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13. 가해_연중19주일
창세 37:1-4, 12-28 / 시편 105:1-7, 16-22, 45 / 로마 10:5-15 / 마태 14:22-33
“거룩한 설복 Divine Persuasion”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2 독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구약성서를 예로 들어 믿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여기서 사용한 믿음에 해당되는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는 신약에서 224회가 사용되는데, 그중 바울서신서에만 무려 108회 정도가 사용됩니다. 그는 이 단어를 세 가지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하나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것과 같은 회개의 핵심으로서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촉구하는 믿음이지요. 두 번째는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로가 사도로서의 사명을 확증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율법의 의와 대비되는 믿음의 의입니다. 이 세 번째 의미가 바로 오늘 우리가 묵상할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유대인들이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는 율법을 믿음과 대비해서 이제 하느님의 의가 율법이 아닌 믿음에서 드러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좀 지루하고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믿음, 즉 ‘피스티스’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설명하기 앞서 잠깐 영어에서 Belief와 Faith의 차이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로 이를 번역하면 모두 ‘믿음’으로 번역될 수 있어서 우리는 이 두 말의 차이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간단하게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Faith는 주로 종교적 믿음에 사용되어 무엇인가에 대한 강한 확신과 신뢰를 뜻합니다. 반면 Belief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 사건 등에 대해 신뢰 또는 확신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Faith가 종교적으로 관련된다면, Belief는 다양하고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그러나 Faith는 헌신을 전제하지만, Belief는 헌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Faith는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요구하지만, Belief는 그렇지 않습니다. Belief는 어떤 것을 믿지만 헌신까지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믿는다고 친구에게 전적인 헌신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깐요. 여기에서 발견되는 이 두 단어의 확연한 차이는 바로 ‘헌신’의 유무입니다. 이에 따라 두 단어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믿음에 대한 헬라어 “πίστις 피스티스”는 영어에서 Faith로 번역됩니다. 앞에서 설명드린 대로라면 어쩌면 우리말로 번역될 때 ‘믿음’보다는 ‘신앙’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피스티스’는 자신이 믿는 것에 완전히 설복되었다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어의 belief, trust, confidence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이 ‘피스티스’는 인간의 의지와 전혀 상관이 없지는 않지만,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로 이해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설득”에 인간이 설득됐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이나 신뢰 즉 앞에서 제가 영어로 설명드린 Belief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피스티스’는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에 완전히 설복된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관점에서 ‘피스티스’는 결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념과 믿음을 넘어서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그래서 이 ‘피스티스’는 모든 믿는 자로 하여금 세상을 견디고 이겨낼 힘이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1 요한 5:4
이 ‘피스티스’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념과 믿음은 항상 흔들리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피스티스’는 우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세웁니다. 이러한 ‘피스티스’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수동형보다 능동형이 발달된 우리말은 ‘피스티스’와 같은 단어의 의미를 유추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믿는다”라고 말하지 “믿어진다”라고 표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은 늘 주어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의 신념을 ‘피스티스’와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로마 12:3
이 말씀은 ‘피스티스’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불식시킵니다. ‘피스티스’는 에너지처럼 축적 가능한 것도 아니고, 기쁨이 넘치는 감정도 아닙니다. ‘피스티스’는 하느님의 의지에 완전히 자신을 굴복시킨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지에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장담하고, 자신이 받은 ‘피스티스’의 은총의 분량을 넘어서 행동할 때 우리는 결국 넘어지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피스티스’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늘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 없는 신앙은 지치고 넘어질 가능성이 너무 크고, 분란과 말썽을 일으킬 가능성도 큽니다.
우리는 Faith가 아니라 Belief를 ‘피스티스’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소위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화평보다는 분란을 일으킬 때가 더 많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믿음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그리스도인이 더 열심히 부동산 투기에 나서고, 월세와 이자 놀이를 해서 얻은 이익으로 믿음의 헌금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고용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의 최저 임금은 아까워하면서 교회에 헌금하는 데는 더욱 열심인 경우도 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싶은 것이지요. 이는 기복을 추구하는 컬트 종교나 토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복을 간구하는 믿음은 ‘피스티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적 욕망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의지의 발현입니다. Faith가 아니라 물질과 욕망에 대한 Belief입니다.
