마태오는 같은 존재이지만, 모험을 분기점으로 둘의 인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험은 인간의 인격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돈과 물질적 욕심에 사로 잡혔던 마태오는 이제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없게 됐습니다. 모험은 모험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없는 경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상 비난받던 돈만 좇던 민족의 적인 세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가 이상 바리사이파 율사 출신임을 자랑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허약한 병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의 잠에 빠진 소녀도 이상 연약한 육신에 자신을 가둬둘 없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이전의 삶은, 이전의 무기력한 삶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약했던 사람이 강해지고, 교만했던 사람이 겸손해지며, 욕심 많던 사람이 자기를 비울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모험을 통해 우리가 얻는 영적 효과입니다. ‘삶의 자리 변화되면 우리의 인격도 동시에 변화됩니다. 예수의 인격이 우리의 과거의 인격을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하나가 되어 운명공동체를 이룹니다.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는 모험을 통해 얻게 되는 은총의 효과입니다. 

 

모험이 사라진 삶은 예측가능하기 때문에 마치 안정감이 있는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모험이 사라지면 인간은 무엇이 자신에게 중요한 지를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의 종말인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와야만 인간은 이전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모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험이 사라지면 세상을 넓게 보던거시적인 사라지고, ‘미시적인 시각’, ‘단편적인 가치등에 함몰되고 맙니다. 그래서 진정한 가치보다는 너무나 사소한 가치들에 우리의 목숨을 걸게 됩니다. 인스타그램이나 SNS 넘쳐나는 많은 이미지들은 요즘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사소한 가치들에 함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맛의 차이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모르겠지만, 맛집 식당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현대인은 생존을 위해 음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각을 위해, 자기 자랑을 위해, 자기만족을 위해 음식을 찾는 같습니다. 모험은 먹고 마시는 것이 생존과 직결됨을 알게 하지만, 모험이 없는 삶은 끊임없이 미각과 자기만족만 채우는 것에 전착하게 합니다. 디자인과 브랜드 그리고 약간의 품질의 차이 때문에 , 수백만 원의 돈을 우리는 선뜻 지출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학교 성적을 위해, 아파트 투기를 위해, 복권 당첨을 위해, 비트 코인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모험들을 감행합니다. 그것이 정말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바라보고 동경하며 갖기를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것이 과연 모험일지는 의문이 듭니다.

 

모험이 사라진 지점에서 우리는 마치 우물 개구리처럼 동전 크기 만한 하늘 만을 쳐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넓은 하늘을 보고, 꿈과 희망 그리고 모험심을 키웠던 고대인들과 다르게 우리의 하늘은 너무 좁아졌습니다. ‘자기만족, 자기 이익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학교 성적 1,2점에 모든 것을 거는 경쟁이 모험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전혀 모험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갖춰진 틀에 따라 놀아야 하고, 어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시간과 장소에서만 아이들을 양육합니다. 마치 원하는 계란과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되고 있는 가축들처럼 말입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아이들을 통해 얻기 위해 기대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마치 허크를 교양인으로 키우려 했던 더글라스 아줌마처럼 말입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동네 아이들과 산과 들로 마구 뛰어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때는 매일이 신명과 재미가 넘쳤던 모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산과 나무들은 우리의 놀이터였고, 뒷동산은 우리 상상의 왕국이었으며, 우리는 그곳에서 나름의 세계를 만들고 질서도 만들었습니다. 그곳은 어른들이 관여할 없는 아이들 만의 세계였습니다. 우리들이 만든 질서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성을 배웠고, 어린아이를 배려했으며, 모든 놀이에는 배제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왕따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눌한 친구, 성장이 더딘 친구가 있으면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고 챙겨줬습니다. 요즘 사회질서와는 다른 우리가 만든 모험의 세계는 항상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아이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벽을세상의 이라 생각하는 듯합니다.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결국은 부모의 욕심과 가치관이 자녀들에게 투영된 결과입니다.

