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1. 가해_연중26주일
출애 17:1-7 / 시편 78:1-4, 12-14 / 필립 2:1-13 / 마태 21:23-32
“겸손의 찬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필립비서 2장에서 필립비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권면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네 가지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격려”,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반한 위로”, “성령 안에서의 친교”, “신자 간의 애정과 동정심” 등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의 출발점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봉사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덕목을 따르기 위해서는 “같은 생각”과 “같은 사랑”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교회가 하나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관계에서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이러한 이상적인 것이 먼저 작동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대신 “이기심과 야심 그리고 허영심”이 먼저 작동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 즉 그분이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서 “친히 지니셨던 마음”을 지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원시 그리스도 교회에 전승으로 내려오던 “그리스도 찬가”를 여기에 인용합니다. 이러한 찬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신지 25년도 채 되기 전에 그분에 대한 그리스도론이 이미 기독교 초기부터 확립됐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기독교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하게 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은 겸손히 자신을 비워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고, 하느님에 의해 부활하시고 승격되셔서 하느님께로 승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각각 ‘하강 그리스도론’과 ‘상승 그리스도론’이라 부릅니다.
오늘 2독서 6절~11절에 삽입된 “그리스도의 찬가”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먼저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동등한 지위가 있으신 분이라 합니다. 그러나 성육신 하셔서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자신을 한번 더 비워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의해 부활하시고, 승귀하셔서 영광을 받으셨으며, 이로 인해 모든 우주 만물이 그분을 경배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의 주님으로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을 우리는 너무 자주 듣고 고백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지는 의미를 초대교회 교인들이 느꼈던 감동으로 똑같이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죄인으로 죽은 예수 운동의 지도자가 그 짧은 기간 안에 어떻게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신비로 남습니다. 부활 사건과 성령 강림 사건이 아니고서는 이에 대해 합리적인 추론을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모두가 성령의 강력한 역사에 의함이라 여겨집니다. 필립비서가 써진 것이 고린토서와 비슷한 A.D. 56 또는 57년 경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삽입된 “그리스도 찬가”는 훨씬 이전에 형성된 전승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러한 그리스도 찬가를 통해 그리스도론을 체계화했을 겁니다. 한 인간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을 겁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가 기독교를 비판하며 파고든 지점도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미 그러한 설정을 전제로 이 문제를 탐구하게 되면 당연히 그러한 편으로 결론이 나게 마련입니다. 신앙을 다루는 일은 실제와 가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에는 분명히 우리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신비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이 한 가지 간과하는 점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도 신 존재 증명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따르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었고, 그러한 믿음을 따라 그가 가르치신 대로 그대로 생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로도 오늘 “그리스도 찬가”를 인용하면서 이를 예수의 마음과 본성인 “케노시스κενοσις”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은 은총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신 존재 증명은 그들에게 필요가 없는 문제였습니다. 은총으로 말미암는 믿음은 그냥 주님께서 주신 대로 믿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대로 사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그것은 분명 우리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는 믿음으로 살아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예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것은 겸손과 남을 섬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태 11:29-30 (개역개정)
개역개정으로 읽어드렸습니다. 사도 바울로나 예수님이나 똑같이 언급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자기 비움’ 즉 ‘케노시스’와 관련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 겸손하고 온유하면 결국 우리 마음이 평안을 얻고 주님이 주신 멍에조차도 가볍다고 말합니다.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짐이라 생각하는 부모를 전 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하기에 모든 어려움도 이겨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가 언급한 찬가에서 하이라이트는 바로 9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필립 2:9
앞부분에서는 주어가 그리스도였는데, 이제 이 구절에서는 주어가 바로 성부 하느님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먼저 낮추시니 누가 그분을 높이셨습니까? 바로 성부 하느님이십니다. 겸손이 먼저이고, 영광은 그 다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로 영광을 먼저 찾고 겸손은 그 다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을 자신을 낮추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 영광 다음에 겸손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적 축복, 일자리 축복, 명예의 축복이 그 사람의 겸손한 성품 이전에 주어지면 오히려 그 축복이 그 사람에게는 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축복이 저주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는 축복을 받았지만, 겸손하지 못해서 추방당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혜와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도 그 모든 영광이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열왕기서를 통해 깨닫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겸손했던 다윗은 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엘리야와 라이벌이었으며 바알 신을 섬겼던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의 아합조차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출 때는 야훼 하느님의 자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자신의 왕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여호람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지만 동시에 심판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성서는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하느님께 무한한 자비를 구하려면 먼저 그분이 심판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느님이심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하느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은총으로 모든 것을 받았으니 하느님께 감사하고 남에게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것도 주시고 나쁜 것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제 서품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안수 받고 품을 받는 그 순간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며 헌신의 표시로 바닥에 서품 후보자가 납작하게 엎드리는 때입니다. 