‘피스티스’의 원형인 동사 ‘πείθω 페이토’의 의미를 살펴보면 ‘피스티스’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설득하다, 납득시키다, 매수하다, 유혹하다”라는 뜻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완전히 “유혹되어 꾐을 받는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이 의미를 “거룩한 설복당함”으로 사용합니다. 완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설복당했으니, 이렇게 설복당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히브 11:1
‘피스티스’는 우리의 희망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일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 확증해 줍니다. 그래서 ‘믿음’ 보다는 ‘신앙’으로 번역될 때 ‘피스티스’의 의미가 더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라고 한정을 짓고 나면 ‘피스티스’가 가진 큰 의미가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만 한정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믿음”이란 단어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만 이 믿음에 분명히 “헌신”과 “순종”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헌신과 순종이 없는 “믿음”은 ‘피스티스’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의 선물인 “은사”임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주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신념은 가질 수 있지만, 믿음은 스스로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믿음의 분량을 잘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받은 믿음의 분량대로 행동하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짐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각자의 몫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사제로 부름 받은 자와 교사로 부름 받은 자, 봉사자로 부름 받은 자의 믿음이 각각 다릅니다. 각자가 받은 은사만큼 하느님께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신앙 속에서 자유함도 함께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기에 여러분 각자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여러분 스스로가 이를 인식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로마 10:9-10
율법의 한계를 말한 사도 바울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의를 말합니다. 율법의 의는 이방인들을 제외시키지만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의는 이방인이나 누구나 차별하지 않고 오직 믿음에 의해 구원을 주십니다. 이러한 복음을 유대인들은 거절을 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실천을 위해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끌어내리려 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또 공덕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내려오라 올라오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념과 확신은 늘 한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율법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피스티스’를 설명한 것은 하느님의 의가 이제 율법이 아니라 바로 ‘피스티스’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율법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으로 이러한 ‘피스티스’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가 됩니다." 로마 14:23
이는 정확하게 율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율법의 행위보다 믿음이 앞섭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동기가 되어 행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온전한 완성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믿음을 말하면서 행위와 연결을 짓는 이유입니다. 헌신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설복”당함 없이 믿음은 그 빛과 의미를 잃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동기가 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다는 뜻입니다. 결국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하느님과 우리 간에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설복’의 은총이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19주 (가해) 1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아, 모든 시련을 이기고 마침내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37:1-4, 12-28
1 한편 야곱은 자기 선친이 유랑민으로서 머문 적이 있던 땅 가나안에 자리를 잡았다. 2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요셉은 열일곱 살이 되어 형들과 함께 양을 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두 소실 빌하와 질바의 아들들을 거들어주고 있다가 아버지에게 그들을 좋지 않게 일러바쳤다.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하였다. 4 이렇게 아버지가 유별나게 그만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형들은 미워서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넬 생각이 없었다. …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러 세겜으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일렀다. “얘야,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지 않느냐? 네가 갔다 와야 하겠다.” 그가 대답하였다. “네, 가지요.” 14 “네 형들도 잘 있고 양들도 잘 있는지 알고 싶으니 가서 보고 오너라.” 그는 이렇게 이르고 헤브론 골짜기에서 그를 떠나보냈다. 요셉은 세겜에 이르러 15 들판을 헤매다가 한 사람을 만났다. 그가 “누굴 찾느냐?” 하고 요셉에게 물었다. 16 “저의 형들을 찾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에게 형들이 어디서 풀을 뜯기고 있는지 알거든 알려달라고 했다. 17 그가 대답하였다. “벌써 여기를 떠났다. 도다인으로 가자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을 듣고 요셉은 도다인으로 찾아가 거기에서 형들을 만나게 되었다. 18 형들은 멀리서 알아보고 그가 다다르기 전에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19 “야,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저 녀석을 죽여 아무 구덩이에나 처넣고는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그들의 손에서 그를 건져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고 하였다. 22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녀석을 이 빈들에 있는 구덩이에 처넣고 손만은 대지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내어 아버지께로 되돌려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다다르자 그들은 요셉에게서 옷을 벗겼다. 그것은 장신구를 단 옷이었다. 24 그리고는 그를 잡아 구덩이에 처넣었는데 그 구덩이는 물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는데, 마침 길르앗으로부터 낙타를 몰고 오는 이스마엘 상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향고무와 유향과 몰약을 낙타에 싣고 이집트로 가는 길이었다. 26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그래도 우리 동기인데 그를 죽이고 그 피를 덮어버린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니? 27 그러니 그 애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고 우리는 손을 대지 말자. 아무래도 우리 동기요, 우리 혈육이 아니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28 그러는 동안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 냥에 팔아 넘겼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성시_시편 105:1-7, 16-22, 45
1 주님께 감사하며 그 이름 높이 불러라. ◯
. 그 장하신 일들을 만방에 알려라.
2 그분께 노래 불러라,
. 수금 타며 노래 불러 드려라. ◯
. 놀라운 그 일들을 이야기하여라.
3 그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여라. ◯
.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아라, 그의 힘을 빌어라. ◯
.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마라.
5 얼마나 묘한 일들 하셨는지 생각하여라. ◯
. 그의 기적들,
. 그 입으로 내리신 판단을 명심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
. 그가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7 그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 ◯
. 온 세상을 바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16 그 뒤에 주께서는 그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시고 ◯
. 그들의 식량 지팡이를 부러뜨리셨다.
17 그러나 사람 하나를 먼저 보내셨으니 ◯
. 곧,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다.
18 요셉은 거기에서 발에 차꼬를 차고 ◯
. 목에는 쇠칼을 쓰고 고생을 하였으나,
19 마침내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
. 주님의 말씀은 그가 진실됨을 증명해주었다.
20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의 사슬을 풀어주었으니 ◯
. 여러 족속을 다스리는 자가 요셉을 놓아주었다.
21 그리고 그에게 나라 일을 맡겨 ◯
. 온 살림을 주관하게 하며,
22 신하들을 마음대로 교육하고 ◯
. 원로들에게는 지혜를 가르치게 하였다.
45 이것은 이스라엘이 주신 법규를 따르고 ◯
. 가르쳐 주신 법을 지키게 하려 하심이다.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10:5-15
5 모세는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레위 18:5”고 기록하였습니다. 6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마라. 신명 9:4, 30:1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7 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 속까지 내려갈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신명 30:13”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 땅 속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8 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신명 30:14”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9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11 성서에도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칠십인역 이사 28:16”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2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요엘 2:32”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14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전도자로서 파견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사 5:27(나훔1:15 참조)”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복음서_마태 14:22-33
22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24 그 동안에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26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30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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