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6. 가해_주님의 변모 축일_연중18주일
다니 7:9-10, 13-14 / 시편 97 / 2베드 1:16-19 / 루가 9:28-36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유다서를 기반으로 편집됐습니다. 짧은 유다서의 내용을 2장에 배치하고, 1장과 3장을 덧붙인 형식입니다. 쓰인 시기는 유다서 이후로 130~150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어느 공동체의 신앙심 깊은 사람이 베드로의 이름으로 헌정한 편지라고 보면 무난합니다. 사실 유다서가 위경인 에녹서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대교회에서 유다서의 실제 저자 여부에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유다서의 친저성을 인정하지 않기도 했지요. 이러한 경향은 유다서를 참고하여 작성된 베드로의 둘째 편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교회 전통은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둘째 편지를 베드로의 편지로 존중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편지가 쓰인 공동체의 필요에 성령께서 응답하신 계시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둘째 편지를 베드로의 직접적인 고백이 아니라 베드로의 가르침 위에 서 있는 어느 교회 공동체의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주제는 “타보르 산의 주님의 변모 사건”을 주님의 부활이 아닌 ‘재림’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희망과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사도들이 주님의 변모를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지만, 그들 모두 주님의 수난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수제자들이었다는 점도 우리는 압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강한 영적 체험도 불구하고 그것이 완전히 우리 안에 체화되기 전에는 결국 아무런 효력도 없다는 점입니다. 체험이 단순히 체험으로 끝날 때 그것은 하나의 경험은 될 수 있지만, 전인격을 변화시키는 데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자신 안에 완전히 체화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나 가능했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를 쓴 교회 공동체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교회 공동체는 베드로의 체험과 배반, 그리고 회심을 하나의 프로세스로 기억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 개인의 경험이 공동체의 경험으로 심화되고 승화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할 때 베드로를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한 증언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 3절 말씀처럼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도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다”는 사도 바울로의 말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러나 강력한 영적 체험도 우리를 온전하게 주님께 인도할 수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더욱 혼돈 속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2 베드 1:19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동이 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깨달음과 영적 체화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울을 보듯이 희미한 우리의 실존 속에서, 마치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짙은 어둠이 더욱 우리의 삶을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그 희망의 빛은 더욱 밝게 보일 것입니다. 밤이 짙으면 빛도 더 밝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니 아픔이 크면 클수록 역설적으로 희망의 빛은 더욱 두드러지게 빛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해가 솟아오르기 바로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둠과 우리의 아픔이 아무리 크더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희망은 바로 이러한 인간 실존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신앙의 역설이지요. 그러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약속 위에서 낙심하거나 어둠을 두려워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약속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월북 작가로 삶의 피폐와 절망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시인 이용익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어둠 속에서도 등불이 켜지길 기다리는 작가의 애절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절망에 굴복하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절망을 뚫고 희망을 품는 한 인간의 절규입니다.
하늘이 금시 무너질 양 천둥이 울고
번갯불에 비치는 검은 봉우리 검은 봉우리
미끄러운 바위를 안고 돌아 몇 굽이 돌아봐도
다시 산 사이 험한 골짝길 자국마다 위태롭다
옹골찬 믿음의 불수레 굴려 조마스런 마음을 막아 보렴
앞선 사람 뒤떨어진 벗 모두 입다물어 잠잠
등불이 보고 싶다
등불이 보고 싶다
귀밀(귀리) 짓는 두멧사람아
멀리서래도 너의 강아지를 짖겨 다오
…….
