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25. 나해_사순2주일 감사성찬례
창세 17:1-7, 15-16 / 시편 22:23-31 / 로마 4:13-25 / 마르 8:31-38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로마 4:17 b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이라 인정하셨다고 합니다. 그 믿음이 지향하는 내용은 방금 읽어 드린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느님”,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엘 샤다이 אֵ ל ַׁשַׁדי” 즉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야훼 하느님을 이해한 믿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었기에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이러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의화 이야기”를 믿음의 예표로 제시한 것은 율법보다 믿음이 더욱 보편성을 가지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것이 그의 할례 이전이었음을 그는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즉 율법의 영향 아래 있지 않았을 때 아브라함을 하느님께서 부르셨고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움으로 간주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논리를 사도 바울로는 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가 보는 관점에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도 되면서 동시에 할례 받은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로가 전개한 믿음의 논리였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아니었으면 우리 남성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모두 할례를 받아야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믿음이 율법보다 더 앞서고 더 보편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어떤 것이 더 쉬울까요? 율법 준수가 쉬울까요? 아니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것이 더 쉬울까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2 독서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들으시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로마 4:18-21
율법 준수를 의로움의 조건으로 믿었던 유대인들과 다르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한 사도 바울로가 제시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 율법 준수가 훨씬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저는 듭니다. 율법의 준수는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것도 “절망” 가운데 믿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절망에 빠지면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고 허둥대기 때문입니다. 상식을 넘어서는 믿음은 망상증환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태가 닫힌 나이 든 여인이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도 90세의 할머니가. 그래서 사라도 하느님의 약속을 듣고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가 아니라 첩을 통해서 하느님의 약속을 자기 스스로 성취하려 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의 치부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데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 속여서 자기의 목숨을 부지했고, 첩을 통해 얻은 자식 때문에 가정불화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믿음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뜻입니다. “착한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언 24:16)는 잠언서 말씀처럼, 아브라함의 믿음도 많은 실수와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헌신 그리고 인내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런 믿음의 길을 마태오복음 7장 14절에서 “좁은 문”이라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믿음과 신념의 혼돈도 믿음에는 큰 걸림돌입니다. 무언가를 확신한다는 것이 온전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인지 아니면 자기 신념에 대한 믿음인지 구분하는 것도 사실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과 신념 사이에서 늘 왔다 갔다 헤매곤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믿음을 지키는 데 많은 실수를 거듭했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종종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의 믿음은 안전한가?” “나는 나의 신념을 믿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의 발로입니다. 신념은 전적으로 자기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준수로는 결코 인간은 의로워질 수 없다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 율법을 준수하여 의롭게 된 사람에게 은총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율법 무용론을 주장한 것은 율법은 죄를 깨닫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율법 준수로 의에 이르는 길이 분명히 있다면 믿음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율법을 준수하면 할수록 인간은 ‘죄’를 더 깨닫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죄는 올무처럼 인간을 속박시키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 아래 있는 사람은 은총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됩니다. 율법의 권세는 사람을 단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율법이 사랑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사랑이 없는 단죄함과 죽음만 남았습니다. 믿음은 은총의 선물로서 자비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 8:34-35
오늘 복음서는 “예수 수난 예언 사화”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하실지 처음으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바로 앞에는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한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 고백 후에 “예수 수난 예언 사화”가 배치됨으로 베드로는 수제자에서 사탄으로 순식간에 체면이 구겨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처음 알아봤던 수제자가 예수의 죽음 예언 앞에서는 예수를 적대하는 사탄이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신념의 고백일 뿐이었습니다. 신념에는 자기의 생각, 자기의 이익, 자기의 편의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자기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예수를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에 반하는 “예수의 수난 예고”에는 좀처럼 동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적극적으로 예수를 막음으로써 하느님을 대적하는 사탄이란 소리를 듣게 됩니다. 신념에서 아직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물론 이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베드로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신념을 구분하는 분기점이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나의 믿음이 신념인지 아니면 믿음인지를 확인하는 영분별은 ‘자기 희생’, ‘자기 비하’, ‘자기 손해’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자기 희생적인, 자기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을 믿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처럼 뭔가 얻을 것이 있어서, 자기에게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이 있던가, 자기의 비위가 상하는 일이 생기면 금방 하느님을, 교회 공동체를 떠납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 공동체와 관계를 하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신념은 결과적으로 믿음에 대적하는 사람을 만듭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전제로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못했지만 믿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랑을 추구하고, 아직 있지도 않은 미래를 현재화합니다.