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8. 가해_연중27주일
출애 20:1-4, 7-20 / 시편 19 / 필립 3:4하-14 / 마태 21:33-46
“삶의 우선 순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읽은 1 독서의 십계명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우선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잠시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יהוה다”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기 확증적 표현입니다. 이는 신 존재 증명 자체가 무의미함에 대한 선포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고, 스스로 존재 증명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되지도 않았고, 시작과 끝도 없으며, 그분은 “있음”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야훼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이름은 다신교가 일반적이었던 고대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신과 구분되는 독특한 이름이었을 겁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도 결국 이 고대의 야훼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이나, 그리스, 인도, 일본과 같은 다신교 문화에서는 이러한 셈족(Semites, Semitic peoples, Semitic cultures)의 유일신 문화를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둘째 계명에서 “다른 신”이라고 공동번역성서가 번역한 것은 원래 복수인 “다른 신들”입니다. 이는 다신교에서 추앙하는 모든 신들을 뜻합니다. 그 신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모든 신들은 결국 인간이 지향하는 바와 인간의 간구가 투영된 인간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에 뿌리는 둔 다신교의 특징입니다. 뱀을 섬기는 종족은 독사로부터의 안전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독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뱀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우리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바로 ‘숭배와 추앙’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도전하면 더 큰 위험이 따르지만 두려움에 순응하고 숭배하게 되면 인간은 모종의 위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같은 번개라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제우스의 강력한 창과 권능으로 여겼고, 또 다른 고대인들은 번개를 뱀의 이미지에 투영하여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신들은 사람들과 세상과의 관계성을 투영하는 표징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이 추앙하는 ‘신토(神道)’는 교리도 경전도 없지만 섬나라 일본인들의 척박한 삶이 투영된 애니미즘과 조상숭배에 그 뿌리를 둡니다. 자연재해와 천재지변의 위협,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안전하지 않았던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과 소망을 투사하여 자신들만의 신들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갈구하는 모든 복이 신으로 투영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자연을 이해하고 관찰하면서 타협의 길을 모색한 결과였습니다. 두려움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종교를 통해 자연과의 공생의 길을 찾은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인간을 위협하고 짓누르는 존재는 자연이 아니라 “자본과 돈”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우리는 “맘몬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만든 교환수단이었던 ‘돈’에 의해 인간이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 물질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인은 “돈과 물질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으로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래로 인간은 자연의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자만했지만, 최근의 환경파괴로 인한 자연현상들을 보면 인간은 다시 한번 자연 앞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 같습니다. 환경재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종속적이라 여겼던 자연이 다시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위협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자본주의의 종말 앞에서 그리고 환경 재앙 앞에서 인간은 다시 한번 선택의 도전에 직면합니다. 그 도전은 고대 이스라엘이 다신교 문화 속에서 야훼 하나만을 신으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위협과도 유사합니다. 이제 인류는 인류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과연 어떤 신을 선택하게 될까요?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셋째 계명은 인간이 신을 대하는 기본자세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대하는 데는 분명 이에 맞는 형식과 예가 필요한 법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을 포함한 셈족 계열 종교의 신론과 연결됩니다. 유한자인 인간은 어떤 것으로도 무한자인 야훼를 표현할 것이 없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입니다. 이는 신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다신교의 입장에서는 이해 불가한 신론입니다. 야훼의 거룩함은 이 피조된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도 대체불가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극한으로 적용하여 “야훼”라는 이름조차 입으로 발화하지 않습니다. 모음이 없이 자음만으로 구성된 히브리어에서 “야훼”에 대한 발음은 현재 아무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편의상 “야훼”라고 부르지만, 그 정확한 발음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그 이름은 인간의 입에서 발음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 MT)에서 야훼라는 자음에 모음을 첨가하였지만, 그 발음을 하기가 두려워 대신해서 “아도나이(Adonai)” 즉 “주님”이란 말로 대체해서 발음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헬라어 구약성서인 70인역에서는 “야훼”를 헬라어 ‘큐리오스 (Kurios 主)’로 표기했습니다. 영어성서는 이러한 전통대로 대문자 ‘L’을 사용하여 “LORD”라고 표기합니다. 우리 한글 구약성서에도 하느님의 이름인 “엘”은 ‘하느님’으로 번역을 했고, ‘야훼’는 그대로 표기하거나 또는 ‘주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우리 기독교는 분명 십계명의 제3 계명을 어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야훼”라는 이름을 부르지만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르는 “야훼”라는 발음이 정확한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3 계명은 단순히 야훼의 이름을 발화하는 것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피조물인 우리와 다른, 거룩한 어떤 분이시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과 인간 사이에는 다신교와 다르게 어떠한 접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시인 김춘수는 말했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존재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이 말은 그분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부를 수 없지만, 그분은 우리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흙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며 인간을 “사람 즉 아담אדם”이라 부르시니 우리가 존재가 됐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담’은 “사람 또는 남자”를 뜻하는 일반 명사입니다. 즉 모든 인간을 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부를 수 없지만 그분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유대교나 우리 기독교는 모두 부르심의 종교가 됩니다. 이름을 부른 사람은 그 이름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보다 더 높음이 당연하고, 먼저 있음이 당연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종이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계명은 안식일 규정입니다. 이는 고대 노예 사회에서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인간이 달에 갈 수 있다는 발상만큼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이나 일반 사람들이 노동과 노역에서 풀려나는 것은 제사나 축제 말고는 없었습니다. 휴일 개념이 없었지요. 고대 수메르 문명의 신관을 반영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설화인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를 보면 인간은 왕과 왕족 그리고 제사장들을 위해 죽도록 고생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모든 인간은 태생부터 노예이고, 소모품일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종이나 주인이나 가축들조차도 무조건 쉬라는 독특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나안 정착을 할 때 얼마나 이방종족과 갈등의 원인이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휴일이 없는 사회에서 정기적인 휴일을 지정한 민족이 어떻게 존립할 수 있었을 까요? 