“등불이 보고 싶다”_이용익의 시집 [낡은 집] 수록
시인은 불빛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등불이 없다면 강아지라도 짖어 길을 인도해 주길 간절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앞에 가는 사람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어둠 속에서 절망으로 침묵합니다. 혁명의 여정에서 길을 잃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빛이 비치길 기다릴 수도 없는 법입니다. 밤은 깊어가고 밤이슬의 한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게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어두워 길이 보이지 않아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더욱 많은 애를 써야 하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별들의 움직임도 잘 살펴야 합니다. 별빛까지 구름에 가린 날은 더욱 낭패입니다. 그러니 누가 우리에게 등불을 밝혀 이 어둠에서 길을 인도하겠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순례’도 시인의 표현처럼 유사합니다. 넘어도 넘어도 계속되는 첩첩산중을 지나듯 어둠은 더욱 맹렬하게 우리의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기에 우리는 너무나 멀리 와버렸습니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기도하고 우리의 마음속 등불을 꺼뜨리지 않게 노력합니다. 롯의 처처럼 이제 와서 뒤를 돌아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로가 “믿음” 자체에 집중을 했다면, 오늘 읽은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믿음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신도들이 믿음에 따라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람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2 베드 1:5-7
이는 믿음의 성장 프로세스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감정적 차원이나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성화의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개인의 차원에서 공동체의 차원으로, 그리고 이웃과 인류에 대한 박애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호연지기가 믿음 안에서 길러질 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변모 축일은 실제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의 변모와 관련된 단어인 “헤테로스 ἕτερος”라는 형용사는 “다른”이란 뜻으로, 원래의 모습에서 완전히 달라졌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는 평소 제자들이 보던 그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영광을 덧입은 그리스도의 영광이고, 또한 주님의 날에 그러한 영광을 덧입을 우리의 희망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그러므로 변모 사건의 주어가 주님에서 우리 그리스도인 개인으로 그리고 공동체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께서 변모하셨으니 우리도 변화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변신’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시작된 전인격적인 점증적인 ‘변화’ 말입니다. 그러할 때 주님의 변모 사건은 단순한 신비 체험을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를 기록한 공동체는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치 실제로 그들이 직접 주님의 변모를 목격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주님의 변모를 완전히 자신들의 변화로 체화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체험의 전승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공동체 속에서 고백하고 변화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베드로가 직접 주님의 변모를 눈으로 목격한 것처럼 믿음으로 그 공동체 안에서 똑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공동체가 가지는 믿음의 리얼리티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리얼리티 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신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오늘”이라는 현재 속에 고백으로 응집시킵니다. 하느님의 카이로스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케리그마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변모하셨으니, 우리도 지금까지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으로 체화되도록 우리도 그러한 경험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고백합시다. 그러할 때 우리는 혼자 외로이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이용익 시인이 “그토록 간절히 찾던 어둠 속을 밝혀 주는 등불”을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등불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주님의 변모 축일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들이 이 세상의 근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다니 7:9-10, 13-14
9 내가 바라보니
. 옥좌가 놓이고 태곳적부터 계신 이가 그 위에 앉으셨는데,
. 옷은 눈같이 희고
.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
.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그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10 그 앞으로는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다.
. 천만 신하들이 떠받들어 모시고
. 또 억조 창생들이 모시고 섰는데,
. 그는 법정을 열고 조서를 펼치셨다.
. …
13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14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성시_시편 97
1 주께서 왕위에 오르셨다.
. 온 땅은 춤을 추어라. ◯
.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2 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이고 ◯
. 정의와 공평이 그 옥좌의 바탕이요.
3 불길이 그를 앞서 가며 ◯
. 에워 싼 원수들을 살라 버린다.
4 번개가 한번 번쩍 세상을 비추니 ◯
. 온 땅이 이를 보고 부들부들 떤다.
5 산들도 주 앞에서, 온 땅의 주님 앞에서 ◯
. 초처럼 녹아내린다.
6 하늘이 그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
. 만백성은 그 영광을 뵈옵는다.
7 잡신들을 섬기는 자들아,
. 허수아비를 자랑하는 자들아,
. 창피를 당하여라. ◯
. 모든 신들아 그 앞에 엎드려라.
8 주여, 당신의 재판은 공정하시오니
. 시온이 이를 듣고 즐거워하며 ◯
. 유다의 딸들도 기뻐하옵니다.
9 주여, 당신은 온 세상에 으뜸이시오니 ◯
. 그 많은 신들 훨씬 위에 계시옵니다.
10 악을 미워하는 자를 주께서 사랑하시고,
. 당신을 믿는 자의 목숨을 지켜 주시어 ◯
.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
11 바르게 살면 그 앞이 환히 트이고 ◯
. 마음이 정직하면 즐거움이 돌아온다.
12 올바르게 사는 자들,
. 주님의 품에서 즐거워하여라. ◯
.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베드 1:16-19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알려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17 그분은 분명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영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그 분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17:5” 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으므로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19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복음서_루가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쯤 지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29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30 그러자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32 그 때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거기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떠나려 할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 34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뒤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버렸다. 35 이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시편 2:7; 이사 42:1; 신명 18:15”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36 그 소리가 그친 뒤에 보니 예수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기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침내 ~하게 되었다” (0) | 2023.08.20 |
---|---|
“거룩한 설복 Divine Persuasion” (0) | 2023.08.13 |
“영적 체험” (0) | 2023.07.30 |
“하느님의 양자” (0) | 2023.07.23 |
“가해자 vs. 피해자” (0) | 2023.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