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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양자”

James Chae 2023. 7. 23. 06:06

2023. 7.23. 가해_연중16주일

창세 28:10-19 / 시편 139:1-12, 23-24 / 로마 8:12-25 / 마태 13:24-30, 36-43

 

하느님의 양자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 7장에서 육신의 연약함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말하면서누가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겠습니까?”(로마 7:24)라고 한탄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2 독서 앞부분에 이에 대한 답을 합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 읽은 연중 15주일 2 독서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셨습니다.” 로마 8:4 (표준새번역)

 

육신(σάρξ)에다 죄를 정하셨다.”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단죄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단죄가 됐으니 결국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 사도 바울로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는 오늘 읽은 로마서 8 13절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합니다. 아니 명령이라고 해야 할까요?

 

“육체(σάρξ)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πνεῦμα)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로마 8: 13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는 우리 자신의 육체의 요구대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육체를 따라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신분을 약속합니다. 그것은 (πνεῦμα)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의 양자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하느님 자녀로서의 신분을 갖는 토대가 됩니다.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공동 상속자 되기 때문입니다. 상속은 무엇에 대한 상속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느님의 영광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에 대해, 죄에 대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영광을 상속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는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양자 신분을 얻는다는 것은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모든 권한을 상속받고 황제가 것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양자가 되면 부모의 모든 권리와 권한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닌 이방인들과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양자로 입양됐다는 뜻도 이와 유사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신분의 변화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부모의 모든 권한을 양도받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이러한 상속을 받을 양자들이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있게 됐습니다. 말씀을 우리는 교리 시간에, 설교 시간에 너무나 많이 들어서 조금은 식상하게까지 들리는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아직 말씀을 온전히 우리 안에 체화하지 못했든지, 아니면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누가 대그룹 총수의 양자로 입양되어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는다면 아마도 사람은 매우 흥분되지 않겠습니까? 드라마처럼 어느 갑자기 변호사가 찾아와서 당신이 백억이 넘는 유산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게 기쁜 소식이 아닐까요? 아마도 흥분하지 않을 사람은 전혀 없을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로는 우리의 통속적인 생각대로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그룹총수보다 부자이시고,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사람의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의 양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의 양자보다 영광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그것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으로는, 우리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이를 실감할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로의 외침은 우리의 불신의 영역 속에 꼭꼭 붙들려 있어서 우리의 실제적인 속에서 영향력이 살아나지 않고 있습니다. 믿어지지도 않고, 피부로 와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육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양자 신분을 영적으로 덧입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을아빠 아버지 부르는양자의 신분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대로 살고 육신의 필요를 따라 살게 되면 그러한양자의 신분 가질 없습니다. 결국 믿음으로만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양자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믿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자유 의지를 어느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영을 세우는 시작이고, 우리의 육을 죽이고 영을 우리 안에 세울 우리는 온전한 하느님의 양자의 신분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의 양자일 수도 있고, 모두가 하느님의 양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은사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고, 우리가 육이 아닌 우리 안에 영을 바로 세울 때만 가능한 신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인지 아닌지는 여러분의 양심이 알고 있고, 여러분의 영이 이를 느낍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 것이고,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찾고 구하고 얻고자 하는 것들이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것입니다. 

 

야곱은 육을 따라 살다가 형을 속이고 형을 피해서 광야로 쫓겨난 어두운 밤에 벧엘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육신을 넘어서는 영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이것을 성서는야곱의 사다리환상으로 표현했지만, 이것이 정확하게 사도 바울로가 묘사한 육을 죽이고 영을 세우는 경험인 것입니다. , 요즘 우리의 표현으로 하면세례의 은총 경험한 것입니다. 야곱은 경험으로 이제 진정한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장자권을 가진 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놓인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었습니다. 삼촌인 라반 밑에서 20년의 갖은 고생을 견뎌야 했고, 에사오의 죽음의 위협에 대비하기도 해야 했습니다. 그의 남은 삶은 육과 영의 투쟁의 삶이었습니다. 그를 이상 육신에 따라 살지 못하게 이끄시는 하느님의 연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을 잃어버리는 아픔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에 이집트의 파라오를 만나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떠돌기 벌써 백삼십 년이 됩니다. 얼마 되지는 않으나, 살아온 나날이 궂은일뿐이었습니다. 소인의 조상들이 떠돌아다니시며 누리신 수에 미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창세 47: 9

 

살아온 나날이 궂은일뿐이었습니다.”라는 야곱의 회상은 하느님의 양자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에사오로부터 장자권을 가져왔지만, 야곱의 삶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이를 통해 장자권은 먹고 잘살며 세속적으로 명예로운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장자이신 그리스도처럼 고난의 길을 연속해서 가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의 특권(?) 것입니다. 장자권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길만이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고, 먹고 사는 것이 모든 인간의 바람이지만, 나그네 인생길에 그러한 경우는 가뭄의 단비처럼, 광야의 만나처럼 한순간이고,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우리는 광야를 여전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땅에서잠정적(provisional, tentative)”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 우리가 철저히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들은 모두 세상에서잠정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땅에서의 우리의 장자권도, 양자의 상속권도 이와 같이 잠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포도나무의 원가지와 접붙임 받은 가지의 구분도 사라집니다. 성서가 말하는 모든 약속들이 성취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카이로스이고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 8:22-23

 

사도 바울로는 자연신학의 영향으로 우리 인간들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우리 인간과 함께 실존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피조물들도 우리가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우리의 몸이 해방될 우리와 함께 희망하면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과연 메타포일까요? 아니면 사도 바울로가 깨달은 영적인 진실일까요? 바울로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는 분명 우리가 없는 진리에 대한 경험과 지혜를 깨달았음을 느낍니다. 그의 삶의 진실성이 그의 진술의 신빙성을 보증합니다. 그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분명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충고대로 우리의 육신을 죽이고, 우리의 영을 우리 안에 바로 세우는 부름심으로 함께 나아가야 것입니다. 온전한 육신에 온전한 마음이 깃들고, 온전한 마음에 하느님의 영이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할 우리는 하느님의 양자로서의 신분으로 영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양자로 살고자 결심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16 (가해) 1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에게 진실한 마음과 뜻을 주시어 주님을 예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28:10-19

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11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뒤였다. 그는 곳에서 돌을 하나 주워 베개 삼고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13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너와 후손에게 주리라. 14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줄 때까지 나는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17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다. “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18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19 곳을 베델(“하느님의 이라는 )이라 불렀다.

 

 

 

 

성시_시편 139:1-12, 23-24

1,2 주여,
.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시니
.     내가 앉아도 아시고,
.     있어도 아십니다.
.     멀리 있어도, 당신은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3    걸어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4    내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     무슨 소리 할지, 주께서는 아십니다.
5    앞뒤를 막으시고
.     당신의 위에 있습니다.
6     지식은 놀라와 미치지 않고
.     높으심 아득하여 엄두도 아니납니다.
7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8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     지하에 가서 자리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9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     바다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10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11  어둠보고 가려 달라고 해보아도
.     보고 밤이 되어 감춰 달라 해보아도,
12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
23  하느님, 나를 살펴 보시고 마음 알아주소서.
.     나를 파헤쳐보시고 근심 알아주소서.
24  죽음의 걷는지 살피시고
.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독서_로마 8:12-25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빚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에 빚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18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구실을 못하게 것은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복음서_마태 13:24-30, 36-43

24 예수께서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있다. 25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가라지도 드러났다. 27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주인의 대답이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29 주인은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버리게 하고 밀은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36 뒤에 예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와서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37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 .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것이다. 41 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42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43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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