 

어디 아이들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도 하느님 앞에서 마음껏 은총과 자유를 즐길 없는 사람들이 됐음을 깨닫습니다. 거룩함과 신앙이란 경직됨이 우리를 자유하지 못하게 오히려 구속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신앙과 너무 괴리가 있어서 양쪽을 오가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으로도, 영적으로도 어느 곳으로도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는 결정장애자들이 됐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대적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느 쪽이든 모험을 시도해봐야 하나를 버리고 다른 것을 취할 용기를 얻는데, 모험이 없으니 생각으로만 그칩니다. 그러니 용기가 없는 당연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세리 마태오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기존의 틀을 박차고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일상이란 속에 갇혀 안전성의 포로가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과 자유함이 박제처럼 굳어버린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오래전에 폐기가 듯합니다. 신앙심이 깊어가면 갈수록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모험과 결단이 없는 신앙은 정체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인물들은 안주하지 않고 모험의 연속인노매드(nomad)적인 살았던 것입니다.

 

불확실성에 대한 동경. 자유에 대한 용기, 정의에 대한 결단, 하느님에 대한 순종 그리고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있는 확신과 믿음이 없이는 모험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용기를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 혼자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의삶의 자리에서 모험을 감행할 용기는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예루살렘이 아닌 아라비아로 모험을 감행한 것도, 아브라함이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감행했던 것도 모두하느님의 계시 의한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성령만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현할 모험을 감행할 용기를 주십니다. 문제는 그러한 모험에 우리가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나이에 무슨 변화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답은 여러분 각자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사람 사람을 그분의 세계로 모험을 감행할 용기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그러한 울림이 있고, 울림에 아멘하고 응답하는 분들이 많아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신앙의 세계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 모험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모험이 없이는 신앙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연중10주일 (가해) 1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로 인한 죽음에서 구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12:1-9

1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것이다. 3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덕을 입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함께 떠났다. 하란을 떠날 ,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오 세였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거쳐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 성소에 이르게 되었다.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7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내가 땅을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다. 아브람은 야훼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자리에 제단을 쌓아 야훼께 바쳤다. 8 아브람은 곳을 떠나 베델 동쪽에 있는 산악 지대로 옮겨가서 서쪽으로는 베델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아브람은 거기에 제단을 쌓아 야훼께 바치고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를 드렸다.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네겝 쪽으로 옮겨갔다.

 

 

 

 

성시_시편 33:1-12

1    의인들아,
.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 뛰어라.
.     정직한 사람들아,
.     마땅히 주님을 찬양하라.
2    수금 타며 주님께 감사드리고
.     비파 뜯으며 노래하여라.
3    새로운 노래로 찬미하고
.     흥겨운 가락에 맞춰 우렁차게 불러라.
4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은 말씀
.     하시는 일마다 모두 진실하시다.
5    주님은 바르고 옳은 일을 사랑하시며
.     한결같은 그의 사랑은 땅에 충만하시다.
6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     별들이 그의 입김으로 돋아났다.
7    바닷물을 독에 담듯이 한데 모으시고
.     깊은 창고에 넣어두셨다.
8     세상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     위에 있는 사람들아, 모두 앞에 조아려라.
9    말씀 마디에 모든 것이 생기고
.     마디 명령으로 모두 자리를 잡았다.
10  만방의 계획을 주께서 꺾으시고
.     만백성의 계교를 부수신다.
11  길이 흔들리지 않을 것은 주님의
.     영원히 흩어지지 않을 것은 그의 계획뿐이다.
12  주께서 당신 겨레로 뽑으시고
.     몸소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신 민족은 복되도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4:13-25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14 만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상속자가 있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15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서에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창세 17:5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창세 15:5하신 말씀대로만민의 조상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창세 15:6”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하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복음서_마태 9:9-13, 18-26

9 예수께서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10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도 많이 와서 예수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다. 11 이것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2 예수께서 말을 들으시고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예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이 와서 예수께 절하며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집에 오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19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어나 그를 따라가셨다. 20 마침 때에 열두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21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께서 돌아서서 여자를 보시고안심하여라,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하고 말씀하시자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23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러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며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다들 물러가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만 쳤다. 25 사람들이 밖으로 나간 뒤에 예수께서 방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아이는 일어났다. 26 소문이 지방에 두루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