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마치 사랑하는 님처럼 사랑하고 섬깁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늘 신념을 따르는 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자녀인 이사악과 신념의 자녀인 이스마엘 간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그랬던 것처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요셉을 “꿈쟁이”라고 놀린 형제들의 말을 상기해 보십시오. 요셉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 형제들은 자신들의 신념 이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신념은 결코 믿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 신뢰는 구약에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전능함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복음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능한 것은 바로 “엘 샤다이”, 즉 하느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어리둥절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관점에서 이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분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예수께서 부활할 수 있나?라고 질문하는 것은 가능하나, 이를 불신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이란 사실을 믿지 않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여겨집니다. 자기의 신념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전능하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신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성경을 봐도 글자만 보일 뿐이고, 내용은 전혀 상식에 맞지 않게 느껴져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으려고 펴면 창세기를 결코 넘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마태오복음서 1장의 예수 족보 이야기에서 성경을 닫아버립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조차 제대로 읽지 않으니 믿음의 씨앗인 말씀의 소스도 우리는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믿음의 씨앗인 말씀이 마음에 뿌려지지 않으니 믿음이 우리 안에서 좀처럼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제 얘기를 드려서 죄송하지만, 제가 처음 하느님을 영접했을 때 성경 말씀이 얼마나 달고 은혜스러웠던지 말씀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너무 달콤하게 성경을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느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한 단어 한 단어 제 양심에 비수처럼 꽂히는 체험을 했었습니다. 믿음의 은총이 없으면 말씀을 사모하기 힘듭니다.
믿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과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듣고 읽고 실천하며 자라납니다. 그래서 신념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말씀을 가까이하시길 권면합니다. 그 말씀을 ‘엘 샤다이’, 즉 ‘전능하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라는 관점으로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궁금증을 가지고 말씀을 읽을 때 호기심이 발동하여 집중력도 생깁니다. 자기의 관점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관점에서 성서의 내용들을 다른 차원으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평소에 말씀을 잘 읽지 않으셨다면 이 사순절에 신약성서라도 꼭 통독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은총으로 믿음을 주신 주님께서 이 사순절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사순2주 (나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신실한 믿음으로 주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17:1-7, 15-16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되던 해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없이 살아라. 2 나는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을 세워 네 후손을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4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5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리니,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 불리리라. 6 나는 너에게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왕손도 너에게서 나오게 하리라. 7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
15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분부하셨다. “네 아내 사래를 사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그의 이름은 사라이다. 16 내가 그에게 복을 내려 너에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리라. 그에게 복을 내려 많은 민족의 어미가 되게 하고 그에게서 민족들을 다스릴 왕손이 일어나게 하리라.”
17: 1 “전능한 신”은 히브리어로 ‘엘 사따이’ אֵ ל ַׁשַׁדי
성시_시편 22:23-31
23“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찬미하여라. ◯
. 야곱의 후손들아, 주님께 영광 돌려라.
¶ 이스라엘 후손들아, ◯
. 주 앞에 모두 다 머리를 조아려라.
24 내가 괴로워 울부짖을 때
. 귀찮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
. 탄원하는 소리 들어 주셨다.“
25 큰 회중 가운데 주님을 찬송함도,
. 주께서 허락하심이니, ◯
. 주님을 경외하는 무리 앞에서 나의 서원 지키리라.
26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고
. 주님을 찾는 사람은 그를 찬송하리니 ◯
. 그들의 마음 길이 번영하리라.
27 온 세상이 주님을 생각하여 돌아오고 ◯
.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니,
28 만방을 다스리시는 주님께 ◯
. 모든 왕권이 있으리라.
29 땅 속의 잠든 이들도 주 앞에 엎드리고 ◯
. 먼지 속에 내려간 자들도 주 앞에 머리를 조아리리라.
30 이 몸은 주님 덕분에 살고
. 오고 오는 후손들이 그를 섬기며 ◯
. 그 이름을 세세대대로 전하리라.
31 주께서 건져주신 이 모든 일들을 ◯
. 오고 오는 세대에 길이 전해주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4:13-25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14 만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15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창세 17:5”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창세 15:5”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창세 15:6”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하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복음서_마르 8:31-38
31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32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33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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