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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복음”_2024.4.14. 나해_부활3주일_설교문

James Chae 2024. 4. 14. 05:19

 

2024.4.14. 나해_부활3주일

사도 3:12-20 / 시편 4 / 1요한 3:1-7 / 루가 24:36-48

 

 

원초적 복음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루가 23:37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이 이어질수록 원시그리스도 공동체는 혼란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많은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했습니다. 나자로의 소생을 기억하는 제자들은 로마의 사형틀에서 죽어간 예수가 부활했다는 생각에 이르는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던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감추고 그가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고 소문을 냈지만(마태 28:11-15), 그러한 것을 기획할 정도로 담대한 제자들이 수제자들 중에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확인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있기까지 매우 혼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 사건이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을 통해 확인합니다. 루가는 그날에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가 담대하게 설교를 것을 기록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에 감동하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 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숫자가 정확하게 양적인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날 세례 받은 사람이 많았다 정도로 의미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본문의 의도에 합합니다. 중요한 것은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 오늘 읽은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통해 우리는 원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정의를 내렸는지를 확인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의 교리와 신학 그리고 전통이 확립되기 이전의 복음의 내용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우리는원초적 복음이라 부를 있습니다. 이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복음과 원시 그리스도교가 생각한 복음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복음으로부터 지금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확인할 있습니다.

 

루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예수를하느님의 (παῖς θεοῦ)”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2 이사야서(이사야 40~55) 나오는 고난 받는야훼의 이야기와 예수를 동일시하는 깨달음이 초기부터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가지 관점으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고, 둘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행위입니다. 루가는 둘을 각각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합니다. 인간이 예수를 죽음으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무지함처럼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동시에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무지함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인간에게회개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μετανοέω 메타노에오 직역하면생각을 바꾸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의역해서회개하다 번역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같은 뜻의 히브리어는שׁוּב 슈브입니다. 슈브는돌아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헬라어메타노에오 히브리어슈브 모두방향전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으니 우리 인간에게는 방향전환을 기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가던 길을 돌이켜서 바른 길로 돌아서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새로운 되십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베드로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회개한 사람이 장정만 5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강림절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는 아직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안식일에솔로몬 행각에서 종종 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솔로몬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에 있는 회랑입니다. 예수께서도 살아 계실 이곳 솔로몬 행각을 거니셨다는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 루가의 진술은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원초적 복음이 선포될 원시기독교는 아직 독립된 교회 조직이나 형태를 온전히 갖추지 않았음을 반증합니다. 

 

이렇게인간의 무지함과 하느님의 구원의 이라는 중의적 정의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부여됐습니다. 이것이 원초적 복음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이것을 알리고 증언하는 자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복음뒤에 자신들을 완전히 가려버렸습니다. 교회 제도와 전통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로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고 권위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제도화되기 이전에 제자들은 철저하게원초적 복음뒤로 자신들을 가려버렸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들을 통해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사람들이 기적에 집중하거나, 사람인 제자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같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 이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왜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이 사람을 걷게 하여준 줄로 생각합니까?” 사도 3:12

 

 