바닥에 완전히 엎드린 자세가 바로 예배의 본모습입니다. 한자어 ‘예배(禮拜)’는 ‘예를 갖추어 절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를 절대자 앞에 우리를 낮추어 납작 엎드리는 복종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전능자 앞에 우리의 겸손과 헌신의 표이지요. 저도 서품식에서 그런 예배를 드렸고, 지난 대전교구장 성품식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장면을 봤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순종과 순명의 모습이 사제 서품 후에 급격히 사라지는 것을 종종 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서품 전과 후가 달라지는 성직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어디 성직자뿐이겠습니까? 국회의원들도 선거 전과 당선 후가 달라집니다. 선거 전에 겸손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들이 당선되고 나면 매우 권위적으로 돌변합니다. 물론 저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겸손을 버리는 순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셨듯이 겸손은 주님의 가장 큰 성품이고 우리 그리스도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없으면 믿음도 없다는 말이 가능해집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종교인은 될 수 있어도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닌 듯합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교만하다는 것은 그것은 성령이 아니라 미혹된 영을 받은 것입니다. 가식이 아닌 진정한 겸손은 우리 예수님의 본성에 닿아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2:8
사도 바울로는 ‘겸손’이란 단어를 3절에서 또 ‘그리스도 찬가’의 8절에서 동시에 사용합니다. “타페이노프로쉬네ταπεινοφροσύνη”. 이 말은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자신을 높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춘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싶을 때마다 주님의 케노시스를 본받아 자기 비움을 통해 겸손해지란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겸손의 표로 하느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않으시고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시어 죄가 없는 분이시면서도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순종과 겸손의 표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성호를 우리 몸에 그으며 겸손을 다짐하고, 십자가 묵주나 액세서리를 몸에 지니며 겸손을 배우려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와 몸에 지니는 십자가 장식들은 우리에게 부적이 아니라 순종과 겸손의 십자가를 닮겠다는 우리의 각오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십자 성호를 진심으로 긋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고린토 교회가 사분오열됐을 때 사도 바울로는 모든 분쟁과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환원시켜 문제를 풀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바울로파다, 우리는 베드로파다, 우리는 아폴로파다라는 분당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밑에서는 누가 높고 낮은지,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잘나고 못났는지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겸손과 순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밑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고, 자신의 잘남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불만, 그리고 교만과 자기 자랑, 남에 대한 판단과 비판이 자리할 때마다 그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의 고통과 겸손 앞에 우리의 마음이 비워짐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 비움이 바로 ‘케노시스’입니다. 그러한 자기 비움이 바로 겸손과 순종의 시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힘을 주시어 주님과 이웃에게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6주 (가해) 1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시어, 우리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출애 17:1-7
1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은 씬 광야를 떠나 야훼의 지시대로 진지를 옮겨 가면서 전진하였다. 르비딤에 이르러 먹을 물이 없는 것을 보고, 2 백성들은 모세에게 먹을 물을 내라고 들이대었다. 모세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느냐? 어찌하여 야훼를 시험하느냐?” 하고 말했지만, 3 백성들은 당장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으므로 모세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 4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죽일 것만 같습니다.” 5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 오너라. 나일 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오너라. 6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7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들었다고 해서 이 고장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하며 야훼를 시험했다고 해서 마싸아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성시_시편 78:1-4, 12-14
1 내 겨레여, 나의 가르침을 들어라. ◯
⋅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2 내가 역사에서 교훈을 뽑아내어 ◯
⋅ 그 숨은 뜻을 밝혀주리라.
3 선조들이 입으로 전해 준 이야기, ◯
⋅ 우리 모두 들어서 익히 아는 그 이야기,
4 주님의 영예와 그 크신 능력, 그리고 이루신 위대한 일들을 ◯
⋅ 우리는 다음 세대에 숨김없이 전하리라.
12 이집트 땅 소안평야에서 ◯
⋅ 저희 선조들에게 보여 주신 기적을 잊어 버렸다.
13 주님은 바다를 갈라 그들을 건네주셨고 ◯
⋅ 바닷물을 강둑처럼 서게 하셨다.
14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
⋅ 그들을 밤낮으로 인도하셨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필립 2:1-13
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2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3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13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복음서_마태 21:23-32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24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는지 말하겠다. 25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하늘이 준 것이냐? 사람이 준 것이냐?” 하고 반문하시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그 권한을 하늘이 주었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26 사람이 주었다고 하면 모두들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으니 군중이 가만 있지 않을 테지?” 하고 의논한 끝에 27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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