요즘에도 일주일 노동 시간을 가지고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이 옥신각신하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대인들은 오히려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휴일이 허용되지 않던 사회에서 정기적 휴일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야훼는 자신이 부른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민족들 간에 경쟁 관계에서 또는 신분계급이 뚜렷한 관계에서 매우 불리하게 작용됐음은 당연합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을 높이는 측면과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는 따먹되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 말라는 명령과 유사합니다. 6일은 마음껏 일할 수 있지만, 일주일에 단 하루는 야훼를 위해,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셈족 종교에서 책임은 약속을 수반하게 마련입니다.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으로 이르기 마련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아무리 잘 달려도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 됩니다. 잘 달리는 자유보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자유가 더 귀한 법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자신의 삶을 멈추고 삶의 주인 되시는 야훼만을 생각하고 쉬라는 것이 야훼신앙의 핵심입니다. 안식일은 일주일에 한 번 인간이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 근원인 하느님을 돌아보게 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야훼는 정확하게 간파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필립 3: 7~9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 그는 율법에 매우 엄중하게 매달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느님과 하나 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제가 방금 십계명의 첫째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 설명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기. 그리고 그분을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도 바울로처럼 “쓰레기”로 여기기. 즉 나그네로서 이 세상은 잠시 거쳐가는 곳임을 깨닫기. 세 번째로 그분을 거룩함으로 섬기고 또한 우리도 그의 거룩함을 본받기. 그리고 네 번째로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우선권을 하느님께만 두기.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은 모두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를 일치시키는 작업과 동일합니다. 물론 십계명의 나머지 여섯 계명은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과 우리 간에 일대일 관계가 바로 서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세울 수 있는 법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이 말하는 모든 관계성의 핵심이고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십계명을 단 두 가지로 요약을 하신 것입니다. 위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이 단순한 원리가 모든 관계의 근본임은 틀림없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식상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공기가 그렇고 햇빛이 그렇고 비와 구름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자명하고 당연한 것들이 없을 때는 우리 존재 전체가 위기를 맞는다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그 자명한 것을 그리스도에게로 환원시키고,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쓰레기”로 여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붙들고, “부차적인 것”은 상식과 자연에 맡긴 것이지요.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소.” (사마천의 [사기] ‘소진 열전’ 중에서)
이는 고대 중국의 진나라 혜왕이 소진의 유세에 반대하며 한 말입니다. 무력보다 문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혜왕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금방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너무 쉽게 사라지는 법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확정되었다면, 그것은 깃털도 없이 하늘을 날려는 새와도 같은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길에 첫 발을 디딘 것일 뿐, 구원을 온전히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깃털이 자라야 하고, 또 열심히 나는 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필립 3:12a
그래서 그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이러한 고백을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며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왔으면 다시 뒤돌아 보지 않는 법입니다. 미련은 결국 자기 연민으로 우리를 인도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것을 하느님 안에서 찾기. 오늘 우리는 그 방법을 십계명에서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그분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안에 구원의 솜털들과 깃털들이 자라고 우리도 그리스도의 날개로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주변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중요한 순서대로 하나씩 정리되고 재편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매겨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하느님을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놓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7주 (가해) 1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께서는 하늘의 집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어 하느님의 성전을 이루는 거룩한 산돌로 쓰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출애 20:1-4, 7-20
1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
7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18 온 백성은 천둥과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에 자욱한 연기를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워 떨며 19 모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잘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일러주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신 것이다. 너희로 하여금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성시_시편 19
1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3 그 이야기도 그 말소리도 ◯
⋅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주시니
⋅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
⋅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 주님의 법도는 변함 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 주님의 법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
⋅ 모르고 짓는 죄 일랑 말끔히 씻어주소서.
13 일부러 범죄할까, 이 몸 막아 주시고 ◯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주소서.
¶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요, 내 구원자이신 주여, ◯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필립 3:4하-14
4하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5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 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14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복음서_마태 21:33-46
33 “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34 포도 철이 되자 그는 그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죽였다. 36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37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39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40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서에서,
⋅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 시편 118:22-23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43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44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 밑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45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46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 군중이 예수를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본에는 44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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