만약 제자들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기적을 나타내셨다는 점을 강조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그리고 자신들이 아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만큼 실증적인 것에 사람들은 쉽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보다 보이는 ,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반신 장애인이 걷는 기적에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제자들이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는 그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그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주목받고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인데 제자들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욕구가 제자들에게는 없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에 집중하길 바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바로 보이지 않는 복음에 대한 믿음 말입니다. 믿음은 실증적인 것이나,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있는 것과 분명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 믿음으로 집중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통해, 은사를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은연중에 강조함으로써 하느님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그러한 인정받음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새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자신이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주신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향이 짙어지면 어느새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탄생하고, 교만한 사제들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구원자로서의 예수를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된 것이며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한 것입니다.” 사도 3:16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제자들은 단순히 증언자일 중요한 것은믿음이었습니다. 사람이 보는 이상의 것을 보는 믿음 말입니다. 그것은 토마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요한 20:29) 말입니다. 믿음은 예수라는 이름을 믿는 믿음이고, 믿음은그분으로 말미암는 믿음으로써 출처는 하느님이란 점이 여기에서 강조됩니다. 결국 하느님께로부터 믿음이 예수를 온전하게 보게 하고, 온전한 믿음이 하느님의 능력을 일으킨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감각과 이성을 앞섭니다. 그리고 루가는 믿음이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사임을 여기에서 드러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자신들이증인 목격자라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μάρτυς 마르투스”, 증인이라는 헬라어는 또는 귀로 보고 들은 증인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보았고 직접 들은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1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제자가 아닌 사도라고 우리는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최초의 목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 들은 것을 실증적이고 합리적으로 증거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말이나 어떤 기적 또는 사건으로 증명될 없는 믿음의 영역인 것입니다. 실증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광채에 주목했을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렸던 것입니다. 오늘 하반신 장애인이 걷게 사건에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처럼. 그들은 사건이 제자들을 통해 발현된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실증적이었습니다. 하반신 장애인은 걸었고, 걷는 기적은 모든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반신 장애인은 성전의아름다운 앞에서 사람들에게 생계를 위한 돈을 구걸하던 사람입니다. 성전에서아름다운 어디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곳에서 종종 장애인들이 구걸을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자들을 만난 장애인은 병이 낫는 것보다 오히려 실증적인 돈을 먼저 요구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 만질 있는 ,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반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가 이상 나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금과 이라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의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먼저자신들을 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증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 자신들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실재, 믿음을 그에게 준다고 말합니다. 바로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말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실증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을 압도했습니다. 장애인은 그동안 자신을 붙들었던 구걸하는 신분에서 이제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에껑충껑충뛰기도 했습니다. 실증적인 사람이 이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가 치료받은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믿음에 하느님의 능력이 실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람들이 기적을 통해 자신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믿음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페미니스트 작가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글을 읽으며 끊임없이 자신이 깨닫는 사실은 사람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모성애에 대한 그녀의 진술과 남성 가부장에 순응한 여성들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하지만, 그녀도 자신이 만든 틀을 벗어나서 모성애와 사랑에 대해 제대로 있는 기회를 가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만든 페미니스트의 프레임으로 다른 여자들과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저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페미니스트와 가부장이 따로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감정이 그렇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영향에 취약하다면 정말 그러한 틀을 벗어나서 우리 안에 살아남을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몇이나 남을까요? 또한 편견과 사회적 프레임에서 벗어난 믿음은 얼마나 존재할 있을까요?

 

우리는 각자의 경험에 따라, 각자의 지식에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부활을 이해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교리적으로 자신이 처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복음과 부활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다시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나 합리적 이성 등과 같은 실증적인 기제로는 도저히 부활과 복음을 이해하는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교리와 교회의 전통도 믿음에 앞서지는 못합니다. 철학과 학문적 이론의 기제도 믿음에 앞서지 못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행복한 것은 정확하게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프레임이나 교리와 전통에 의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실증적인 , 합리적인 , 눈으로 있고 손으로 만질 있는 것은 인간의 감각과 이성에만 의존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확인하는 원초적 복음 우리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원초적 복음은 우리의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방향 전환을 촉구하는 회개이면서 동시에 회개를 통한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 그리고 그분의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소식입니다. 감성이나 감각, 그리고 이성을 내려놓은 지점에서 만나는 이러한원초적 복음 우리의 순수한 믿음의 증언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부활3 (나해)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께서 빵을 떼실 때에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았나이다. 비오니,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지금도 세상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증거하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3:12-20

12 베드로는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사람을 걷게 하여준 줄로 생각합니까? 13 여러분이 하느님의 예수를 잡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을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작정하였는데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출애 3:6, 15이신 하느님께서 바로 예수를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죄없으신 그분을 배척하고 그분 대신에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여 15 마침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목격자들입니다. 16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것입니다. 이것은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것이며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사람을 완전히 낫게 것입니다.

17 그런데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똑같이 무지한 탓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빌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씀이 미리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19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이며 20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것입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예수가 그분이십니다.

 

 

 

성시_시편 4

1     무죄함을 밝히시는 하느님, 부르짖음 들으소서
.     곤경에서 나를 빼내시고, 불쌍히 여기사 기도를 들으소서.
2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영광을 짓밟으며
.     언제까지 헛된 일과 거짓을 찾아 헤매려느냐?
3    알아 두어라, 주께서는 경건한 자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     내가 부르짖으면 언제나 들어 주신다.
4    무서워하여라, 다시는 죄짓지 마라.
.     자리에 누워 반성하여라, 고요를 깨지 마라.
5    제물을 바쳐 죄를 벗어라.
.     그리고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6  “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줄까?”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     주여, 밝으신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7     마음에 심어 주신 당신의 기쁨,
.   곡식과 포도주가 풍년이다흥겨워 하는 저들의 기쁨보다 크옵니다.
8    누운즉 마음 편하고 단잠에 잠기오니,
.     내가 이렇듯 안심하는 것은 다만 당신 덕이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요한 3:1-7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자입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5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세상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6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언제나 죄를 짓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7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사람입니다.

 

 

 

복음서_루가 24:36-48

36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알았다. 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39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 만져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40 하시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 41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는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생선 토막을 드리니 43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45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46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47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48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다.